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 년도

1996. 5. 12 / 기꺼이 개라도 되리라 / 마태복음 15:21-28

람보 2 2015. 3. 26. 17:22

기꺼이 개라도 되리라 (1996. 5. 12 )

기꺼이 개라도 되리라

마태복음15:21-28/ 1996. 5. 12.

우리 주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게네사렛땅에 가셨을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의 초대를 받으셔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식사 초대는 즐거운 법. 예수께서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예수를 따라 다니며 고생하던 제자들도 모처럼 푸짐한 음식을 앞에 놓고 신이 났습니다. 왁자지껄 떠들며 신나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당시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나타났습니다. 아주 거룩한 척, 경건한 척, 근엄한 얼굴표정을 짓고 자기들 특유의 예복을 어느 샌가 갖추어 입고 예수 앞에 나타났습니다. 순간 자리가 조용해졌습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예수 선생, 당신의 제자들은 어째서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 준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까? 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냔 말입니다.”
제자들은 아차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배가 고팠기에 그만 손 씻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 바리새인들의 올가미에 걸려 버린 것입니다.

음식을 더러운 손으로 그냥 먹는다는 것은 사람인 이상 누구나 꺼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불결한 행위요, 위생상으로도 좋지 못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유대나라같이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 순식간에 온 몸을 뒤덮는 나라에서 바깥출입을 하고 오거나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손 씻을 물을 주는 것은 오랜 관습이었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손 씻는 방법까지 규정해 놓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을 어기면 곧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 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악이라고까지 그들은 가르쳤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치명적인 꼬투리를 잡힌 셈이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고 인정하면 그들은 순식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인이요, 따라서 이스라엘로부터 쫓겨날 상황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예수의 제자들은 입을 다문 채 등에서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잠시 후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말로는 나를 섬기나
마음으로는 멀리 떠나 있도다.
저들이 나를 예배하지만 헛일이다.
사람이 만든 규례를
마치 하나님의 법률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신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왜 선조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느냐고?
선조들의 가르침을 그렇게도 잘 따르라고 큰소리치는 너희들은 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무엇이라 하셨느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곧 부모에게 못된 짓을 하는 자는 죽여야 한다’ 라고 되어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어떠냐? 부모에게 어떤 물건을 드리려고 했다가도 아까운 생각이들면 ‘코르반’ 이라고 하면 그만이지 않느냐?"

코르반이 무엇입니까? 부모님께 좋은 물건이나 돈을 드리려고 준비했다가 그만 아까운 생각이 들고 드릴 마음이 없어지면 그 물건을 코르반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안드려도 된다는 것입니다. 코르반이라는 단어의 뜻은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부모님께 드릴 물건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핑계로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니 이야말로 하나님을 빙자하여 효도하지 않는 기가 막힌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게 신앙심 좋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효성이었습니다. 모든 율법 조항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는 바리새인들의 효성의 모습이 그런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자녀된 우리들의 부모님을 향한 마음은 어떨까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문제를 놓고도 끊임없이 제 이익만을 계산하고 있는 지극히 교활한 자식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코르반인 것입니다. 그리고도 겉으로는 거룩한척, 경건한척, 하나님의 일을 제 혼자 다 하는 척 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 것도 바로 코르반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버이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 한 번 진지하게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되돌아 봅시다.

예수와 제자들을 옭아 매려고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머쓱해져서 물러간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들이 한 바탕 난리를 치고 가는 바람에 식사하는 것도 흐지부지 되고 예수님의 말씀만 몇 마디 듣고 난 후였습니다. 예수께서 쉬고 싶으셔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쉴만한 집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한 여인이 갑자기 예수를 향해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제 딸 아이를 살려 주세요. 악령에 사로잡혀 시달리고 있답니다. 불쌍한 제 아이를 제발 좀 살려 주십시오. 여인은 울부짖었습니다.

순간, 주님은 짜증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의 본문 25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피곤하신 것 같아 보였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할 것인가? 악령을 내몰고 또 내몰아도 여전히 인간들 속에 살아있고, 한 문둥병자를 고치면 다른 문둥병자가 생겨나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도 옆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계속 죽어가는데, 이 끝없는 행진의 의미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예수는 침묵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계속 소리 질렀습니다. “내 딸을 살려 주세요.”
듣다 못해 제자들이 나섰습니다. “주님, 어떻게 좀 해서 돌려보내시죠.”
이때 예수님의 입에서 뜻밖의 말씀이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오늘의 본문 22절에 의하면 그 여인은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 곧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정복당한 가나안 원주민 여인이란 뜻이니 곧 종으로 살아온 여인이었습니다. 마가7:26에 의하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 곧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말씀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는 말이고 나는 유대인을 위해 왔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앞으로 나와 예수께 엎드려 절하며 호소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께서는 냉정했습니다. 단호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아이들이 먹을 양식을 개에게 던져주는 것을 옳은 일이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개라니요? 아무리 이방인이고 가나안 여인이라 해도 개라니요? 이렇게 모욕적인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얼마나 다급해서 찾아왔는데 따뜻한 말 한 마디 못해줄망정 개라니요? 그 여인이 화를 내고 돌아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개란 말씀이군요. 예수 당신도 별 수 없군요.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더니 당신도 유대인 남자일뿐이군요."
그리고 돌아서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주님. 그러나 개들도 주인집 아이들의 밥상 아래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개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개만 못한 것이라고 멸시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집 아이들이 밥상아래 흘린 부스러기를 먹듯이 그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주십시오.
그야말로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내 딸이 낫는다면 나는 “기꺼이 개라도 되리라” 이는 자식을 사랑하는 한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의 절규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해석하면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께서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일부러 그러셨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 받아야 한다고 하는 유대 우월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마는,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개취급이라도 받으리라는 한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을 나타내는 사건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기꺼이 개라도 되리라”
그 여인의 절규는 예수님마저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제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악령에게 시달림을 받는 딸을 위하여 스스로 개가 되는 여인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느냐? 사랑 없이는 아무도 그럴 수 없다. 그 여인은 병든 딸의 ‘어머니’였다”

그렇습니다.
그 여인은 단순한 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여인의 절규는 단순한 부르짖음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자식을 위한 사랑의 부르짖음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어머니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니 이렇게 바꿀 수 있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여자여 네 사랑이 크도다. 네 사랑이 네 딸을 구했다. 어서 집으로 가보아라. 악령이 너의 딸에게서 물러갔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버이 주일은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내가 과연 그 어머니의 사랑에 얼마나 보답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묻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제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진실한 사랑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오늘의 본문은 과연 한 어머니의 사랑이야기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금요일 저녁 철야기도회가 있어서 본당에 올라와 있을 때였습니다. 윤 전도사님이 올라오더니 물었습니다. '혹 이대우 집사님 가정에 심방가실 수 있는지요?' 내일 토요일인데 설교원고를 쓰지 못하고 있어서 마음이 몹시 바쁠 때였지만 그렇다고 심방을 가지 못하겠다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윤전도사님과 서초14속 식구들과 함께 이대우 집사님, 김옥연 성도님 가정에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대심방때 심방을 하지 못했고, 더군다나 대학교 2학년 다니는 외아들을 졸지에 떠나보내고 나서 너무나 힘들어 할 것 같기에 위로 예배도 드리고 싶어서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예배를 준비하면서 대체 무슨 말로 위로할 것인가 참으로 고민스러웠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을 무슨 수로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심방설교를 준비하려고 성경을 읽은 가운데 제 마음 속에 한 가지 물음이 떠올라왔습니다.
“이 목사, 너는 왜 예수를 믿는가?”
예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예수께서 상진이라는 이대우 집사님의 아들을 죽지 않게 하실 수는 없었단 말인가? 아들을 잃고 그렇게 통곡하던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그 아들을 잃고 그렇게 통곡하던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그 아들을 살려내실 수 없었단 말인가? 그렇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행하셨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면 왜 예수를 믿는가?
바로 그때 제 마음 속에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요한복음11장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저는 35절에 주목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 나사로를 지극히 사랑하셨고 또 나사로의 누이들이 오라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시며 함께 눈물 흘리시던 예수, 저는 바로 그 장면에서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대우 집사님 가족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슬픔 가운데 다가오셔서 함께 눈물 흘리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이라는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고통 받는 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던 분이 아니시던가요? 그렇게도 많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셨지만,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었고, 파도를 잔잔케 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러나 이렇게 고백하실 수 밖에 없으셨던 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여러분!
기꺼이 개가 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분이 아니던가요?
안식일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대가로 주님께 돌아온 것은 마가복음 3:6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더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대가로 주님께 돌아온 것은 요한복음 5:18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대가로 주님이 얻은 것은 요한복음11:53절에 의하면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마태복음27:27-30까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개라도 되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이십니다.
이 세계를 죄악의 사슬로부터 풀어내기 위해서라면, 병든 세계를 고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개라도 되리라고 다짐하셨던 분, 그분이 바로 예수 이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님을 보며 슬피 울던 여인의 무리를 향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던 분, 그분이 바로 예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그 여인에게서 바로 당신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딸은 구원받았습니다.

어버이 주일,
오늘은 바로 어머니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날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사랑을 자식들에게 전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 사랑을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날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우리들이 아무리 나이 많아진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나 있는가요?
그런데 어찌 효도하는데 조건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요?
우리 모두 마음을 다하여 부모님께 효도하십시다.
살아계실 때 효도하여 나중에 후회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의 어머님들께 늘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