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년도

1995. 11. 19 /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 마태복음 25:14-30, 다니엘서 12:1-4

람보 2 2015. 3. 20. 17:22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 1995. 11. 19 )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마태복음 25:14-30, 다니엘서 12:1-4/ 1995. 11. 19.



저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선 하나

아주 욕심이 많은 티모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무리 많은 돈과 재물을 손에 넣어도 한 번도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이웃 사람들과 돈 문제로 싸움을 벌이곤 했다.
어느 날, 티모시의 원수 가운데 한 사람이 그를 파멸시키려는 흑심을 품고, 유리 항아리에 담긴 조그만 ‘금붕어’ 한 마리를 선물로 주며 말했다.
“티모시, 만일 이 금붕어가 자라다가 나이가 들어 늙어 죽으면, 저절로 순금 덩어리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 꿈도 꿔 보지 못했던 엄청난 부자가 될 겁니다.”
돈에 대한 욕심만이 머리 속에 가득했던 티모시는 거의 이성을 잃고, 그 ‘금붕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는 너무 기뻐 어떨 줄을 몰라했다.
집으로 돌아온 티모시는 이 ‘금붕어’를 조그만 물통 속에 넣어 두고 정성을 다해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그 물고기는 기쁘게도 아주 빠른 속도로 자랐기 때문에 티모시는 언젠가 자기 손으로 순금 덩어리를 만져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붕어’는 조그만 물통에 담아 두기에는 덩지가 너무 커졌다. 그래서 티모시는 돈을 들여서 연못을 만들었다. 조금 후에는 그것도 모자라서 조그만 호수를 파야 할 지경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티모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자라나기만 하는 이 ‘금붕어’를 먹이고 보살피느라 전 재산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그 동안 티모시는 초조한 마음으로 어서 그 물고기가 자라기를 멈추고 죽어 주기를 기다렸다. 그렇게만 되면 그는 대번에 부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물고기보다 티모시가 먼저 늙어 죽고 말았다. 그의 수중에는 이제 재산이라고는 단돈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티모시는 그 물고기가 ‘금붕어’가 아니라 새끼고래였다는 사실을 끝내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인도의 봄베이라는 도시에 있는 스와니 슬라우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피터 라이브스 선생님이 지은 “부자 티모시”라는 제목의 우화입니다.

또 하나, 지나간 한 달 동안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니 사실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를 유명하게 만든 소위 노태우씨 비자금 사건으로 인해 연속극의 인기가 떨어지고 신문 지면마다 그 기사가 실리던 며칠 전 어느 신문 사회면 한 쪽 구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내신걱정 고3생 자살
“내신성적 떨어졌다” 아파트 투신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1주일 앞두고 고교 3학년생이 성적부진을 비관, 아파트 9층에서 투신자살했다. 15일 오전 7시 10분쯤 서울 강남구 대치2동 은마아파트 3동 908호 홍대씨(51세, 빌딩 임대업)집 베란다에서 홍대씨의 아들 성진군(18세 ㅈ 고 3년)이 20m 아래1층 베란다로 떨어져 숨졌다. 아파트경비원 김동현씨(57)는 “순찰중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성진군이 1층 베란다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숨져있었다”고 밝혔다. 가족들은“내신 성적이 3등급까지 떨어지자 아들이 무척 우울해했다”며 “수능시험이 다가오면서‘머리가 아프다’는 등 심리적 고통을 자주 내비쳤다”고 말했다. ( 신문기사)

이런 기사는 해마다 대학입학시험이 가까워지는 이 맘 때쯤 되면 신문을 장식하는 것들입니다. 입학시험이라는 괴물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학생이 자살 했다는 기사들은 으레 그랬던 것처럼 신문 한 구석에 났다가 금방 잊혀질 뿐입니다. 아마도 죽은 학생의 가족들만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것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거기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고 그런 기사가 났었는지도 모른 채 또다시 세상은 굴러갈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기에서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병폐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부자 티모시의 이야기가 돈에 대한 욕심을 채우려다 끝내 비참하게 죽어간 티모시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자 우리 민족이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걸어온 이야기라는 사실,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의 관심은 오로지 돈에만 쏠려 있어서 누가 몇 백억원을 바치고 댓가로 몇 천억원의 사업을 따내고 그래서 모은 비자금이 또 몇 천억원이고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그 와중에 죽어간 한 어린 학생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며 그 학생을 위해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우리 모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노태우씨가 돈을 얼마나 많이 해 먹었는가 하는 액수에만 관심이 있지 그가 그렇게 많은 돈을 해먹고도 당당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권력에 욕심을 품은 일부 군인들이 요즘 TV의 연속극에 나오는 대로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이름으로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씨 좋은 이 나라 백성들이 또 지도자들이 그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일단 권력만 잡으면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해준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 모든 역사의 비극은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는 지극히 비성서적인 사고방식에서 온 것임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 그 자체이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있는 일인데 그것은 다 잊어버리고 물질이나 권력, 심지어 제도로서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는 말입니다.
대학시험도 결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요. 과정이야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죽게 만들고 젊은이들의 정신과 영혼을 병들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성서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한 번 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 마가, 누가복음 세 권 모두에 기록된, 그래서 그만큼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건 가운데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가3:1-6의 기사로 읽어 보겠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마12:9-14; 눅6:6-11)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 보고 있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 하셨다.“안식일에 선 한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한 쪽 손이 오그라 들어서 일생을 고생하며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께 와서 제발 좀 고쳐 달라고 청했는데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즉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켰노라고 큰소리치는,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으스대는, 자기는 분명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뻐기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하려고 둘러서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펴주면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을 죄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손 마른 사람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율법 규정을 지키는가, 어기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손 오그라든 사람을 불러서 가운데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팽팽한 긴장이 생겨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이 옆으로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바리새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노하셔서, 화가 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내밀어라.” 그러자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손이 쭉 펴졌고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애 버릴 모의를 하였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것 때문에 예수를 잡아 죽일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안식일 규정도 예수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대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은 잊어버렸고 오직 안식일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는 결과만 보았고 따라서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안식일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죽음을 무릅쓰고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갖고,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목적을 갖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제도나 인간적인 조건보다는 사람 그 지체가 중요하다는 가치관이며, 예수께서는 제도를 보존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귀한 세상,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재물이나 자리, 학력이나 간판, 얼굴 생김새 때문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 따뜻한 마음과 베풀 줄 아는 마음, 남의 아품에 동참할 수 있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마음 등을 가졌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결국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라는 말로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며 오늘의 본문은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교회와 세상기관들과의 차이점이 대체 무엇인가?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가 먼 날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의 재산은 본문에 나온 것만 합쳐도 금 여덟 달란트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금1달란트는 은 15달란트에 해당되는데 은 1달란트가 6,000드라크마니까 노동자 한 사람이 6,000일 즉 200개월을 매일 일해야 버는 돈입니다. 하루 품삯을 50,000원으로 계산한다면 50,000원X6,000일X15X8=360억 원이나 됩니다.(막상 계산해 놓고 보니까 요즘 비자금으로 비교도 안될 만큼 적군요)
그 여덟 달란트를 세 사람의 종에게 나누어 맡겼는데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씩을 각각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인은 떠나갔습니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어디에 투자하라든가,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아무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전적으로 종들을 믿고 맡기고 떠났습니다. 세 사람 모두 다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돈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집안 식구, 친구들, 선생님 모두들 찾아 다니며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선택을 했는데 앞의 두 사람은 장사를 하였습니다. 때마침 장사가 잘 되어서 다섯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를 받아서 장사한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어쨌는가요? 그 받은 달란트를 땅을 파고 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매일 가서 잘 묻혀 있나 확인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마침내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 세 사람의 종을 불러서 계산을 해보자 하고 말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첫번째 종이 주인 앞에 열 달란트를 내 놓으며 말했습니다.
“주인님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내가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여기 열 달란트를 가져 왔습니다.”
주인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종이 아주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함빡 웃으며 말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남겨와서 똑같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자 이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주인 앞에 나섰습니다. 땅에 파묻어 두었던 한 달란트를 꺼내와서는 주인 앞에 내어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소리쳤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은행에나 넣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그리고는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 세번째 종의 잘못이 무엇인가요? 그 종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의 돈을 맡아 가지게 된 사람이 그 돈을 보자기에 싸 두었다가 잃어버리면 처벌 받지만 돈을 받은 즉시 땅에 파묻으면 책임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종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또 그 돈으로 장사를 하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면 원금도 다 까먹고 한 푼도 돌려 드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은 안전하게 처리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무엇을 보고 칭찬도 하고 야단도 친 것인가요? 분명히 다섯을 남겼고 둘을 남겼기에 그 남긴 것을 보고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한 푼도 남기지 못했다고 해서 야단을 친 것도 아닙니다. 주인은 그 결과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주인이 보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그 종들이 맡겨진 달란트를 사용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앞의 두 사람에게 말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반대로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에게는 이렇게 꾸짖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고”
바로 이것이 화가 난 이유입니다. 심지도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은다. 과정이 없이 결과만 얻으려고 하는 줄 알았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결과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결과만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진실로 내 삶이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고(달란트를 종들이 받은 것처럼),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는가 아닌가 그것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얼마를 남겼는가”라는 결과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는가?” 라는 삶의 과정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억하고 또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또 기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다 언젠가는 하나님 삶을 마감하는 날이 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회계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이 무엇인가?
내가 벌어 놓은 재산인가?
내가 올라간 지위인가?
내가 얻은 학위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누리고 있는 교회직분인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것임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매일매일 최선을 다했는가 그것뿐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는가 그것 뿐입니다.
목사인 내가 설교 몇 번 했다고
여러분이 헌금 얼마 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까?
지극히 작은 일 밖에는 한 것이 없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제 사흘 뒤면 96년도를 위한 대학입학수능시험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의 자녀들 가운데 50여명의 자녀들이 시험을 치룰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모두에게 꼭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결과 보다는 시험을 준비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살아나갈 인생의 길에서도 손에 많은 것을 쥐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많이 모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매일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작은 일에 충성하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이번 시험을 통해 우리의 자녀들이 깨닫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선언이 바로 오늘의 본문에 들어있음을 우리 모두 기억하십시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
주님이 예비하신 축복입니다. 이것을 다니엘서 기자는 오늘의 두 번째 본문에서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때에 세상 마지막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지혜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할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모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는 분들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이름과 자녀들의 이름이 모두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영생을 누리시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