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켜며(1995.12.4 ) |
마태 24:37-51 / 1995. 12. 4 (대강절 제 1주)
전통적인 방법을 쓴다면 오늘, 모든 성당에 화환과 함께 초가 네 개 준비됩니다. 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쓰이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발광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일 축하나 결혼 승낙 ,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다양한 시간에 촛불을 켭니다. 그것은 단순히 초가 편리해서가 아니라, 초와 촛불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 의미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다림입니다. ‘촛불을 켜고 기다린다’ 는 말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비 낭만적인 시대를 사는 가운데 실제로 초를 켜고 누구를 기다리는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바로 적극적이고 간절한 기다림을 나타내는 문학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대림절을 시작합니다. 대림절은 촛불의 시기 곧 기다림의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촛불을 켜고 무엇을 , 또 누구를 기다릴까요? 단순히 12월 25일은 아닙니다. 물론 성탄과 함께 대림 초도 없어집니다. 그렇다고 이 기다림도 촛불이 꺼지듯 없어지는 그런 기다림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기다리며, 갖가지 기다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생명은 곧 기다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어떤 기다림들을 품고 삽니까? 무엇이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어떤 기다림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어제도 오늘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창세기 6장에 의하면 노아가 살던 때에 세상이 얼마나 악했던가를 보여주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셨다. 하나님이 보시니,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있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이후 인간은 끊임없이 죄악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대로 사람들의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하고,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는데 그 심판의 방법은 홍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때 노아를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너는 잣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부지런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는 길이가 300자, 너비는 50자, 높이는 30자였으며 모두 3층으로 된 커다란 배였습니다. 창 6:22에 의하면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다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주가 다 만들어진 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이 땅에 홍수를 내리셨습니다. 창 7:6-10에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땅 위에서 홍수가 난 것은 노아가 육백 살 되던 해이다. 노아는 홍수를 피하려고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데리고 함께 방주로 들어갔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수컷과 암컷 둘씩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이레가 지나서 홍수가 땅을 뒤덮었다.”
마침내 온 땅을 뒤덮는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려 40일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온 땅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이 죽었습니다.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까지 길 짐승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었다고 창 7:23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세상을 물로 심판하겠노라고 말씀하신 때로부터 실제로 홍수가 시작된 때까지의 기간이 120년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20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노아는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었고 이것을 지켜본 당대 사람들은 제각기 다 노아를 욕하고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저 노아 할아버지, 미쳤구만. 망령이 난게야.
무슨 비가 온다고 저 난리야.
배를 만들려면 바닷가에서 만들어야지.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고 야단이야.
심판은 무슨 놈의 심판이야.
그런데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노아의 이야기를 인용하시면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 당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물론 그들이 이런 일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이런 일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눈앞의 것들만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짧은 미래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로 대표되는 일상의 삶에 안주하면서 눈에 보이는 일들에만 집착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가능케 하고 결정지으시는 분,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어떤 기다림도 두지 않았다가 결국 그 하나님의 미래에 의해서 파멸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노아의 홍수가 임한 것처럼 다시 오시리라 말씀하셨고 당신이 다시 오시는 날 일어날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사람의 남자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주님께서는 다시 오시는 날, 한 남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다른 한 남자는 밭에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두 사람의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는데 바로 그 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한 여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다른 한 여자는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곧 모든 사람이 제각기 일을 합니다. 밭을 갈기도 하고, 맷돌을 갈기도 하고 이것 모두 해야 할 일들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하는 것과 같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들리움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요? 그 기준은 오직 하나, 주님의 재림을 기다림. 바로 그것입니다. 똑같이 밭을 갈고, 맷돌을 갈지만 그것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사는가 아니면 밭을 갈고 맷돌을 갈지만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눈에 보이는 일에만 집착하는가 아니면 내 삶의 영역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하는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언제 올지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러분!
대강절은 촛불을 켜고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께서는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과격한 언사까지도 마다하시지 않습니다. 곧 당신을 도둑에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예기치 않은 때에 도둑처럼 올터이니 늘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언제 오실까요?
물론 우리는 그 시기를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께서는 도둑같이 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벌써 1900년이 지났으니까 여태 안 오신 분이 이제 새삼스럽게 오시겠느냐고 의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이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바로 주님 앞에 서서 심판받게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버림받든지 영원히 갈라지는 날이 언제 우리에게 닥칠지 모름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삶입니까? 매일 성전에 나와 철야하며 세상 모든 일은 팽개치고 사는 것 입니까? 노아의 시대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밭 갈고 맷돌 가는” 일을 하고 살아가는 일을 일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 사실은 노아도 살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노아도 세 아들이 있어서 그들을 장가보내지 않았습니까? 또 밭 갈고 맷돌 가는 일을 하다가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다고 해서 먹고 마시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자녀들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직장에도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일, 직장에서의 일,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 모두 다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까지도 가르쳐 주셨으니 오늘의 본문 45-51절 말씀입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의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곧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맡기신 것이며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여져야 함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곧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끊임없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는 것이 곧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입니다. 그러나 제 손에, 제 주머니에, 제 지갑에 들어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제 것인 줄로 착각하고, 그것 조금 가졌다고 우쭐해져서 동무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는 일에 빠진다면 그것은 곧 악한 종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끊임없이 베풀며 사는 삶,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 재무부 주관 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재무부는 우리 교회의 살림을 맡은, 참으로 중요한 기관입니다. 재무부장님을 비롯해서 재무부원 여러분의 수고를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재무부원들이 꼭 기억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재무부는 곧 나누는 일을 하는 부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물질을 어떻게 하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라는 사실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채우시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주신 것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하면 반드시 채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재무부 일을 맡으신 분들은 그 일을 감당하시면서 늘 하나님께서 채우신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이러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생활에서 근본을 이루는 것이 바로 기다림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거나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모든 기다림은 주인을 기다리기 위한 것들로서, 이 근본적인 기다림에 따라 각각의 가치와 중요성이 결정됩니다.
대림절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대림절은 12월 24일 저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항상 대림절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다림을 가능케 하는 기다림, 바로 이세상의 완성자로 오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의 때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이 근원적인 기다림은 다른 갖가지 작은 기다림들 속에 묻혀있습니다. 이 대림절 동안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를 이끄시는 주님을 향한 기다림을 밖으로 꺼내서 깨끗이 닦고 제 위치에 갖다 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기다림들을 바로 이주님을 기다림에 따라 재정리하며 살아가야하겠습니다.
이제 시 한 편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길이신 이여, 오소서"
주님 올해도 눈이 내렸습니다.
모국의 산천에 쌓이는 눈송이도
때로는 근심의 雪片으로 보여지는 싸늘한 계절
매운 바람보다도 신문에 보도되는 引上의 바람에게
더 깊은 추위를 느끼는 겨울의 길목입니다.
기름이 모자라고 쌀이 모자라고
모자라는 것 투성이의
이 춥고 메마른 땅에서
사랑의 기름이 모자라고 신앙의 쌀이 모자라는
우리네 가슴의 들판도 비어 있습니다.
이 거칠고 스산한 황야의 어둠을 밝히시러
길이신 이여 오소서
슬픔을 딛고 일어설 희망을 주기 위해 오소서
죽음을 딛고 일어설 생명을 주기 위해 오소서
당신은 오셔야 합니다.
‘지상은 만원이니 지하로 갈 수 밖에 없다’며
위로 아래로 새 길을 만들어도
실은 무엇 하나 제대로 뚫리지 않는 듯한 이 땅에
당신은 길이 되어 오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신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안으로 뿌리내린 미움과 원망과 불신의
어둠부터 몰아내게 하소서
당신의 뜻 대신 내 뜻으로 가득 찬
당신의 고통 대신 나의 안일함으로 가득 찬
당신의 겸손 대신 나의 교만으로 가득 찬
마음의 땅을 갈고 닦게 하소서
당신이 오실 길을 예비키 위해
자신을 내어던진 세례자 요한처럼
무엇보다 먼저 회심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주소서
현대의 콘크리트 벽에 끼어 질식하는 나무들처럼
무디게 말라붙은 돌마음들을
예리한 기도의 칼로 깨뜨려 살마음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이웃 사이에, 이웃과 이웃 사이에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좀 더 부지런하지 못해 쭉정이처럼 살아 온 날들을
용서하시고
믿음이 깊지 못해 좋은 열매 맺지 못한 날들을
용서하소서
육신과 영혼의 곳간을 사랑의 알곡으로
채우실 분은 당신이오니
우리의 걸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가 더욱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을 듣고 보고 갈망하게 하소서
고뇌의 잡풀 무성한 이 조그만 약속의 땅에
세례의 불을 놓으러 오소서
많이 참아서 많이 기뻐하고
오랜 투쟁 끝에 오랜 승리를 누리는
당신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길이신 이여 오소서
아멘.
'1995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5. 12. 17 / 믿음에 굳게 서서 / 베드로전서 5:7-11 (0) | 2015.03.20 |
---|---|
1995. 12. 10 / 너와 함께 하리라 / 신명기 18:9-15, 히브리서 11:1-6 (0) | 2015.03.20 |
1995. 11. 19 /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 마태복음 25:14-30, 다니엘서 12:1-4 (0) | 2015.03.20 |
1995. 11. 12 / 하나님의 백성 / 베드로전서 2:4-10 (0) | 2015.03.20 |
1995. 11. 5 / 숯불 / 요한복음 18:12-27 (0) | 2015.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