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종
이사야 53:1-9, 베드로전서 2:22-25/ 1995. 4. 9.
다함께 찬양하십시다.
1. 늘 감사하며 나는 살리라 늘 감사하며 나는 살리라
하루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살리라 늘 감사하며 나는 살리라.
2. 늘 사랑하며 나는 살리라 늘 사랑하며 나는 살리라
하루하루 하루를 사랑하며 살리라 늘 사랑하며 나는 살리라.
여러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 가운데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배고픈 것도 아니고, 육신이 고단하거나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닙니다. 힘든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데 왜 고통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왜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생겨날 때입니다.
선하게, 바르게,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어렵게 살고, 악하게,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큰소리치고, 세상 복을 다 누리며 사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선과 악의 싸움에서 왜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가? 특히 선택받은 성도들이 왜 어려움을 겪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될 때, 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고 느껴졌을 때 우리의 삶은 피곤해지고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왜 악이 이기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왜 선택 받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 세상에 왔고 하나의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선민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부터 그들은 복 받은 민족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들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그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고 그들을 저주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릴 것이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삭, 야곱, 요셉으로 내려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셨고 날로 번창하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약 400년간 종살이를 했지만 끝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모세를 보내셨고 마침내 온갖 어려움을 뚫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약 200년 동안을 우리는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때 주변 민족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 사사들을 보내셔서 구원해 내시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사울이 임금이 되었고, 이어서 다윗, 솔로몬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장 신나는 시절이었습니다. 침략해올 뚜렷한 강대국도 없었고 오히려 이스라엘 왕국이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고 수많은 재물을 조공 받아서 떵떵거리며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솔로몬이 죽고 나서 나라가 둘로 갈라져 싸우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1년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열왕기하 24장과 25장에 기록된 대로 바벨론은 유대사람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가고 유대 땅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저명한 성서고고학자인 올브라이트 박사의 발굴보고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기간에 계속 사람이 살았다고 알려진 유다의 도시는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137편에 의하면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몬을 기억하면서 울었다”고 고백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당연히 던져질 물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가?
하나님은 우리 조상에게 하셨던 약속을 잊어 버리셨는가?
하나님은 왜 그 악한 바빌론, 수많은 민족을 정복하고 약탈하고, 죽이고, 능욕하고, 우상을 섬기는 그 바빌론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이름도 알 수 없고, 몇 살이나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메시지가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 들어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그를 제 2이사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40장 1절부터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답게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나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오랜 포로생활로 지치고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너희를 기억하셨고 해방시키셔서 예루살렘 돌려보내신다는 희망을 그는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깨우쳐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을 위해 고난을 대신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는 대속이라고 말합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위 “고난의 종”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는 시 네 편을 기록해 놓았는데 오늘의 본문은 바로 그 중에서 네 번째 것에 해당이 됩니다.
그로부터 500여년 후,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고통당하던 유대 백성들 사이에 한 젊은이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러 가지 기적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소문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서른 살쯤 되었을 때 광야로 나가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한 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 두 명의 제자를 뽑아서 데리고 다녔고 또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무슨 병이든 말 한마디로 고쳤고 물 위를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귀신들을 쫓아냈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기도 했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권능을 마음껏 휘두르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종려주일에 그분은 나귀새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왕이 되실 분이 당당하게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리고는 뜻밖에도 로마군인에게 붙잡혀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온갖 고생을 다 하시고 또 능력을 베푸셨던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않으신 채 채찍으로 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머리엔 가시관을 쓰고 옷을 다 뺏기고 그리고는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술수를 다 쓰던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 앞에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죽어갔습니다. 때리면 맞고, 고문하면 당하고, 침뱉으면 닦아내지도 못한 채, 심지어 모든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상태에서 쓸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절망했습니다. 희망이 깨어졌습니다. 이제 끝이로구나, 하나님은 또다시 우리를 버리셨구나. 결국은 악이 이기는 것, 불의가 승리하는 것, 바르게 살려고 애써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한탄하면서 모든 제자들은 쓸쓸히 사라졌습니다. 그들을 대표할만한 사도 베드로 역시 쓸쓸하게 다시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돌아섰습니다.
바로 그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베드로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이사야가 노래했던 바로 그 “고난의 종”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 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 2:21-25)
우리는 우리 신앙의 아버지시요 목자이신 담임 목사님의 장례를 치루고 그 유가족과 함께 가슴에 조표를 달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며 장례식에 참여하셨습니까?
홀어머니 슬하에서 외아들로 일생을 살면서 연대 의예과에 들어갔다가 군대 다녀온 후 학비 때문에 신학과로 옮겨 목사가 되어 일생을 살아오신 목사님. 당뇨라는 지병으로 인해 그토록 고생하시다가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님.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을 선포하며 그렇게도 깨끗하게 사셨던 목사님께서 어찌 어머니보다 먼저 떠나실 수 있는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당했던 고난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제2이사야가 보았다면,
예수께서 당하셨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사도 베드로가 보았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 목사님께서 당하신 고난 속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의미를 보고 있습니까?
바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 목사님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던 날입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들어가시던 날입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악이 이겼다고 큰소리치고, 불의가 승리했다고 노래 부르는 것처럼 보이는 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고 그것으로 모든 악과 불의를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끝내 계시록에서 보여주는 대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바로 그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일생을 살아오셨고 이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고난주간은 바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간입니다.
너는 선과 악,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너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여러분,
우리 모두 목사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갑시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갑시다.
힘들고 어렵지만 진리의 길, 선의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래서 끝내 주님의 부활에 이르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사야 53:1-9, 베드로전서 2:22-25/ 1995. 4. 9.
다함께 찬양하십시다.
1. 늘 감사하며 나는 살리라 늘 감사하며 나는 살리라
하루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살리라 늘 감사하며 나는 살리라.
2. 늘 사랑하며 나는 살리라 늘 사랑하며 나는 살리라
하루하루 하루를 사랑하며 살리라 늘 사랑하며 나는 살리라.
여러분!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 가운데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배고픈 것도 아니고, 육신이 고단하거나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닙니다. 힘든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데 왜 고통이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왜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생겨날 때입니다.
선하게, 바르게,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어렵게 살고, 악하게,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큰소리치고, 세상 복을 다 누리며 사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선과 악의 싸움에서 왜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가? 특히 선택받은 성도들이 왜 어려움을 겪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게 될 때, 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고 느껴졌을 때 우리의 삶은 피곤해지고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왜 악이 이기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왜 선택 받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 세상에 왔고 하나의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선민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부터 그들은 복 받은 민족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들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그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고 그들을 저주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릴 것이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삭, 야곱, 요셉으로 내려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셨고 날로 번창하게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약 400년간 종살이를 했지만 끝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모세를 보내셨고 마침내 온갖 어려움을 뚫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약 200년 동안을 우리는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때 주변 민족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 사사들을 보내셔서 구원해 내시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사울이 임금이 되었고, 이어서 다윗, 솔로몬이 그 뒤를 이었는데 그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장 신나는 시절이었습니다. 침략해올 뚜렷한 강대국도 없었고 오히려 이스라엘 왕국이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고 수많은 재물을 조공 받아서 떵떵거리며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솔로몬이 죽고 나서 나라가 둘로 갈라져 싸우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1년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열왕기하 24장과 25장에 기록된 대로 바벨론은 유대사람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가고 유대 땅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저명한 성서고고학자인 올브라이트 박사의 발굴보고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기간에 계속 사람이 살았다고 알려진 유다의 도시는 단 하나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137편에 의하면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몬을 기억하면서 울었다”고 고백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당연히 던져질 물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가?
하나님은 우리 조상에게 하셨던 약속을 잊어 버리셨는가?
하나님은 왜 그 악한 바빌론, 수많은 민족을 정복하고 약탈하고, 죽이고, 능욕하고, 우상을 섬기는 그 바빌론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이름도 알 수 없고, 몇 살이나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메시지가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 들어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그를 제 2이사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40장 1절부터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답게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나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오랜 포로생활로 지치고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너희를 기억하셨고 해방시키셔서 예루살렘 돌려보내신다는 희망을 그는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고난의 의미를 깨우쳐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을 위해 고난을 대신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는 대속이라고 말합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위 “고난의 종”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는 시 네 편을 기록해 놓았는데 오늘의 본문은 바로 그 중에서 네 번째 것에 해당이 됩니다.
그로부터 500여년 후,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고통당하던 유대 백성들 사이에 한 젊은이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러 가지 기적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는 소문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서른 살쯤 되었을 때 광야로 나가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한 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 두 명의 제자를 뽑아서 데리고 다녔고 또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무슨 병이든 말 한마디로 고쳤고 물 위를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귀신들을 쫓아냈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기도 했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권능을 마음껏 휘두르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종려주일에 그분은 나귀새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왕이 되실 분이 당당하게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리고는 뜻밖에도 로마군인에게 붙잡혀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온갖 고생을 다 하시고 또 능력을 베푸셨던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않으신 채 채찍으로 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머리엔 가시관을 쓰고 옷을 다 뺏기고 그리고는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온갖 술수를 다 쓰던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권력 앞에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죽어갔습니다. 때리면 맞고, 고문하면 당하고, 침뱉으면 닦아내지도 못한 채, 심지어 모든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상태에서 쓸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절망했습니다. 희망이 깨어졌습니다. 이제 끝이로구나, 하나님은 또다시 우리를 버리셨구나. 결국은 악이 이기는 것, 불의가 승리하는 것, 바르게 살려고 애써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한탄하면서 모든 제자들은 쓸쓸히 사라졌습니다. 그들을 대표할만한 사도 베드로 역시 쓸쓸하게 다시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돌아섰습니다.
바로 그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베드로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이사야가 노래했던 바로 그 “고난의 종”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 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 2:21-25)
우리는 우리 신앙의 아버지시요 목자이신 담임 목사님의 장례를 치루고 그 유가족과 함께 가슴에 조표를 달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며 장례식에 참여하셨습니까?
홀어머니 슬하에서 외아들로 일생을 살면서 연대 의예과에 들어갔다가 군대 다녀온 후 학비 때문에 신학과로 옮겨 목사가 되어 일생을 살아오신 목사님. 당뇨라는 지병으로 인해 그토록 고생하시다가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님.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을 선포하며 그렇게도 깨끗하게 사셨던 목사님께서 어찌 어머니보다 먼저 떠나실 수 있는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당했던 고난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제2이사야가 보았다면,
예수께서 당하셨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사도 베드로가 보았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 목사님께서 당하신 고난 속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의미를 보고 있습니까?
바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 목사님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던 날입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들어가시던 날입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악이 이겼다고 큰소리치고, 불의가 승리했다고 노래 부르는 것처럼 보이는 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고 그것으로 모든 악과 불의를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끝내 계시록에서 보여주는 대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바로 그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일생을 살아오셨고 이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고난주간은 바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간입니다.
너는 선과 악,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너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여러분,
우리 모두 목사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갑시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갑시다.
힘들고 어렵지만 진리의 길, 선의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래서 끝내 주님의 부활에 이르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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