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빛(2010. 12. 5)
본문) 이사야서 2:1-5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시로 받은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 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표준새번역 개정판)
참으로 긴장되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일주일이 지나갔습니다. 미국 핵 항공모함이 참가하는 대규모 훈련이 서해바다에서 있었고, 북한과 중국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습니다. 특히 북한은 또다시 대포를 쏠지 모른다는 협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연평도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은 연평도로 돌아가야 할지 마라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아직도 찜질방에서 생활하고 있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될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인터넷 신문인 당당뉴스에 방현섭 목사님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거기에 나름대로의 해법이 나와 있기에 그 핵심이 되는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 .... < 앞부분 생략 > .................
지금 국민들의 가슴은 조마조마하다. 성질 하나로 버텨온 조선(=북한)과 조선을 비호하는 중국, 그리고 이번기회에 뽄때를 보여주겠다고 입술을 앙다문 이명박 정권과 군사패권주의의 적극적 추종자 미국이 '못할 것도 없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래저래 이고지고 들쳐 업고 피란길에 나서야 하는 것은 국민이고 인민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하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의 장에서는 피의 반복이 될 뿐이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지구상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완전히 없애버릴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섣불리 시작했다가 두고두고 서로가 큰 상처를 입게 될 뿐이다. 한 나라를 없애버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정답은 화해이다. 한대 맞았다고 해서 두 대 때린다면 다시 네 대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럼 다시 여덟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가? 일단 만나서 뭐가 문제냐, 왜 그랬냐, 앞으로 어떡할꺼냐, 우리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고 협상하는 것이 원칙이다. 서로가 조금씩 양보해가면서 유지되는 것이 평화이다. 힘과 물리력으로 평화가 유지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이미 폭력의 무력함을 일제시대에 경험하지 않았던가!
한국도 물리력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역시 조선도 마찬가지이다. 괜한 감정적 대립은 인간을 야수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뿐이다. 감정은 이성으로, 폭력은 자비로 다스려진다. 한국이 정말 넉넉한 부자나라라면 쫀쫀한 복수극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통 크고 이성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대인 앞에서 소인배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법이다. 대인이 되고 싶다면 대인의 흉내라도 내기를 바란다. 국제적 지도력을 원한다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 국민들은 이 정부가 제발 무력시위를 중단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 < 방현섭 목사 >
그런데 방 목사님의 글에 열 받아서 무슨 소리냐고, 북한을 어떻게 용서하느냐고 댓글을 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댓글을 보고 제가 거기다가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댓글 단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결국 양보하고, 끝까지 참고, 협상해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 된다는 것이 제 주장이고, 그렇지 않다면 대안이 뭐냐고 물었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 대안을 대랬으니 대겠다.
대안
1. 북한과의 모든 공적 사업을 끝낸다 (개성공단 철수, 금강산 철수)
2. 국방백서에 북한을 명확하게 주적으로 표현한다.
3. 미국과의 관계를 중국 북한처럼 혈맹관계이상으로 복원한다.
4. 대한민국 법률을 다시 정비하여 국가보안법을 더욱더 확실하게 적용한다.
5. 북한처럼 대한민국에도 반역죄를 신설하여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법률을 정비한다.
6. 좌파수괴 한상렬을 처형하고 해당단체를 해산시킨다.
7. 안기부의 기능을 더욱더 강화시키고 반체제를 선동하는 넘들을 체포하여 고문을 가하고 중형으로 다스려라
8. 초중등학교에서 반공교육을 강화시키고 북괴의 실체를 정확하게 교육할 수 있도록 하고 반공웅변을 부활시켜라.
9. 반체제인 전교조를 즉시 해체하고 선동자를 처벌하라
10. 좌파사상의 목사들을 색출하여 더 이상 국민을 현혹하지 못하게 한다.
11. 초등학교 학생들은 무조건 이승복 기념관을 찾도록 하고 그들의 만행을 교육할 수 있도록 한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래도 당당뉴스에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기독교인, 툭히 감리교인일텐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구제불능입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답답합니다. 우리 감리교 게시판도 이 문제로 팽팽히 나눠져 있지요. 결국 대화하자는 사람들과 대화론자들을 좌빨이라고 몰아붙이며 북한을 무력으로라도 공격하자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지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서 1장 1절을 보면 그가 활동했던 시대가 언제인지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다.”
그러니까 예언자 이사야는 남왕국의 왕 네 사람의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역사를 정리해 보면 요담 왕이 즉위한 것이 기원전 751년입니다. 이후 요담 왕이 16년, 아하스 왕이 16년, 히스기야 왕이 2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때는 바로 유다 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전쟁의 공포가 세상을 뒤덮었던 때였습니다. 아하스 왕이 재위하고 있던 기원전 721년에 북왕국이 멸망한 것은 그 절정이었고, 그전, 그후에도 끊임없이 전쟁의 공포가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구약 열왕기하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이렇게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베가 왕 시대(유다 왕의 요담 왕 시대)에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이 쳐들어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아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의 온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앗시리아로 사로잡아 갔다.” (열왕기하 15:29)
“그 때에 시리아의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 왕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와서, 아하스를 포위하기는 하였으나,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그 때에 시리아의 르신 왕이, 시리아에게 엘랏을 되찾아 주었고, 엘랏에서 유다 사람들을 몰아내었으므로, 시리아 사람들이 이 날까지 엘랏에 와서 살고 있다.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임금님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올라오셔서, 나를 공격하고 있는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런 다음에 아하스는 주님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금과 은을 모두 꺼내어, 앗시리아의 왕에게 선물로 보냈다. 앗시리아의 왕이 그의 요청을 듣고,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여 올라와서는 그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주민을 길로 사로잡아 가고, 르신은 살해하였다.” (열왕기하 16:5-9)
“유다의 아하스 왕 제 십이 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이전의 왕들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왕이 그를 치러 올라오니, 호세아 왕은 그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앗시리아 왕은, 호세아가 이집트의 소 왕에게 사절들을 보내어 반역을 기도하고, 해마다 하던 것과는 달리, 앗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내지 않는 것을 알고 나서는, 호세아를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열왕기하 17:1-5)
“히스기야 왕 제 십사 년에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올라와서, 요새화된 유다의 모든 성읍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래서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라기스에 와 있는 앗시리아 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말하였다. ‘우리가 잘못하였습니다. 철수만 해주시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히스기야 왕에게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히스기야는 주님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은을 있는 대로 다 내주었다. 그 때에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주님의 성전 문과 기둥에 자신이 직접 입힌 금을 모두 벗겨서, 앗시리아 왕에게 주었다. 그런데도 앗시리아 왕은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에게 많은 병력을 주어서,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려보내어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윗 저수지의 수로 곁에 있는 빨래터로 가는 큰 길 가에 포진하였다.” (열왕기하 18:13-17)
그렇습니다.
기원전 8세기 후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다스리던 시대의 유다는 끊임없는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나라였습니다. 언제 전쟁이 다시 일어나고, 적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당할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의 시대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부르셨고, 그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 앞에 나서게 된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백성들에게 전한 말씀은 무엇일까요? 우리 생각에는 전쟁에 대비해서 군사력을 키우라든지, 식량을 비축하라든지 하는 말씀을 할 것 같은데 이사야는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1장에서 이사야는 대뜸 그들을 참으로 엄하게 꾸짖는 일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사야서 1장을 보겠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 (이사야서 1: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식이라고 키웠는데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소나 나귀보다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슬프다!
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 (이사야서 1:4)
그러면서 이사야는 그 백성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더 맞을 일만 하느냐?
어찌하여 여전히 배반을 일삼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골병이 들었으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 난 곳과 매 맞은 곳과 또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인데도,
그것을 짜내지도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상처가 가라앉게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 (이사야서 1:5-6)
그리고 그들은 참으로 처절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땅이 황폐해지고,
너희의 성읍들이 송두리째 불에 탔으며,
너희의 농토에서 난 것을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방 사람들이 약탈해 갔다.“ (이사야서 1:7)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이사야서 1:11-14)
왜 그렇습니까? 왜 그 모든 제사나 제물,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까? 15절 끝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이사야서 1:16-17)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정의입니까? 이사야는 바로 이렇게 증거합니다.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이사야서 1:17)
결국 중요한 것은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억압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것을 빼앗아서 제 배를 채우는 자들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회개하고 돌아와서 정의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들이 이사야의 말을 듣습니까?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아닙니다. 듣지 않습니다. 듣기는커녕 콧방귀도 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결국 이렇게까지 선포합니다.
“너희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즐겼으니,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가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으므로 창피를 당할 것이다.
기어이 너희는 잎이 시든 상수리나무처럼 될 것이며,
물이 없는 동산과 같이 메마를 것이다.
강한 자가 삼오라기와 같이 되고,
그가 한 일은 불티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둘이 함께 불타도 꺼 줄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이사야서 1:29-31)
자, 그럼 이제 어찌할 것인가?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 두려움에 떨면서 멸망의 날을 기다릴 것인가? 끝까지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의를 행할 것인가?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 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사야가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평화의 나라입니다. 4절에 정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서 2: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험한 전쟁의 시대 속에서 이사야를 통해 군사력을 키우라고, 무력으로 맞서 싸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먼저 정의를 세우고, 악한 일을 버리고, 억압받는 사람,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숫양과 숫염소를 아무리 많이 제물로 바치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아무리 많이 모여도, 또 기도한다고 아무리 팔을 벌리고 흔들어도 손에 묻은 피를 씻고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정의와 자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기나 군사력이 평화의 길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가 곧 평화의 길이요, 하나님 나라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시면 그분이 그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기다리며 평화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 평화의 왕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맞으면서 이제 한국교회가 선포해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전쟁입니까, 평화입니까? 분명히 평화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이시니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오늘 이 땅에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빛입니다. 빛되신 주님은 평화의 빛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도 말씀하셨고,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땅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북녘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십시다. 그 길이 평화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평화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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