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와 십자가
고전 1:18-31(22-25) / 1982.12.12
먼저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석용원)
“무엇 땜에 당신은 오셨습니까
당신이 내 성을 아십니까
당신이 내 이름을 아십니까
무슨 탓에
겁 많고 부끄럼 많은
처녀의 몸을 빌려 나셨습니까
무슨 탓에
귀한 몸이 강보에 쌓여
그 누추한 말구유에 누었습니까
황금, 유황, 몰약의 보배합 열어
동방박사 세 분이서
예물이라도 드렸지만
아무것도 드릴 것 없는
나를 위하여
어쩌자고 당신은 나셨습니까
당신이 내 몸둥일 보셨습니까
당신이 내 속맘을 보셨습니까
은화 설흔 잎에
당신을 팔면
온 산 언덕마다 피로 변할 골고다.
쓰셔야 할 가시관을 모르십니까
지셔야 할 십자가를 모르십니까
무엇 땜에 당신은 오셨습니까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이제 일주일 지나고 토요일이면 성탄절입니다.l 그리고 동시에 오늘은 인권주일이자 성서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권에 관한 문제, 성서에 관한 문제를 말씀드려야 할 날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바로 예수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게 공식적으로 성탄절메시지를 전할 시간이 없을 것 같기에 저는 오늘 예수의 탄생에 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설교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하고 아주 많이 고심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화의 계절”로 하려고 생각하다가 본문과 잘 맞지 않을 것 같아서 “베들레헴에서 골고다로”라고 잡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길다고 생각되어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좋은 제목을 찾아내었습니다. “바보들은 복이 있나니”가 그것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바보들의 명절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주보에 실으려고 임 전도사님께 이야기를 했더니 제목이 좀 가벼운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오늘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기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제 마음 속에는 바보에 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기와 십자가”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어렵게 말하면 “아기”와 “십자가”라는 단어는 완전히 모순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아기면 아기지, 거기에서 어떻게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면 십자가이지, 거기에서 어떻게 아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생각할 수 없는 모순, 역설, paradox. 저는 먼저 성탄절은 모순, 역설 그것도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이해하기 힘든 모순, 역설, paradox의 계절임을 말씀드립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982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는 요셉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새록새록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아기, 어린아이.
일찍이 우리의 위대한 선각자요, 스승이었던 소파 방정환은 그 유명한 “어린이 예찬”이라는 글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서 모은 것이 어린이의 자는 모습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모습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자는 모습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것 같고, 이 세상의 평화라는 평화는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싶게 어린이의 자는 모습은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이 세상의 곱고 부드럽다는 아무 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부드럽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그 서늘한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이렇게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큼 가볍게 코를 골면서 편안히 잠자는 이 좋은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우리가 종래에 생각해 오던 하나님의 얼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오, 어린이는 지금 내 무릎위에서 잠을 잔다. 더할 수 없는 참됨과, 더할 수 없는 착함과,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을 갖추어 가진 어린 하나님이 편안하게도 고요한 잠을 잔다.“
바로 이런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성서는 바로 그 아기의 이름이 “예수”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이 엄청나게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예수의 탄생에 얽힌 많은 전설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 들판의 목자들에게 천군천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 예수가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성전에 올라갔을 때 시므온과 안나 라는 두 노인네가 아기 예수를 경배했다는 이야기, 또 멀리 동쪽에서 별을 보고 찾아 왔다는 동방 박사 세 사람 이야기. 그런데 저는 이 모든 이야기에서 온통 바보들만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첫 번 째 바보, 그것은 바로 메시아가 태어나리라는 예언을 믿는 사람 모두입니다. 일찍이 예수 탄생 725년 전에 활동하던 예언자 미가는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대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무려 700년이니 넘게 지났습니다. 세상에 700년이나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 무슨 예언입니까?
예를 들어서 지금부터 700년 전이면 1285년,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때입니다. 그 때 만일 누가 나타나 앞으로 언젠가 한국 땅에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내왔다면 우리 중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니, 그것을 믿고 있다니, 그것은 틀림없이 바보인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 째 바보, 그들은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처녀가 아기를 갖다니 그게 가능합니까? 더군다나 마리아는 자기가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라고 노래 부릅니다. 처녀가 아기를 가졌으면 몰래, 조용히 들어 앉아 있기나 할 일인지, 노래까지 부르다니. 요셉은 어떻습니까? 결혼 전의 여자가 아기를 가졌는데 그를 부인으로 맞이하다니. 두 사람 다 바보가 아닙니까?
세 번 째 바보, 그들은 목자들입니다. 자기네 양도 아닌데 뭐 밤새도록 양떼를 지켜줍니까? 차례로 잠도 좀 자고 그럴 것이지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 추운 밤에 들판에서 떨고 있습니까? 물론 그들은 성실한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칭찬해 줄 만합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성실해야지,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고, 뭐가 좀 보였다고 일제히 맡았던 양떼를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가버리면 어떡합니까? 목자들이 없는 틈을 타 맹수들, 도둑놈들이 나타나면 어떡합니까? 아무리 급해도 , 보고 싶어도 무슨 대책을 세워 놓고 가야지, 앞 뒤 생각 안하고 그냥 가다니, 그들은 바보가 아닌가요?
네 번 째 바보, 그들은 동방박사들입니다. 초대교회의 전설은 동방박사 세 사람의 이름을 카스퍼, 멜키오, 발다사 라고 전해 줍니다. 그들은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그것도 삭막한 사막 길을 걸어왔습니다. 오직 별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더구나 그들은 황금, 유황, 몰약이라는 값진 보물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도대체 아기 하나 만나기위해서, 그것도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만나면 어떡할 건지도 모르고 찾아왔으니 그들을 박사, 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웃기는 일 아닙니까? 그들은 바보 아닙니까?
제 눈에는 온통 바보들로만 보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 보다 가장 뛰어난, 가장 훌륭한 바보가 있음을 저는 발견합니다. 그는 바로 아기 예수입니다. 우선 그 아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이 바로 아기 예수 때문에 애꿎게 죽어가야 했습니다. 아이들을 잃은 그 수많은 어머니들의 마음이 얼마나 쓰라렸겠습니까? 아무 죄 없이 죽어간 그 어린아이들의 피, 비통에 잠겨 흐느끼는 그 어머니들의 눈에서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 그 모든 것이 바로 예수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니 차라리 예수는 안 태어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뿐입니까? 예수 자신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분이 어느 한 나라의 왕자만 되어도 얼마나 영광스럽고 그 위엄이 대단한데 만군의 왕이시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분이 도대체 왜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까?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면 좋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할 수 있고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로마 군인들을 순식간에 무찌를 수도 있고. 그러면, 백성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보같이 십자가라니?
바다를 잔잔케 하신 그 위대한 힘, 오천 명을 먹이신 그 놀라운 능력, 죽은 사람을 살리신 그 알 수 없는 신비, 그 모든 것 다 어디가고 십자가라니. 그래서 어머니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다니. 그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새록새록 잠자고 있는 아기 예수. 도대체 그의 어디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가요? 바로 여기에서 저는 우리의 시인 박 두진이 지난 1981년 성탄에 즈음하여 부른 노래 “아기 예수 탄생”을 기억합니다.
“바람 미치고
눈보라, 진눈깨비 휩쓸고
안의 열 얼음 얼어
피로 흘러 다시 끓는,
골짝마다 울음 우는
검정 마을 밤,
그 어둠 불살으려
아기 예수 말구유에 내려오셨네.
눈멀고 귀먹고 입은 모두 벙어리,
보면서도 못 보고
들으면서 못 듣고
말하면서 말 못하는,
그 속박 풀으시려,
아기 예수 외양간에 내려 오셨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악한 자가 착한 자를
짓누르고
빼앗고
피흘리고 죽이는,
그 죄악 깨우치려,
아기 예수 이 세상에 내려오셨네.
사랑은 그 불의 불
사랑은 그 피의 피
사랑은 그 빛의 빛,
아기 예수 이미,
이마에는 가시 자욱
손과 발에 못자욱
십자가를 품에 안고
잠이 드셨네.“
그렇습니다.
아기의 탄생,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보들, 그들은 바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바보들, 그들은 바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마스, 그것은 바로 아기가 태어나는 계절입니다.
크리스마스, 그것은 바로 아기의 탄생에 이미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발견하는 계절입니다.
크리스마스, 그것은 바로 아기의 탄생과 십자가 .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는 계절입니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는 사랑의 계절입니다.
온 인류를 향한, 아니 나와 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의 나라.
이 사랑, 이 나라는 스스로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해타산에 밝고 욕심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 실리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랑, 이 나라는 어린이 같고, 마음이 담담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곧 바보같은 사람들의 눈에만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아기 예수가 곧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힘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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