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대 30 / 마가복음 14:3-11 / 1995. 2. 12,(신학생주관예배)
오늘은 신학생주관예배입니다. 신학생들은 교회 어느 부서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보다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에는 하루종일 일하고 밤늦게 돌아가고, 평일에 하루는 주보를 만들기 위해 교회에 옵니다. 행사가 있으면 며칠씩 교회에 와야 하고, 남들은 놀거나 아르바이트 하는 방학 때는 수련회, 진급예배, 임원수련회 등등 많은 행사 때문에 더 바빠서 학비를 한 푼이라도 벌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교회들처럼 장학금 전액을 주는 것도 아니고, 교인들 중에 누구 하나 수고한다고 식사 한 번 대접하고 책값 한 번 쥐어주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묵묵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목사한테 야단맞아 가면서 사명감 가지고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해마다 입학시험 철이 되면 거의 빠짐없이 신학교 가겠다는 학생들의 추천서를 한두 장씩은 쓰는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신학교 또는 신학대학원 입학을 위한 추천서를 몇 장 썼고, 그중에 전기에 해당되는 분들은 이미 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특별히 신학교에 가겠다고 해서 추천서를 써달라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곡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신학교는 왜 가려고 하는가?”
마음속에 정말 소명의식이 있어서 가는 것인지, 진짜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겠다는 다짐이 있어서 가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여기 서 있는 저 자신이 그 문제로 인해 참으로 오랫동안 방황했고, 고민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저는 선교사들이 이 땅에 맨 처음에 세운 미션스쿨에서 6년을 공부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느닷없이 저에게 “너 이다음에 목사 될래?” 라고 물으셨을 때, 저는 무슨 말인가 하고 그냥 흘려버렸습니다. 고 3 올라가면서 4월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은 끝에 신학공부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의 교목님과 의논을 하게 되었고, 교목님으로부터 신학교 가라는 추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일반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이 많아서 먼저 사학을 공부하고 나중에 신학교를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학과에 들어갔고, 대학을 마치고 교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1년만 직장생활하고 신학교에 가겠다고 생각하고 그해 가을 장로회신학대학에 원서를 내었습니다. 1차 시험에 붙고 2차 면접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존경하는 목사님을 찾아가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부름 받았나?”
그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해서 신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이후 몇 년을 더 방황하다가 늦게서야 감리교신학대학 신학원에 3학년으로 편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대학원을 하고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동기 하나는 이미 감리사를 하고 있습니다.
“부름 받았나?”라는 물음을 저는 “나 자신 전체를 바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어떻게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가? 사실은 솔직히 고백하자면 목사가 된 지금도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나이 들어 갈수록 더 “나”를 따지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챙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목사인 “나”보다는 여기 오늘 예배를 주관하여 드리고 있는 신학생들이 훨씬 더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겠노라고 다짐하고 있기를 바라고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신세대, X세대들이 등장하면서 신학생들도 그 순수함, 열정을 잃어버려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3절부터 9절까지는 소위 “도유사건” 즉 “기름을 붓는 사건”이라고 불리어지는 사건이고, 10절과 11절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먹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도유사건은 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고, 스승을 팔아먹는 사건도 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도유사건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고, 팔아먹는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도유사건은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께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여자,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한 여자가 찾아와서 귀한 향유 한 옥합, 마가에 의하면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져와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 향유의 값을 마태는 그냥 “많은 값”이라고 했는데 비해 마가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이라고 분명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사건은 그 유명한 나사로의 부활 사건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데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 어쨌든 이 세 복음서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야기는 간단해집니다. 한 여인이, 어쩌면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 불린 한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어떻게 보답할까 궁리하다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물을 섞지 않은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옥으로 만든 병을 깨뜨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드 향이 도대체 무엇인가? (샤넬 5 – 숫자가 많을수록 좋은 것)
나드는 히말라야 산맥이 원산지인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서 뽑아낸 향유입니다. 값이 비싸며 최상품은 인도에서 생산되고, 거의 왕만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아가서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드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아가서 1:12)
임금님이 앉는 자리인 옥좌에서 행기를 내도록 뿌리는 향수가 바로 나드 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당시 향수 중에서는 최고급품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심지어 그 향수를 넣는 병도 옥으로 만들었으니까 병값만 해도 참으로 비쌀 것이었습니다.
향유를 값으로 쳐보니까 300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화폐단위로서 노동자들이 하루 일하고 받는 품삯이 바로 1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요즘 3만원이라고 친다면 300데나리온은 900만 원이라고 금방 계산을 하실 것입니다. 물론 요즘 돈 많은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900만 원이 껌값일지 모르지만 우리같은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900ᅟᅡᆫ 원을 모으려면 적금을 한 달에 10만 원씩만 붇는다 해도 적어도 7년은 모아야 하는 큰 돈입니다. 하물며 그 당시 한 여인이 그렇게 비싼 향유를 갖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했을지 참으로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마리아가 주인공이라면 부모 없이 삼남매가 살면서 그것을 모으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사실 그 향유는 그 여인에게 있어서는 일생을 벌어 모은 것이고, 자기의 장래가 걸려있는 전부인 것이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인생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연속극 모래시계에 나오는 카지노 재벌 윤 회장이 권력과의 대결에서 몰리게 되었을 때 그의 딸이 재산을 다 포기하라고, 외국으로 떠나자고 했을 때 한 말이 있지요.
“내 재산을 그 동안 어떻게 모은 것인데. 나에게는 내 자식과 같다.”
물론 윤 회장과 그 여인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윤 회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귀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그런 향유를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께 부어드렸다는 것, 그것은 한 마디로 자기의 인생 전부를 예수께 드리겠다는 헌신이 고백이 아니었던가요?
그렇다면 아직 목회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한 신학생 여러분이, 아직 순수한 열정과 꿈을 간직한 여러분이 갖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내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을, 아니 내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헌신의 고백인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그 여인의 이야기 바로 뒤에 사도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는 도유사건만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팔아먹는 장면만 나오니까 별 문제 없지만 두 사건을 동시에 기록해 놓고 있는 두 복음서는 왜 나란히 두 사건을 기록해 놓았을까요? 물론 그 두 사건이 실제로 그렇게 이어져 일어났으니까 그렇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 말고 무슨 다른 의미를 깨우쳐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가룟 유다. 그는 분명히 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도 사도인 것으로 봐서 틀림없이 예수께로부터 직접 나를 따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분명히 감격했을 것이고, 무언가 희망에 가득 찼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 날흘 바치겠노라는 각오와 다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3년을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회계를 맡을 만큼 똑똑하고 인정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룟 유다가 자기의 스승을 적대자들에게 팔아먹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유다가 그들에게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고 묻자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승을 팔아먹은 댓가로 받은 돈이 은 삼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1장 3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그러니까 종을 구속하기 위한 돈이 은 30 세겔이고, 자유인을 구속하기 위한 금액은 50 세겔이었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팔아먹으면서 자유인의 값도 아니고 불과 종 한 사람의 값을 받고 팔아먹은 것입니다. 그는 단지 스승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는 것 외에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채 은 30세겔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30세겔 자체가 적은 돈은 아닙니다. 세겔은 유대의 화폐 단위인데 1세겔이 노동자 나흘치 일당이니까 30세겔은 120일치 일당이고, 아까처럼 계산하면 360만 원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유다는 아무 수고도 담기지 않은 돈을 벌어들인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저는 한 이름없는 여인이 바친 300 데나리온으로 상징되는 온전한 헌신과 가룟 유다가 벌어들인 30세겔로 상징되는 배반의 댓가를 비교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분명히 여인이 바친 나드 한 근 속에는 그녀가 그때까지 흘린 땀과 수고, 힘과 노력, 그리고 그녀가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소망과 계획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그녀는 예수를 위해 바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일생을 바쳐 헌신하겠노라고 다짐했던 사도 중의 한 사람 가룟 유다는 불과 종 한 사람에 해당되는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먹은 것입니다. 자기의 땀도, 수고도, 힘도, 노력도 들어있지 않는 돈 30세겔을 제 주머니에 넣은 댓가로 스승을 악의 세력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사실 그가 수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에게는 아무 보잘 것 없는 것,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그런 돈 때문에 스승을 저버리고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 스승을 배반하고 저버린 끝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다는 택함받은, 열두 명 안에 들었던 사도였습니다. 바로 그가 스승을 은 30에 팔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돈 30에 팔렸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의 종이 되겠다고 신학도의 길을 걷고 있는 신학생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지금 여인의 헌신과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까? 분명히 스스로에게 답해야 합니다. 만일 이런 것 없이 은 30 버는 것부터 보고 배운다면 그런 목회자는 참으로 불행하고, 그들로부터 신앙훈련을 받는 교인들도 참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될 것입니다. 분명히 여러분이 가는 길이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자리와 명예가 보장되어 있거나 하는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자랑스러운 길임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이야기가 신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가요? 여러분에게는 이 여인의 헌신과 사랑이 있습니까? 혹여나 그런 헌신과 사랑을 베풀지는 못하면서 공연히 뒤에서 그것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얼마나 많이 도울텐데 하고 비판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다가 내게 조금의 이익이라도 생기면 곧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는가요? 사실은 우리는 300에 해당되는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아가는 대신 30에 눈이 어두워 주님을 배반하는 일을 얼마나 자주 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사도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독이 되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손에 30을 쥘 수 있는지, 40을 쥘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과연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 왔는가 이것만이 문제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왕 주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나섰다면 묵묵히 걸어갈 뿐입니다. 주님께서 맨 앞에서 걷고 계시기에 그 뒤를 따라갈 뿐입니다. 힘을 냅시다. 용기를 냅시다. 희망을 가집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루고 계십니다.
신학생 여러분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이 늘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고 돕는 교우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은총이 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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