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년도

1995. 4. 23 / 깨어진 배에 탄 심정으로 / 디모데후서 3:14-17

람보 2 2015. 3. 13. 16:48

깨어진 배에 탄 심정으로 / 디모데후서 3:14-17 / 1995423

 

오늘 설교가 길 것 같습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하는 설교이니 잘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서양사개론 시험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김성식 교수님이라고 연세 많으신 존경받는 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칠판에 문제 하나 써놓고 나가셨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열 줄 이내로 약술하라.”

 

제 기억에 저는 B학점 받은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써야 A학점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Hellenism”“Hebraism”이라는 두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사란 결국 그 두 가지 흐름의 대립과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나와 있는 세계사라는 이름의 책들은 대개 유럽 중심의 책들인데 그 책들을 쓰는 역사가들은 역사를 보통 고대, 중세, 근대라는 세 가지로 나누어 시대구분을 합니다. 고대문명의 발생으로부터 로마제국이 당시 세계를 통일했던 4세기까지를 고대, 그때부터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했다는 1,000년 동안을 중세, 그 이후를 근대라고 부릅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문예부흥 즉 르네상스(Renaissance)와 종교개혁(Reformation)입니다. 문예부흥이 고대 그리스의 인간 중심의 문화를 되찾자는 운동이라면 종교개혁은 곧 성서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운동이 이후 유럽의 역사를 이끌어왔다고 본다면 그중에서도 우위에 섰던 것은 역시 문예부흥의 뒤를 이은 계몽주의 즉 아주 철저한 인본주의였습니다.

 

계몽주의 사상의 특징적 교의는 부단히 향상 발전하는필연적 진보를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인간을 죄인이라고 보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을 합리적이며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보는 견해에 의해서 대치되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한 기독교의 신앙은 과학에 대한 더 큰 신뢰에 굴복당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기독교적 신앙은 역사의 진보적 발전을 보장하는 자연법의 작용에 대한 신앙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영광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강조하였으나,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찬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20세기는, 적어도 그 시작은 희망의 세기였습니다. 세계의 부는 유럽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모여들었고, 과학은 무한히 발전할 것으로 보였으며, 전쟁은 유럽인에 의한 정복전쟁이나 있을 뿐이고 따라서 인류에게는, 아니 유럽인들에게는 번영과 희망만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근거해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구시대의 낡은 유물일 뿐이고, 하나님 없이도 인류의 장래는 찬란한 태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시작되고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은 19145, 사라예보의 총 한 방이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유럽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어 세계적인 경제대공황, 히틀러의 악마적인 발악, 2차 세계대전의 서곡이 된 스페인의 내전, 그리고 일본에서의 원자탄 폭발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희망이 미래에 대한 좌절과 절망으로 바뀌고, 과학이 곧 인류의 미래를 책임지는 것이 아님을 인류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의 광기가 온 유럽을 위협하고 2차 대전의 전운이 유럽의 하늘에 낮게 드리워 모든 사람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1940년대 초반, 유럽의 한복판에 있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한 젊은 목사가 매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하나의 물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과연 자기가 살고 있던 그 시대 유럽인들에게 과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묻고 있었고, 그 성서의 이야기들을 통해 무엇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나중에 이런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목사로서, 나는 삶의 끝없는 모순 속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원했다. 그러나 삶보다 못지않게 수수께끼에 찬, 성서의 한정없는 메시지를 말하고자 원했다.”

 

그는 그의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성서를 해석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시대가 마치 모든 것이 풍랑 속에 잠겨버린 배와 같다고 생각했고, 성경은 바로 그런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의 안목으로 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목사의 이름은 바로 칼 바르트입니다.

 

칼 바르트 목사가 매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던졌던 물음, 곧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어떨 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딪혀 오는가 하는 물음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덧붙인다면 매주 듣는 설교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는가 아니면 한낱 인간의 말로 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그 자체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소위 자유주의적 해석방법입니다. 이것은 성서를 진화론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 이야기나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완화시키거나 아주 부정해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의 내재성, 즉 하나님은 인간과 자연속에 내주하신다는 면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초자연적 명령으로 된 창조는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 즉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과정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기적 이야기 등은 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고, 설명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위대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돕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만든 스승일 뿐입니다.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소위 근본주의 성서해석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성서무오설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령께서 성서의 기자들로 하여금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영감을 주시고, 인도하시고, 감동케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서 기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기자들이 기계적으로 받아썼기에 성경에는 잘못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사람은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을 예로 들면 수많은 번역판이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가 했을 때 근본주의자들은 1611년 영국에서 번역된 흠정역, King James Version이 바로 그 책이라고 주장했고, 우리나라의 근본주의자들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개역성경을 유일무이한,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좋은 신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그러한 주장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목자가 먼저 찾아왔나, 동방박사들이 먼저 찾아왔나?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해석의 세 번째 단계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복음주의라고 부릅니다.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말하고 듣는 것은 피차의 인격관계를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만일 나의 친구가 나에게 말하고 내가 그의 말을 듣는다면, 이런 경우에 그와 나의 생활 사이에는 연락의 다리가 생겨서 우리 사이에는 벌써 관계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위기 속에서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요구해 오시는 매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즉 옛날 예언자들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주의는 내가 오늘 바로 나의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내 삶의 한복판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 만나게 될 때, 그래서 내 삶이 변화되고, 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66권의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그 말씀에 바탕을 두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나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시고, 그것을 나아가 전하게 하심을 확신하게 될 때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만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내게 간절하게 부딪혀오지 않으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고, 설교는 한낱 인간의 공허한 메아리일 뿐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의하면 예수의 죽으심 후 실망하고 내려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으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성경 이야기를 하셨는데 2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런데 엠마오에 도착하고 함께 식사하게 되어 예수께서 축사를 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았으나 이미 예수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때 두 제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제자들이 한 바로 이 말,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성경이 내 마음에 들어와 부딪혀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 이것이 있을 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니 이것은 결코 소리소리 질러가며 설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어떤 부흥사들처럼 울리고 웃기게 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소곤소곤 조용히 성경을 설명하셨을 것이고 차근차근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제자들이 그야말로 파선한 배에 탄 사람의 심정으로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마음에 뜨거움이 있었다고 고백하게 되었으니 결국 문제는 성경말씀을 읽거나 설교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을 얼마나 절실하게 살고, 성경에 깊이 들어가려 애쓰는가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한 번 했던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목사님께 누군가가 물었다지요.

설교 한 편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십니까?”

“60년 걸렸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정말 솔직히 말해서 두 달이 넘게 걸렸습니다. 매주 설교를 해 왔지만 계속 오늘 할 이 설교를 생각해 왔습니다. 원고를 썼다가는 고치고 또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로 쓰고 하는 작업을 되풀이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과연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어왔고, 결국 그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 나를 변화시키고 또 그것이 나를 통해 전해져서 교우들을 감동시킬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설교를 준비하고 이 강단에서 외치는 목사들이 설교 한 편에 인생을 걸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또 선포할 수 있도록 기도로써 도와주어야 하고 여러 가지 뒷받침을 해주셔야 합니다. 목사가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진리를 추구해 나가고 말씀을 탐구해 나가면서 부딪혀오는 성경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 본문과 그 말씀을 통해 바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기도하는 심정으로 귀기울여 듣고, 과연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을 때, 바로 그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게 되고 그 말씀에 따라 변화된 삶을 살게 될 때 그 설교는 뜨거운 설교인 것입니다. 물론 이 일도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설교를 하시고는 끝에다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이제 이야기를 정리합시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분명 복음이라고 믿어지며,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감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설교를 들어도 뜨겁게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이 아직 없거나 이미 식어진 사람들은 어떠한 설교를 들어도 뜨거워질 수 없습니다. 참으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이 강단에서 외쳐지는 모든 말씀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고 듣는 교우 모두가 언제나 마음이 뜨거워짐을 체험하는 은혜의 시간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