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의 길(창세기 22:1-19, 마태복음 10:17-22 / 1996. 1. 28)
미국에서 출생한 유대인 랍비이면서 소설가로서도 명성을 떨치고, 크리스토퍼 문학상을 수상한 헤럴드 사무엘 쿠시너는 1935년에 뉴욕 브룩크린에서 태어났습니다. 랍비 쿠시너는 1960년에 콜럼비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이스라엘로 건너가 유대신학교에서 다시 석박사 학위를 받고 템플에서 유대교회 보조랍비로 62-66년까지 시무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과 보스턴에서 정식 랍비로 시무했습니다.
그는 뉴욕에서 600가구 2,500명의 신도가 살고 있는 교구의 랍비로 일했는데 그곳에서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그 아들에게 아론이라고 하는, 참으로 랍비의 아들에게 적절한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아론은 아주 밝고 행복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생후 8개월이 되어 아이의 몸무게가 늘지 않게 되었을 때,
첫돌이 지나서 아이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훌륭한 의사들을 찾아가서 진찰을 받게 했는데 의사들은 그에게 복잡한 병명을 붙여주면서 아론은 키가 아주 조금밖에 자라지 않을 것이나 다른 면에서는 모두 정상작일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론이 세 살 되었을 때 보스턴으로 이사하고 그곳에서 딸을 낳게 되면서 소아과 전문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곳 의사가 아론의 병을 ‘프로제리아’ 즉 ‘급속한 조로증’이라고 진단해 주었습니다. 의사는 아론의 키가 3피트 이상 자라지 않을 거시며, 머리나 몸에 털이 나지 않고 아직 어린 나이에 약간 늙어 보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10대 초반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랍비 쿠시너는 의사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의 충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는 이때까지 착하게 살아왔었고, 신의 시각으로 볼 때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해 왔었다. 더우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건강한 가족을 가진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신앙심 깊은 생활을 해 왔었다. 나는 내가 신의 뜻을 따르고,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런 나의 가족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만약에 신이 사랑과 용서의 신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공정하기라도 하다면,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설사 내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밑은 바 의무를 소홀히 했거나 오만한 죄를 범했을지도 모른다고 나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다 해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들인) 아론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여러분!
실제로 아론은 참으로 안타까운 삶을 살다가 열 세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기간 동안 아버지인 랍비 쿠시너가 함께 겪어야 했던 아픔과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랍비 쿠시너는 아들 아론의 문제를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슬픔을 간직하고 살았지만 끝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닫고 어려움 당하는 이웃들에게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그 고백을 “선한 사람들에게 왜 불행이 오는가?” 라는 책으로 엮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아브라함, 그는 명색이 ‘믿음의 조상’이었지만 그도 사실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장가를 들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셔서 홀아버지를 모시고 두 남동생과 함께 살았는데 막내동생도 먼저 세상을 떠나서 거기서 난 조카 롯을 책임지고 키워야 할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는데 그러다가 정착한 곳이 하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그는 모든 가족을 책임질 가장이 되어서 힘든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70이 넘어버렸으니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75세 때, 느닷없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터인데 네 후손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나이 일흔 다섯이 되도록 아들 하나 없는데 자손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아진다고요? 믿기 어려운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라시니 떠나갔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 계집종을 통해 아이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광야로 쫓겨났던 하갈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는 다시 13년 동안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사라도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였고, 사라의 나이 89세였습니다. 진짜 모든 것은 끝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아지리라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사라는 웃었습니다.
“될 법이나 한 소리냐?”
그런데 마침내 아브라함의 나이 100살 때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비웃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 붙였으니 그 뜻이 바로 “웃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늙은 아브라함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집안에는 웃음꽃이 가득 피어났고, 인생의 의미가 새로워졌습니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가정 같았고,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장성해서 나뭇짐도 번쩍 질 만큼 자랐습니다. 이제는 여한이 없었고, 좋은 색시 짝지워 주어서 가정만 이루게 한다면 곧 손자도 볼 것 같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을 믿기를 잘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불쑥 한 마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네 사랑하는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으로 데리고 가서 잡아 죽이고 나에게 제물로 바치라.”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순종해도 이것만은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으라고 하시오” 이것이 아브라함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때로부터 제사지낼 준비를 마치고 제사 드리라고 명령하신 산에 도착하기까지 걸어간 사흘 동안 그 누구도,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그리고 두 사람의 종이 사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를 참으로 기가 막히게 잘 나타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은 바로 할 말이 없어진 상황, 너무 기가 막혀 말을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잘 압니다. 그야말로 Happy Ending인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을 때 이삭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선 아브라함 역시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옛말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부모가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데,
이 자리에도 그런 분들이 앉아 계신데,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자식을 가슴에 묻고 아픔을 안고 살아오신 분들이 여기 계신데,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아픔이 없을 터인데,
그것도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지만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일 아버지가 과연 산 목숨이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던 것,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죽이는 행위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을 향해 칼을 내리꽂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급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렇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보신 것, 그것은 한 마디로 아들에게 향한 사랑보다 더 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 하였은 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시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 일로 인해 아브라함은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천국에 있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누가복음 16:22)
하루는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데 웬 청년 하나가 뛰어오더니 갑자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선하신 선생님”하고 불렀습니다. 다른 복음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관원 곧 제법 높은 벼슬에 있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께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나라,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알지 않느냐? 계명에 나와 있지 않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결국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조항들을 다 지켰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그런 계명들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희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너는 너희가 믿는 대로 그 계명들을 다 지켰느냐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분명히 그 젊은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다 지켰다는 그의 대답이 거짓말이라면 그는 바로 그 순간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에 그의 대답은 진실한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적으로는, 문자적으로는 그는 분명히 계명을 다 지켰을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를 생각하면서 “나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젊은이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성경은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를 찾아온 젊은이, 그는 분명히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을 받기에, 영생의 길로 들어서기에, 그래서 천국에 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마디만 하시면 되었습니다.
“그래, 너는 영생을 얻었으니 안심하고 가라.”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때 예수님의 입에서 뜻밖의 말씀이 튀어나왔습니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말씀 끝에 복음서 기자는 참으로 기가 막힌 모습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 이것이 그 젊은이의 끝이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쓸쓸하게 어깨 축 처진 채 예수께 등을 돌리고 돌아서서 가버리는 젊은이. 예수를 찾아올 때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며 당당했지만 끝내는 쓸쓸하게 돌아서 가버린 한 젊은이. 영생의 길에 들어서겠다고 달려왔지만 그러나 낙심하며 돌아서 버린 한 젊은이. 그에게는 영생의 길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브라함과 한 젊은이. 이 두 사람을 영생과 멸망,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놓은 결정적인 차이점은 도대체 무엇이던가요?
결점 투성이인 아브라함, 자기 혼자 살겠다고 두 번 씩이나 아내를 동생으로 속여 다른 남자들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했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생각대로 자식을 얻기 위해 하갈과 동침하고 그 때문에 가정의 풍파를 일으켰던 아브라함.
사라의 시기와 질투를 막지 못하고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을 광야로 내몰았던 비정한 것 같은 아버지 아브라함.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반대로 율법을 완전히 지켰기에 조금도 흠이 없었던, 그래서 영생의 길로 들어서기에 충분해 보였던 한 젊은이가 쓸쓸하게 되돌아섰던,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오직 하나, 사랑의 문제였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믿고 바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아니면 끝내 내 것은 모두 내 것으로 믿었기에 소유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웃에게 물질, 돈, 사랑을 베풀 수 없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외아들 이삭.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유일한 희망인 외아들 이삭.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했던 외아들 이삭.
그 아들을 위해서라면 아버지로서 어떤 일도 할 수 있었을 만큼 사랑스러운 외아들 이삭.
그야말로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외아들 이삭.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삭은 내 아들이지만 그러나 내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시니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책 11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그러나 부자 청년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내 것은 내 것이었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었습니다. 내 것을 너에게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쓸쓸하게 돌아섰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영생의 길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없었던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청지기주일입니다. 청지기란 결국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임시로 맡겨 주신 것임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건강, 나의 지식, 나의 지위, 나의 재주, 나의 자녀, 나의 재산 모두 다 귀한 것이지만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그것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야 함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모든 소유를 하나님을 위해, 구체적으로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다짐하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생의 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믿습니까?
손에 쥐려고 애쓰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로 취하시면 다 여러분의 손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임을 믿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그 순간 여러분이 손으로 잡으려 애썼던 모든 것을 그대로 놓고 갈 수밖에 없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내게 있는 것을 무엇을 위해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길은 율법적으로 완전해 진다던가, 직분이 높아진다던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곧 사랑의 삶을 사는데 쓰여져야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결코 영생의 길을 갈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 사랑이 가득한 선한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영생의 길로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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