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10 년도

2010. 4. 4 / 갈릴리로 가라 / 마태복음 28:1-10(부활절 예배)

람보 2 2015. 4. 4. 23:10

갈릴리로 가라(2010. 4. 4)

 

본문) 마태복음 28:1-10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님의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에 다가와서, 그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 그 천사의 모습은 번개와 같았고, 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었다. 지키던 사람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떨었고,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오늘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명절인 부활절입니다. 그야말로 기독교의 근원이요, 시작인 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방송설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절이 지닌 의미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 이른 시간에 광장에 모여서 축하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분명히, 확실히 죽었고, 그 시신이 무덤에 들어갔는데 죽은 자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예수를 제자들이 만났고, 제자들이 만난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교회의 시작이요, 기독교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교리의 사실상의 창시자인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2-14)

 

그렇다면 여러분은 당장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누가 직접 눈으로 보았나? 본 사람이 직접 증언하고 있는가? 그걸 믿으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요,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성경에도 예수가 부활하는 바로 그 장면을 누가 직접, 그 순간에 보았다는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네 복음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현대과학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실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성서의 기록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이 거짓이라면 기독교는 결국 거짓 위에 기초한 종교란 말인가?

 

분명히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네 복음서 기자들 중 그 누구도 예수의 부활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기에 그들은 그 기록을 남겨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시신을 집어넣었던 무덤이 비어 있었고, 또 몇몇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만났다고만 증언합니다. 그것도 당시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극소수의 무리들, 특히 예수를 믿은 사람들만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함으로써 부활사건을 객관적으로 증거하려는 노력을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예수의 부활사건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건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부활 사건은 왜 기록된 것인가요? 그걸 통해서 진정 복음서 저자들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저는 이미 누가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의 순서대로 복음서 강해 설교를 해 왔고, 그 모든 설교 내용을 저희 교회 홈페이지와 제 블로그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조금만 수고하시면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들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찾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7:61에 의하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집어넣을 때 그 장면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건너편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의 시신은 무덤 안에 놓여졌고, 커다란 돌멩이로 무덤은 막혔으며, 로마 군인들이 그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 두 여인은 결국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안식일 직전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고,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기록 자체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어쨌든 천사가 그 여인들에게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말하면서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여러분!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서움과 큰 기쁨에 사로잡혀 뛰어가던 여인들 앞에 예수가 나타나셨고,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에서의 핵심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6:31-32에는 이런 기록도 나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밤에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붙잡히시기 전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를 모른다고 하고 도망치기 직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말했고, 예수께서도 친히 여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 그러니 마태복음에서의 부활사건 핵심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갈 것이고, 거기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이 이렇게도 강조되고 있는가요?

 

여러분!

여기서의 갈릴리는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과의 반대개념입니다. 유다 지방 특히 그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한 마디로 권력의 중심지요, 종교의 중심지요, 경제적 착취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 총독과 그 앞잡이로서의 귀족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라고 하는 종교지도자들, 엄청난 넓이의 땅을 소유하고 소작농을 부리는 부재지주인 지배계급들이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반면에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한 마디로 어둠의 땅이요, 그늘진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 4:12-17)

 

그렇습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로부터 이방 사람의 땅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땅이었습니다. 가진 것 없고, 율법지키지 못한다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그러니까 핏줄로 보면 유대인이지만 이방인들과 똑같은 놈들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이 살던 땅입니다. 그들은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들이요, 갈릴리는 그늘진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런 갈릴리를 중심으로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어둠에 앉아 있던 백성들, 그늘진 죽음의 땅에 살던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이제 세상이 뒤집어졌다고, 예루살렘과 거기에 사는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고 선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죽으신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세상의 불의한 권력이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착취와 압제를 일삼던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허위와 거짓과 교만에 가득 찬 종교 세력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배세력들은 언제까지나 군림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심으로써, 그리고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로 가신다고 선포하심으로써 불의한 악의 세력이 무너졌다고 증거합니다. 착취와 압제를 일삼던 권력이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증거합니다. 허위와 거짓과 교만으로 가득 찬 종교세력이 지옥으로 떨어질 것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신앙이 없다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 어둠에 앉아 탄식하던 백성들, 그늘진 죽음의 땅에 살며 한숨짓던 무리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이미 누릴 것 다 누리고, 가질 것 다 갖고, 휘두를 것 다 휘두른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부활이 필요없습니다. 마치 서울에서 모든 것 다 누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예수의 부활이 필요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잃어버릴까봐, 자기들이 가진 것 잃어버릴까봐 세종시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부활이 필요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이 재앙이요, 심판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들고 천시받고 소외당했던 사람들에게는 부활이 축복이요, 복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곧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선포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선포입니다. 갈릴리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억압받고, 쫓겨나고,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즉 사람 사는 세상이 왔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선포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 사람 사는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방송을 들으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함으로써 복음서 기자들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손을 내미셨습니다. 갈릴리에 사는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에 참여하게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다시 한 번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