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년도

1995. 10. 29 /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창세기 12:1-4, 누가복음 10:25-37

람보 2 2015. 3. 20. 16:45

너도 이와같이 하라 ( 1995. 10. 29 )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창세기 12:1-4, 누가복음 10:25-37/ 1995. 10. 29.

여러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적이 있으시지요. 그 옛날 고구려 때의 임금들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 때의 주역들입니다.
소위 “역사부도”라는 책을 들여다보면 당시 광개토대왕은 지금의 만주 벌판은 물론이고 연해주나 시베리아까지 정복한 위대한 정복자였고 장수왕은 그 땅을 지키면서 남쪽으로 내려와 신라, 백제의 땅을 빼앗았던 임금이었습니다.
아마도 땅의 넓이로만 치면 이때만큼 우리 민족이 강성 했던 때는 그 후로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과 비슷한 운명을 가졌다고 늘 비교되는 유대 민족에게도 우리나라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두 사람과 쌍벽을 이룰 만한 임금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곧 다윗과 솔로몬왕입니다. 물론 영토의 넓이는 고구려보다 훨씬 작지만 그러나 유대민족 역사상 다윗 왕 만큼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왕이 없었고 또 솔로몬 왕 만큼 그것을 지키며 전성시대를 누리던 때가 그 후로도 없었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서나 열왕기상 등에 의하면 다윗왕은 주변의 거의 모든 민족들, 곧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아람, 시리아, 하맛, 아말렉 가나안족 등을 정복하여 그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고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심지어 열왕기상 11장의 기록에 의하면
“전에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장관 요압이 가서 에돔의 남자를 다 없이하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여섯 달을 그곳에 유하였었더라”
라고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이렇게 주변의 수많은 민족을 정복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금과 은이 흔해지고 사는 것이 풍족해진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이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이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사치와 방탕에 빠져 살던 바로 그 다윗, 솔로몬시대, 바로 그 무렵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셔서 선민으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묻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택하신 이유가 이렇게 주변의 모든 민족을 정복해서 수없이 죽이고 노예로 삼고 재물을 약탈하기 위해서였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변 민족들이 고통과 핍박을 당하고 가난과 착취당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묻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또 그렇게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빼앗아서 갖고 들어온 온갖 재물들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골고루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만 혜택을 누리고 대다수 백성들은 솔로몬왕의 세금 징수와 강제 노역에 시달림 받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 곧 하나님으로 삼으셨는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셨는가?
아니면 몇몇 지도자들만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셨는가?

그들은 마침내 답을 찾아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는 바로 “복의 근원”이 되는데 있다는 것이었으니 그들은 그것을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이라고 하는 도시에서 여러 민족과 뒤섞여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시니라.”

분명히 하나님 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 너 혼자 복 받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는,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는 전쟁과 정복, 살육과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서 주변의 모든 민족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평화와 공존의 세상을 만드는데 있었고 이것이 바로 창세기에 아브라함의 소명기사가 들어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이 된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은 내가 복을 받는 길이지만 동시에 주변의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남들보다 더 훌륭하고 착하기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우리가 남들보다 더 완전하고 복을 받을만 하기에 부르셨습니까?
또 우리만 예수믿고 복 받아서 잘 살라고 해서 부르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까?


하루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율법에 나오는 것 중 모르는 것이 없을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겠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는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사의 물음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예수, 네가 어찌 알겠느냐?
네가 율법을 안다고 해도 율법사인 나만큼 알기나 하겠느냐?
네가 대답하지 못하면 내가 가르쳐 주겠다.
그리고 나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 너는 어떠냐?

이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는 재빠르게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아주 기가 막힌 대답입니다. 율법사는 600개가 넘는 계명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는 물음에 예수께서 마태복음 22:34-40에서 대답하신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바로 그 대답을 율법사는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곧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그리고는 덧붙이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렇습니다.
아는 것만 갖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 갖고는 소용없습니다. 가서 행해야 합니다. 그러자 그 율법사는 자기가 모든 율법들을 다 지켰다고 믿었기에 큰소리치며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내 이웃이 누구냐? 곧 내가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즉 유대인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 길은 약27Km의 긴 내리막길로서의 오늘날에도 강도의 출몰로 소문이 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을 지나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돈 다 빼앗기고 옷까지 벗기우고 매맞아 거의 죽게 된 채 내버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다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가다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냥 모른체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두 사람은 왜 그냥 지나쳤을까?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요. 제사장은 일상생활에서도 가장 가까운 친척의 시체를 제외하고는 시체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레위인은 단지 제사집행 할 때만 깨끗하면 되었는데 왜 그냥 갔을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닌데 왜 그냥 갔을까? 만일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내려가는 길이라면 시체를 만져도 괜찮은 거고 또 만일 올라가는 길이라면 보통 제사장, 레위인, 평신도들이 함께 올라가니까 혼자 갈 일은 없을 테고, 어쨌든 제사장과 레위인은 동족인 유대인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보살펴 주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그들을 욕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럴수 있느냐?

이제는 평신도인 유대인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유대인이 나타나 매 맞아 죽게 된 유대인을 구해주어야 이야기가 잘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예수의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마침 그 길을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유대인을 보고 치료하고 주막에 데려다 돌보아 주고 돈까지 내주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기원전 722년 혼혈로 생겨난 이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교도보다 더 나쁘게 취급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고기를 먹는 자와 같다” 는 말이 생길 정도였고 게다가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몇 년 전 어느 유월절 밤중에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다가 사람의 뼈를 뿌린 사건까지 있어서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증오로 가득 차있었다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사마리아사람이라니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침 뚝 떼고 물으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대답은 뻔합니다. 사마리아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사는 사마리아사람이라는 말을 입으로 말하기 싫어서 슬쩍 말을 바꾸어서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야기를 끝맺으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러분!
이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엄청난 도전입니다. 유대인 스스로는 깨끗하게 혈통을 지켰다고 자랑하고 율법을 철저하게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고 예루살렘에 큰 성전이 있다고 으스대던 유대인들 특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너희도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결단코 영생을 얻지 못하리라는 준엄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성전의 크기나 자랑하고 모여드는 회중 수나 자랑하고 바쳐지는 제물의 양이나 자랑하고 그럴 듯 하게 차려지는 예배의식이나 자랑 하면서 한껏 높아져 있는 사두개인, 율법사, 제사장등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사마리아인보다 못하다고 꾸중하면서 너희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예리한 칼날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종교개혁기념 주일입니다. 그러면 종교개혁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제도로서의 종교 또는 종교지도자들이 말할 수 없이 교만해져서 제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교만과 이선에 사로잡혀 큰소리치다가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종교가 종교다워지고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주변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약탈하고 심지어는 같은 유대 백성들까지 노예로 만들어 버렸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선포하며 복의 근원이 되라고 외치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믿음의 선각자들.
온갖 율법 규정을 다 만들어 백성들을 얽매어 놓고 자기들은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며 세속적인 축복까지 독차지하고 거룩한 척 경건한 척 으스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며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한 없이 낮아지신 예수.
소위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성당을 곳곳에 짓고 수없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극도로 문란하고 타락한 생활을 하면서 현세에서의 죄의 용서와 내세에서의 영생도 다 자기들 손에 있다고 큰소리치며 수 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화형에 처했던, 그 무지막지한 카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 오직 성서만을 외치며 백성들에게로 파고 들어갔던 종교개혁자들

이 모든 종교개혁은 결국 교회가 저 혼자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는 일이며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서 섬기는 자리에까지 내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는 엄청난 수의 교인을 자랑합니다. 끊임없이 대규모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세계10대 교회 중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고 인천에는 요즘 한 번에 한 자리에 10만 명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짓고 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축하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구상에 사는 57억의 인구 가운데 전기도 없는 상황에서 사는 사람이 20억 명, 안전한 식수가 없는 삶이 10억명,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수가 13억명, 하루에 1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연명하는 사람이 11억명,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사람7억명, 그리고 1억 2천 만 명의 완전 실업자. 이런 현실에서 끊임없이 멀쩡한 교회 건물을 부수고는 새로 짓고 치장하고 하는 것들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겠습니까?
오늘의 유럽교회가 관광지로 변해버렸다면 한국교회의 장래는 어떠합니까? 언제까지 우리가 예수믿고 이만큼 복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는 본문을 잊어버리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교회가 복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순종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한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한없이, 한없이 낮아지셔서 마침내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신 주님, 당신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요? 죄인들을 위해 일생을 고생하시다가 끝내 강도같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 당신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일찍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님을 본 받으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치하시고,
삶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사는 길, 교회가 나아갈 길, 그것은 오직 하나, 낮아지는데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삶의 고통과 시련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가는 데 있습니다.
교만, 자기 만족, 자기도취에 빠져 이웃을 잊어버리고 자기 성장에만 빠져 있는 꿈에서 깨어 나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갈급해 하는 이웃들에게로 나아가는데 있습니다.
목사가 낮아지고 장로가 낮아져서 강도 만난 이웃을 구하기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복을 받고 누리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어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로 지키는 오늘, 우리 모두 우리를 복의 근원이 되라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