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어디에(2010.12.19)
본문) 이사야서 11:1-9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제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은 참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시인 양성우의 표현에 의하면 그 시대는 한 마디로 '겨울공화국'이었습니다. 곳곳에 비밀경찰의 촉수가 박혀서 언제 어떻게 잡혀갈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가 짓누르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시인 김지하는 희곡을 하나 써서 1973년 원주 카톨릭회관에서 초연을 함으로써 저항의 물꼬를 텄으니 그 희곡의 제목은 바로 ‘금관의 예수’입니다. 김지하는 그 희곡의 첫머리에 한 편의 시를 쓰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관의 예수’
"얼어붙은 저 하늘 /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 아 캄캄한 가난의 거리
어디서 왔나 /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나 /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고향도 없다네 /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겨울 한복판 / 버림 받았네 버림 받았네
아 아 거리여 / 외로운 거리
거절당한 손길들 /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
어디 있을까 / 천국은 어디
사철 푸른 나무숲 / 거기 있을까
어디 계실까 / 주님은 어디
오 주여 이제는 여기 / 우리와 함께
주여 우리와 함께 하소서."
김지하의 이 시가 널리 퍼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노래로 부르게 된 것은 이 시를 노랫말에 맞게 고치고 곡을 붙인 김민기가 양희은에게 곡을 주어 부르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금지곡이 되었지만 젊은이들은 몰래몰래 그 곡을 등사해서 널리 퍼뜨렸고, 당시 한창 유행하던 기타로 반주하면서 모일 때마다 불렀습니다. 혹시나 누가 와서 들을까 염려하여 문을 꼭 닫아걸고 목소리를 낮춰가며 불러야 했지만 금지곡이기 때문에 더 널리 퍼졌습니다. 그 노래는 이렇게 부릅니다.
‘금관의 예수’ (김지하 시/김민기 작사,작곡/ 양희은 노래)
1.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후렴)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그런데 여러분!
그 시대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말도 되지 않는 시대였는지 아십니까? 권력자들은 ‘금관의 예수’를 금지곡으로 만들어놓고는 가수들로 하여금 가사를 바꾸어서 부르게 했습니다. 바뀐 가사는 이렇습니다.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 그곳에 그들과 함께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 그들과 함께 하소서.“
뭐가 바뀌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바뀌고, “여기에 우리와 함께”가 “그곳에 그들과 함께”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소서”가 “그들과 함께 하소서”로 바뀜으로써 이 노래가 마치 북한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가사를 바꾼다고 해서 그 노래를 부르며 북한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 마음이 울컥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마는 이 노래가 저에게 준 충격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특히 2절의 가사는 저에게 엄청난 충격과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2. 아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그렇습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 저 편 푸른 숲 그 어딘가에 천국은 있는가?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엄혹한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여윈 채 캄캄한 가난의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 채 얼어붙은 저 캄캄한 곤욕의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과연 죽음 너머 푸른 숲 어딘가에 있는 천국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늘도 얼어붙고, 벌판도 얼어붙고, 태양도 빛을 잃은 이 차디찬 겨울공화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천국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묻게 되었습니다. 겨울공화국에서 살면서 그 누구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어디에도 머무를 곳이 없고, 어디에서도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 후의 하늘나라에 희망을 갖고 살아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저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천국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게 되었고, 그것을 일생의 화두로 삼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저는 이 노래를 부를 때면 후렴구를 부를 때 더 크게 부르곤 했습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여러분!
왜 오늘따라 이렇게 흘러간 노래 한 편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참으로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판결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판결이 바로 그 시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선포했던 긴급조치 제1호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어서 위헌이라는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경기도 평택에 살던 오종상 씨는 1974년 5월 어느 날 버스 옆자리에 앉은 여고생이 ‘반공 . 근면 . 저축 . 수출증대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고생이 학교 선생님한테 오씨의 이야기를 전했고, 그 선생님의 신고로 오씨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징역 3년형을 살게 되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당시는 막걸리 반공법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법원은 무려 36년 만에 그의 무죄를 확정지었고, 긴급조치는 위헌이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의한 법이요, 불공정한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판결을 보면서 저는 지난 70년대를 기억했고, 그 시대 고통을 겪었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 입에서 저절로 '금관의 예수'가 흘러나왔고, 그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믿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여기서 누리지 못하면 죽은 다음에 갈 하나님의 나라는 갈 수 없다고 저는 믿는데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예언자 이사야는 바로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비록 그가 살던 시대가 오늘 우리 시대와 똑같이 하늘도 얼어붙고, 벌판도 얼어붙고, 태양도 빛을 잃었지만 그러나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로 남겨 놓았으니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그분은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함으로써 가난하다고 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지 않고, 억눌린 사람들의 한을 풀어줍니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 가진 것이 많다고 으스대고 무자비한 자들을 내리치고, 그가 하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이루어질, 아니 꼭 이루어져야 할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는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져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없어지는 세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하게 재판을 받아서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일이 없어지고, 억눌린 사람들은 억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잔인한 자와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치시는 몽둥이로 엄정하게 처벌받고 사형을 받아 없어져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와서 이루실 천국은 정의가 바르게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공의로 재판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없고, 불의한 자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루는 나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 이사야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리, 표범, 새끼 사자, 곰, 사자, 독사, 살모사 모두 다 맹수들 아닙니까? 끊임없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무서운 존재들 아닙니까? 독사나 살모사는 그 독으로 많은 생물들을 죽이는 잔인한 동물들 아닙니까? 반대로 어린 양, 새끼 염소, 송아지, 어린아이, 암소, 소, 젖 먹는 아이, 젖 뗀 아이들은 너무나 연약하고, 아무런 저항력이 없는 존재들 아닙니까? 누군가 때리면 맞고, 겁주면 움츠러드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같이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긴장된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눕고, 함께 먹고,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끌고 다니는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벗이 되고, 함께 눕고, 사자가 풀을 먹고, 어린 아이들이 독사와 살모사와 함께 있어도 되는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틀어서 이사야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는 악한 자들이, 힘센 자들이 약한 자들을 억압하거나 잡아먹지 않는 세상입니다. 힘이 없고 연약한 자들이 당당하게, 차별받지 않고, 외롭지 않고, 헤매지 않고, 버림받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서로를 해치거나 억누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면 바로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천국은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지금 여기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죽음 너머 푸른 숲 그 어딘가에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물론 성경에 나오는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마는 예언자 이사야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바에 의하면 주님께서 계신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시는 주님이 계신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정의와 사랑의 나라인 것이고,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 져야 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제가 1970년대에 불렀던 그 '금관의 예수'를 다시 부르는 시대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다시 그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시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많은 사람들이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며 헤매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와 함께 하소서'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대림절 넷째주일을 보내며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예수와 함께 이 땅에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그 일을 위해 우리의 일생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를 영원한 당신의 품 안으로 맞아주실 줄 믿습니다.
"금관의 예수"가 다시 불려지는 이 시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천국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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