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죄인 살리신
에베소서 2:1-5 / 1982.12
여러분! 제가 교역자가 되고 나서 제일 기분 좋은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나서 예배가 끝나고 저 뒤에 가서 인사를 하느라고 서 있으면 여러분들이 가시면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실 때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많이 쓰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고, 찬양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간증을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고, 기도하고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실컷 울고 나서도 은혜 받았다고 하고, 실컷 웃고 나서도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설교 듣고 나서 교인들이 평가를 하는 기준도 역시 은혜가 많다 적다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은혜가 풍성하고 누구는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원고 안 보고 소리 질러 가면서 설교하면 은혜가 풍성하고, 저 같이 원고에 사로 잡혀서 더듬거리면서 설교하면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이야기 많이 듣고 어떤 유명한 목사님에게 은혜 받았다고 하는 그 말은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하는 말입니다. 은혜는 인간 그 누군가가 자기 마음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단지 우리의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든가, 울고 나서 속이 후련해졌다 하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사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예수의 탄생, 예수의 생애,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사건 그 자체이며,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해 이루어진 일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라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고 쓰일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이 있다면 바로 우리가 부른 찬송가의 1절대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뿐입니다. 이 감격없이 함부로 “은혜 받았다.” 는 말을 쓰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무엇하러 이 늦은 시간에 이렇게 예배드리러 나오셨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한결같이 대답할 말들이 있으시겠지요. “은혜 받으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은혜받는다고 하는 것을 결코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을 듣거나,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거나, 어떠한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은혜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이심을 깨닫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은혜받는 비결은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별로 지은 죄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는가요?
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제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는 한번도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파리는 쉽게 죽이지만 살인은커녕 조그만 벌레만 봐도 징그럽고 무서워서 물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한없이 미워서 “저놈 죽여야지”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아니 남에게 큰 상처를 입혔던 기억도 없습니다. 저는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정뱅이도 아니고 골초도 아닙니다. 술은 제가 막걸리대학교를 다녔고, 또 사학과를 다녀서 매년 답사여행을 다녔으니까 먹어 봤습니다. 그러나 취해 본 경험은 없고 , 그것도 다 전도사 되기 전의 일입니다. 담배는 네 개피 피어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도 않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습니다. 저는 간음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술 따라 주는 여자, 소위 매미가 있다는 술집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사창굴에도 물론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깡패도 아닙니다. 누구와 싸워서 남을 다치게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가 누군가에게 얻어터지면, 그래서 울면서 집에 들어가면 제 동생이 나가서 저를 때린 아이에게 복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저는 도둑놈도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한 번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배재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그 때 학교가 덕수궁에서 별로 멀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학교가 일찍 끝나서 덕수궁엘 놀러 갔는데 그 때 덕수궁 안에 박물관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박물관 안에 불상들이 죽 놓여있었고 그 앞에 돈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같이 간 친구들하고 그 돈을 살짝 집어다가 핫도그를 사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이 사주신 핫도그가 맛있다고 떠들었습니다. 물론 그 일도 도둑질이지만 불상 앞에 있는 돈을 훔친거니까 하나님도 너그럽게 봐 주실 것이고 그 후엔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도둑놈이 아닙니다.
또 이야기를 하자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만의 이야기인가요?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말을 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우리 모두는 사실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별로 거리낄 것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 나에게 예수께서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고, 내가 은혜 받았다는 말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요?
여러분! 바로 이 물음을 가장 심각하게 던졌던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군데 나를 위해 죽었다는거야’ 라고 묻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그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4-6에서 이같이 자랑합니다.
“나는 육에 있어서도 신뢰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사림이 육에 있어서 신뢰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단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태어났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에 있어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열심에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한 자며, 율법의 의에 있어서는 흠 없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그는 흠 없는 사람입니다. 로마시민인데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700가지도 넘는 바리새인들의 정결예식을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 지킨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가지 흠도 없이 율법을 다 지켰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를 찾아온 부자청년이 천국에 들어가려거든 여러 가지 계명을 다 지키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는 다 지켰다고 기고만장하여 "또 더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있으면 내 놔 보십시오. “ 라고 말했던 것처럼 사울도 율법을 지키는 데에는 완벽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죽었는데 제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예수가 바로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당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떠들고 다닌다니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대신 죽다니. 도대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는데.“ 그렇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기에 잡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가 변했습니다.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사울이 예수를 만나 바울이 된 후 변했습니다. 자기는 율법적으로 완전하다고, 죄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자신만만하던 그가 변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히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원하는 바 선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러면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고 죄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울이 사도가 되고나서는 어떻게 죄를 고백하게 되었는가요? 그는 이제 새삼스럽게 많은 죄를 지었던가요? 바로 그 대답을 오늘의 본문이 해줍니다. 1절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허물과 죄. 먼저 허물은 희랍어 원어로 파라프토마(paraptoma) 라고 하는데 그 뜻은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 또는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진리에서 떨어지고 삶의 올바른 방향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로 죄는 희랍어 원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인데 그 뜻은 "화살이 표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해 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자기가 율법에 충실하고, 율법에 비추어 죄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가 사실은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목표가 되고, 자기 만족과 자기 기쁨이 삶의 목적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에 충실했어도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 아니었고, 이웃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철저한 하나님 사랑, 온전한 이웃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이 율법의 참된 정신이고 완성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가요?
그 분에게서 참된 하나님 사랑을 배웠는가요?
그분에게서 온전한 이웃사랑을 배웠는가요?
그 분 안에서 나의 죄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었는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죄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가?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훌륭한 남편인가?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훌륭한 아내인가?
나는 남편을 위해, 또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있는가?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의 부모가 되고 있는가, 자녀가 되고 있는가, 시부모가 되고 있고 , 며느리·사위가 되고 있는가?
나는 직장에서, 교회에서, 친구들에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왔는가?
나는 나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시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을 했는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통해 최선, 최고의 봉사를 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 우리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에 이르고 있는가?
나는 우리는 지금 가장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우리는 이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나는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으며, 최선을 다해 교우들을 위해 기도했던가?
군대 가는 친구들이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갔지만 그들을 위해 몇 번이나 기도했던가?
한 마디로 이 모든 것을 정리한다면 나는 진정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왔던가라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저는 분명히 “NO'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대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 가운데 있던 그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으며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속에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들과 같이 모두 육적인 욕심을 따라 살았고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다른 삶들과 마찬가지로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놀라운 감격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허물 가운데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은 은혜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은혜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구원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저는 만일 누군가가 저에게 언제 은혜 받았느냐고 물으면 대학교 2학년 때 교회 성가대실에서였다고 대답합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격은 생생하고 그 순간 제 입에서 흘러나온 찬송이 지금의 찬송가 356장입니다. 이 찬송가는 제가 신학을 하는데 제일 큰 힘을 주었고 지금까지 저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제가 가장 잘 부르는 찬송가가 되었습니다.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지금도 날 위해 간구하심
이 옅은 믿음이 아옵나니
주님의 참사랑 고맙고 놀라와
찬송과 기도를 쉬지않네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신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과 친절한 위로를
뉘게나 베풀게 하옵소서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에베소서 2:1-5 / 1982.12
여러분! 제가 교역자가 되고 나서 제일 기분 좋은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나서 예배가 끝나고 저 뒤에 가서 인사를 하느라고 서 있으면 여러분들이 가시면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실 때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많이 쓰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고, 찬양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간증을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고, 기도하고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실컷 울고 나서도 은혜 받았다고 하고, 실컷 웃고 나서도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설교 듣고 나서 교인들이 평가를 하는 기준도 역시 은혜가 많다 적다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은혜가 풍성하고 누구는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원고 안 보고 소리 질러 가면서 설교하면 은혜가 풍성하고, 저 같이 원고에 사로 잡혀서 더듬거리면서 설교하면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이야기 많이 듣고 어떤 유명한 목사님에게 은혜 받았다고 하는 그 말은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하는 말입니다. 은혜는 인간 그 누군가가 자기 마음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는 단지 우리의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든가, 울고 나서 속이 후련해졌다 하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사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예수의 탄생, 예수의 생애,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사건 그 자체이며,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해 이루어진 일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라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고 쓰일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이 있다면 바로 우리가 부른 찬송가의 1절대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뿐입니다. 이 감격없이 함부로 “은혜 받았다.” 는 말을 쓰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무엇하러 이 늦은 시간에 이렇게 예배드리러 나오셨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한결같이 대답할 말들이 있으시겠지요. “은혜 받으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은혜받는다고 하는 것을 결코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을 듣거나,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거나, 어떠한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은혜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이심을 깨닫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은혜받는 비결은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별로 지은 죄가 없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는가요?
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제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는 한번도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파리는 쉽게 죽이지만 살인은커녕 조그만 벌레만 봐도 징그럽고 무서워서 물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한없이 미워서 “저놈 죽여야지”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아니 남에게 큰 상처를 입혔던 기억도 없습니다. 저는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정뱅이도 아니고 골초도 아닙니다. 술은 제가 막걸리대학교를 다녔고, 또 사학과를 다녀서 매년 답사여행을 다녔으니까 먹어 봤습니다. 그러나 취해 본 경험은 없고 , 그것도 다 전도사 되기 전의 일입니다. 담배는 네 개피 피어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도 않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습니다. 저는 간음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술 따라 주는 여자, 소위 매미가 있다는 술집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사창굴에도 물론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깡패도 아닙니다. 누구와 싸워서 남을 다치게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가 누군가에게 얻어터지면, 그래서 울면서 집에 들어가면 제 동생이 나가서 저를 때린 아이에게 복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저는 도둑놈도 아닙니다. 아니 사실은 한 번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배재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그 때 학교가 덕수궁에서 별로 멀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학교가 일찍 끝나서 덕수궁엘 놀러 갔는데 그 때 덕수궁 안에 박물관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박물관 안에 불상들이 죽 놓여있었고 그 앞에 돈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같이 간 친구들하고 그 돈을 살짝 집어다가 핫도그를 사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처님이 사주신 핫도그가 맛있다고 떠들었습니다. 물론 그 일도 도둑질이지만 불상 앞에 있는 돈을 훔친거니까 하나님도 너그럽게 봐 주실 것이고 그 후엔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도둑놈이 아닙니다.
또 이야기를 하자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만의 이야기인가요?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말을 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우리 모두는 사실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별로 거리낄 것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 나에게 예수께서 내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고, 내가 은혜 받았다는 말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요?
여러분! 바로 이 물음을 가장 심각하게 던졌던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군데 나를 위해 죽었다는거야’ 라고 묻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그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4-6에서 이같이 자랑합니다.
“나는 육에 있어서도 신뢰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사림이 육에 있어서 신뢰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단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태어났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에 있어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열심에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한 자며, 율법의 의에 있어서는 흠 없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그는 흠 없는 사람입니다. 로마시민인데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700가지도 넘는 바리새인들의 정결예식을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 지킨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가지 흠도 없이 율법을 다 지켰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를 찾아온 부자청년이 천국에 들어가려거든 여러 가지 계명을 다 지키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는 다 지켰다고 기고만장하여 "또 더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있으면 내 놔 보십시오. “ 라고 말했던 것처럼 사울도 율법을 지키는 데에는 완벽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죽었는데 제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예수가 바로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당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떠들고 다닌다니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대신 죽다니. 도대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그럴 수 없다. 나는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는데.“ 그렇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기에 잡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가 변했습니다.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사울이 예수를 만나 바울이 된 후 변했습니다. 자기는 율법적으로 완전하다고, 죄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자신만만하던 그가 변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히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원하는 바 선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러면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고 죄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울이 사도가 되고나서는 어떻게 죄를 고백하게 되었는가요? 그는 이제 새삼스럽게 많은 죄를 지었던가요? 바로 그 대답을 오늘의 본문이 해줍니다. 1절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허물과 죄. 먼저 허물은 희랍어 원어로 파라프토마(paraptoma) 라고 하는데 그 뜻은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 또는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진리에서 떨어지고 삶의 올바른 방향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로 죄는 희랍어 원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인데 그 뜻은 "화살이 표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해 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자기가 율법에 충실하고, 율법에 비추어 죄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가 사실은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목표가 되고, 자기 만족과 자기 기쁨이 삶의 목적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에 충실했어도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 아니었고, 이웃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철저한 하나님 사랑, 온전한 이웃사랑을 발견하고 그것이 율법의 참된 정신이고 완성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가요?
그 분에게서 참된 하나님 사랑을 배웠는가요?
그분에게서 온전한 이웃사랑을 배웠는가요?
그 분 안에서 나의 죄된 모습을 발견하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었는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죄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가?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훌륭한 남편인가?
나는 내 나름대로 가장 훌륭한 아내인가?
나는 남편을 위해, 또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있는가?
나는 내 나름대로 최선의 부모가 되고 있는가, 자녀가 되고 있는가, 시부모가 되고 있고 , 며느리·사위가 되고 있는가?
나는 직장에서, 교회에서, 친구들에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왔는가?
나는 나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시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을 했는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통해 최선, 최고의 봉사를 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 우리는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에 이르고 있는가?
나는 우리는 지금 가장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우리는 이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나는 최선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으며, 최선을 다해 교우들을 위해 기도했던가?
군대 가는 친구들이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갔지만 그들을 위해 몇 번이나 기도했던가?
한 마디로 이 모든 것을 정리한다면 나는 진정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왔던가라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저는 분명히 “NO'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대로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 가운데 있던 그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으며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속에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들과 같이 모두 육적인 욕심을 따라 살았고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다른 삶들과 마찬가지로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놀라운 감격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허물 가운데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은 은혜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은혜 받는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구원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저는 만일 누군가가 저에게 언제 은혜 받았느냐고 물으면 대학교 2학년 때 교회 성가대실에서였다고 대답합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격은 생생하고 그 순간 제 입에서 흘러나온 찬송이 지금의 찬송가 356장입니다. 이 찬송가는 제가 신학을 하는데 제일 큰 힘을 주었고 지금까지 저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제가 가장 잘 부르는 찬송가가 되었습니다.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 조아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지금도 날 위해 간구하심
이 옅은 믿음이 아옵나니
주님의 참사랑 고맙고 놀라와
찬송과 기도를 쉬지않네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신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과 친절한 위로를
뉘게나 베풀게 하옵소서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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