눈동자
마 10:24-25 / 1982. 11. 14.
오늘은 교회 학교 헌신예배, 즉 교사들의 헌신 예배입니다. 헌신예배라고 하면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겠노라고 새롭게 다짐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사실 선생님들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칭찬도 별로 듣지 못 하고, 수고했다는 말도 잘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아니 오히려 전도사한테 뭐 잘못했다고 핀잔이나 듣는 그런 자리가 바로 교사인 것을 제 자신이 너무나 잘 압니다. 묵묵히, 맡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애쓰시는 선생님들께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예배가 우리를 뒤돌아보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기회가 되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아 각지로 보내시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라고 하시고 바로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본문의 앞뒤에 신앙생활 할 때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오늘의 본문은 단순히 교육에 관한 구절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 모두 교사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기껏 잘 되어 봤자 우리들 정도 밖에는 되지 않다고 했을 때 이 구절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경고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재능을 주셔서 교사의 직분을 감당해 온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주는 구절이라고 여겨집니다.
선생님 여러분, 이 시간에 먼저 “나는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여러분에게 배우는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앞에 그려 보십시오. 그리고 물어 보십시오.
“그 학생 하나하나가 지금 어떤 수준에 있는가? 앞으로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가?”
하루는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이 밤에 몰래 예수를 찾아 왔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께 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 3:2) 란 말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를 단순한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가 그의 생애 중 많은 시간과 정력을 가르치는 일에 바쳤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예수는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스승이요,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요, 또 우리가 우리에게 배우는 학생들에게 제시해 주어야 할 목표입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는 우리는 사실 우리에게 배우는 학생들과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교육 아니 기독교 교육 전체를 통하여 하나의 커다란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아니 기독교 교육이 이미 절박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많은 사람이 느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성경이 성경으로 읽히지 않는다.”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예수가 과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과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위대한 신학자?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 위대한 교육자? 수십 만 명 앞에서 설교하는 유명한 부흥사?
저는 그 답을 누가 할 수 있을지 좀처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저는 스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관심은 스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가르침은 도대체 어떠했는가에 쏠려 있습니다.
첫째로, 성서에 의하면 “예수의 교훈이 권위있는 교훈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 7:28-29에 보면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아마도”라든가 “그럴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말이 없으며 사변이나 상상, 혹은 더듬는다든가 우물쭈물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란 말이 강하게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는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은 노예처럼 전승에만 의존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늘 “모세가 이렇게 말했다”라든가 “율법에 이렇게 쓰여있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종교는 모두 간접적으로 얻어 들은 종교였습니다.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성서에 뭐라고 그러더라” 정도 밖에는 이야기 하지 못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둘째로, 예수의 교훈이 권위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의 교훈은 어떤 의미에서는 훈계적이거나, 교리적이거나, 동의를 강요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찾아 보게 됩니다. 사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 아주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까?
그러나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요 15:15)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천천히, 천천히, 한 단계씩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강요하거나 훈계하거나 자기 뜻에 굴복시켜서 자신의 뜻을 단번에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학생들을 바로 내 기준에 맞추어서 판단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맹목적인 복종만을 강요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교사로 있을 때 뭐든지 다 해야지?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셋째로, 스승으로서의 예수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답을 제시 해주는 것 보다는 오히려 관심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찾아와 시험 삼아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이에 율법사는 자기가 다 안다고 뽐내듯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대답을 옳다고 인정하시면서 ”그렇게 행하면 살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칭찬받은 그 율법사는 의기양양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 이쯤되면 대답은 뻔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벌써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지”라든가 “자비를 베푼 사람이지”라고 하는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 라고 시작합니다. 예수는 결코 기계적인, 틀에 박힌 율법과 대답을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물음을 던지게 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십니다.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어떤 틀에 박힌 생각을 갖고 학생들의 개성과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심각한 문제를 묵살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저는 어떤 학생이 저에게 해준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우리 선생님은요, 내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찾아 갔더니 대뜸 ‘너희들한테 무슨 문제가 있겠니?’ 라고 말씀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냥 와 버렸어요.”
사랑하는 선생님 여러분, 교회에서의 교사는 바로 예수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학생들의 친구이어야 합니다.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도자이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앞에서 던진 질문 즉 “예수가 과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여러 선생님 한 분, 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의 맡은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한 분, 한 분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신다면, 현대 기독교 교육의 위기는 어떤 위대한 신학자나 목사나 교육학자나부흥사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일선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과 씨름하고 있는 선생님 여러분, 살아있는 예수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선생님 여러분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아니 분명히 극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동시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 28:19-20)고 약속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여기서 끝내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는 선생님들만 계신 것이 아니고 교회 어른들이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같이 예배드리고 계시니까 아무래도 몇 가지 말씀을 더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 직분 가운데 힘들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교사는 무척 힘든 직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교사들은 아침 1부 예배에 참석해야 되니까 9시까지 와야 하고, 공과 공부 준비해야 하고, 교회의 참석해야하고, 교사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해서 배워야하고, 그런데 교육환경은 어떻습니까? 아침 9시 예배가 끝나면 중고등부 학생들은 2층의 각 교실에 들어가 성경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2층 홀에서는 어린이 성가대 연습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괜찮습니다. 주일 날 11시 경부터 12시 너머까지 장로님들께서 1층에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식당에서는 중고등부 성가대가 연습하느라고 피아노 소리와 노래 소리가 어울려 퍼져 나갑니다. 이 때 1층 한 구석에서는 바로 여러분의 손녀, 손자인 유치부 아이들이 그 좁은 방에 쪼그리고 앉아서, 간식 담은 접시도 제대로 놓을 데가 없어서 선생님들이 접시를 들고 아이들이 간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하고 율동을 합니다.
겨울이 되어도 난로 놓을 만 한 장소가 없습니다. 자녀들을 교사들에게 맡겨 놓으신 부모님 여러분, 학교 선생님들 대접에는 신경을 쓰면서 가장 귀하다고 하는 신앙교육을 맡은, 자녀의 영혼을 맡은 교회 선생님에게는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십니까?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안됐습니다 마는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교육을 맡은 전도사가 새로 오면 장로님들이 시간을 내서 전도사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식사를 같이 하면서 하겠죠. 적어도 새로운 전도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교회 교육을 어떻게 해 나가려고 하는지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만큼 믿고 맡긴 것이라고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교회 교육에 무관심한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배우고 가르치며 흩어지는 교회”라고 하는 우리의 표어는 교육에 관한 관심과 투자없이는 한낱 메아리가 되어 버릴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1982년도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83년도를 위한 계획과 준비, 그리고 교사 모집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사가 함께 일하자고, 봉사를 좀 하자고 권하면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자격이 없다” 고 말씀하시는 선생님들. 그럼 여태까지는 능력이 있어서 가르치셨습니까? 자격이 있어서 가르치셨습니까?) 아닙니다. 가르치는 것, 그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여러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가르치십시다.
부모님 여러분, 여러분이 어려서 교회 다니실 때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들려주신 성경 말씀이 바탕이 되어 여러분의 신앙이 자랐듯이 지금 자녀들의 신앙은 바로 오늘의 선생님들에 의해서 심어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바로 그렇기에 오늘의 교회 학교 헌신 예배는 단순한 교사 헌신 예배가 아니라 우리 교회 전체의 헌신 예배라고 저는 믿습니다.
마 10:24-25 / 1982. 11. 14.
오늘은 교회 학교 헌신예배, 즉 교사들의 헌신 예배입니다. 헌신예배라고 하면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겠노라고 새롭게 다짐하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사실 선생님들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칭찬도 별로 듣지 못 하고, 수고했다는 말도 잘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아니 오히려 전도사한테 뭐 잘못했다고 핀잔이나 듣는 그런 자리가 바로 교사인 것을 제 자신이 너무나 잘 압니다. 묵묵히, 맡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애쓰시는 선생님들께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예배가 우리를 뒤돌아보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기회가 되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아 각지로 보내시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라고 하시고 바로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본문의 앞뒤에 신앙생활 할 때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오늘의 본문은 단순히 교육에 관한 구절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 모두 교사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기껏 잘 되어 봤자 우리들 정도 밖에는 되지 않다고 했을 때 이 구절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경고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재능을 주셔서 교사의 직분을 감당해 온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주는 구절이라고 여겨집니다.
선생님 여러분, 이 시간에 먼저 “나는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여러분에게 배우는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앞에 그려 보십시오. 그리고 물어 보십시오.
“그 학생 하나하나가 지금 어떤 수준에 있는가? 앞으로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가?”
하루는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이 밤에 몰래 예수를 찾아 왔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께 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 3:2) 란 말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를 단순한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가 그의 생애 중 많은 시간과 정력을 가르치는 일에 바쳤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예수는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스승이요,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요, 또 우리가 우리에게 배우는 학생들에게 제시해 주어야 할 목표입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는 우리는 사실 우리에게 배우는 학생들과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교육 아니 기독교 교육 전체를 통하여 하나의 커다란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아니 기독교 교육이 이미 절박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많은 사람이 느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성경이 성경으로 읽히지 않는다.”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예수가 과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과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위대한 신학자? 세상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 위대한 교육자? 수십 만 명 앞에서 설교하는 유명한 부흥사?
저는 그 답을 누가 할 수 있을지 좀처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저는 스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관심은 스승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가르침은 도대체 어떠했는가에 쏠려 있습니다.
첫째로, 성서에 의하면 “예수의 교훈이 권위있는 교훈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 7:28-29에 보면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아마도”라든가 “그럴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말이 없으며 사변이나 상상, 혹은 더듬는다든가 우물쭈물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란 말이 강하게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는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은 노예처럼 전승에만 의존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늘 “모세가 이렇게 말했다”라든가 “율법에 이렇게 쓰여있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종교는 모두 간접적으로 얻어 들은 종교였습니다.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성서에 뭐라고 그러더라” 정도 밖에는 이야기 하지 못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둘째로, 예수의 교훈이 권위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의 교훈은 어떤 의미에서는 훈계적이거나, 교리적이거나, 동의를 강요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찾아 보게 됩니다. 사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다 아주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까?
그러나 예수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요 15:15)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천천히, 천천히, 한 단계씩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강요하거나 훈계하거나 자기 뜻에 굴복시켜서 자신의 뜻을 단번에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학생들을 바로 내 기준에 맞추어서 판단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맹목적인 복종만을 강요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교사로 있을 때 뭐든지 다 해야지?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셋째로, 스승으로서의 예수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답을 제시 해주는 것 보다는 오히려 관심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찾아와 시험 삼아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이에 율법사는 자기가 다 안다고 뽐내듯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대답을 옳다고 인정하시면서 ”그렇게 행하면 살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칭찬받은 그 율법사는 의기양양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 이쯤되면 대답은 뻔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벌써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지”라든가 “자비를 베푼 사람이지”라고 하는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 라고 시작합니다. 예수는 결코 기계적인, 틀에 박힌 율법과 대답을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물음을 던지게 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십니다.
선생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어떤 틀에 박힌 생각을 갖고 학생들의 개성과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심각한 문제를 묵살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저는 어떤 학생이 저에게 해준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우리 선생님은요, 내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찾아 갔더니 대뜸 ‘너희들한테 무슨 문제가 있겠니?’ 라고 말씀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냥 와 버렸어요.”
사랑하는 선생님 여러분, 교회에서의 교사는 바로 예수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학생들의 친구이어야 합니다.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도자이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앞에서 던진 질문 즉 “예수가 과연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여러 선생님 한 분, 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의 맡은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한 분, 한 분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신다면, 현대 기독교 교육의 위기는 어떤 위대한 신학자나 목사나 교육학자나부흥사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일선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과 씨름하고 있는 선생님 여러분, 살아있는 예수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선생님 여러분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아니 분명히 극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동시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 28:19-20)고 약속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여기서 끝내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는 선생님들만 계신 것이 아니고 교회 어른들이 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같이 예배드리고 계시니까 아무래도 몇 가지 말씀을 더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교회 직분 가운데 힘들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교사는 무척 힘든 직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교사들은 아침 1부 예배에 참석해야 되니까 9시까지 와야 하고, 공과 공부 준비해야 하고, 교회의 참석해야하고, 교사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해서 배워야하고, 그런데 교육환경은 어떻습니까? 아침 9시 예배가 끝나면 중고등부 학생들은 2층의 각 교실에 들어가 성경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2층 홀에서는 어린이 성가대 연습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괜찮습니다. 주일 날 11시 경부터 12시 너머까지 장로님들께서 1층에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식당에서는 중고등부 성가대가 연습하느라고 피아노 소리와 노래 소리가 어울려 퍼져 나갑니다. 이 때 1층 한 구석에서는 바로 여러분의 손녀, 손자인 유치부 아이들이 그 좁은 방에 쪼그리고 앉아서, 간식 담은 접시도 제대로 놓을 데가 없어서 선생님들이 접시를 들고 아이들이 간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하고 율동을 합니다.
겨울이 되어도 난로 놓을 만 한 장소가 없습니다. 자녀들을 교사들에게 맡겨 놓으신 부모님 여러분, 학교 선생님들 대접에는 신경을 쓰면서 가장 귀하다고 하는 신앙교육을 맡은, 자녀의 영혼을 맡은 교회 선생님에게는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십니까?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안됐습니다 마는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교육을 맡은 전도사가 새로 오면 장로님들이 시간을 내서 전도사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식사를 같이 하면서 하겠죠. 적어도 새로운 전도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교회 교육을 어떻게 해 나가려고 하는지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만큼 믿고 맡긴 것이라고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교회 교육에 무관심한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배우고 가르치며 흩어지는 교회”라고 하는 우리의 표어는 교육에 관한 관심과 투자없이는 한낱 메아리가 되어 버릴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1982년도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83년도를 위한 계획과 준비, 그리고 교사 모집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사가 함께 일하자고, 봉사를 좀 하자고 권하면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자격이 없다” 고 말씀하시는 선생님들. 그럼 여태까지는 능력이 있어서 가르치셨습니까? 자격이 있어서 가르치셨습니까?) 아닙니다. 가르치는 것, 그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여러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가르치십시다.
부모님 여러분, 여러분이 어려서 교회 다니실 때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들려주신 성경 말씀이 바탕이 되어 여러분의 신앙이 자랐듯이 지금 자녀들의 신앙은 바로 오늘의 선생님들에 의해서 심어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바로 그렇기에 오늘의 교회 학교 헌신 예배는 단순한 교사 헌신 예배가 아니라 우리 교회 전체의 헌신 예배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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