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10 년도

2010. 1. 24 / 누가 소리치는가? / 마태복음 27:1-2, 11-26

람보 2 2015. 4. 4. 22:42

누가 소리치는가?(2010. 1. 24)

 

본문) 마태복음 27:1-2, 11-26

“새벽이 되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두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니, 총독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고발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들이 저렇게 여러 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예수께서 한 마디도, 단 한 가지 고발에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은 매우 이상히 여겼다.

명절 때마다 총독이 무리가 원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때에 〔예수〕바라바라고 하는 소문난 죄수가 있었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하여 예수를 넘겨주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당신은 그 옳은 사람에게 아무 관여도 하지 마세요. 지난 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몹시 괴로웠어요.’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구슬러서,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고, 예수를 죽이라고 요청하게 하였다. 총독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그들이 말하였다. ‘바라바요.’ 그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들이 모두 말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에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예수는 누구이산가?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한 마디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일찍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런데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 별을 보고 찾아왔던 사람들이 했던 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는 아예 태어나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다고 마태복음 기자는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아기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에 동방박사라고 되어 있는 이 사람들은 당시 지중해 주변에서 로마에게 정복당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던 파르티아 왕국의 점성술사요, 학자요, 고관이었던 사람들 즉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알아챈 것은 같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 마태복음에서 누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부르고 있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쭉 보아온 것처럼 예수 탄생 사건 이후 마태복음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전혀 그렇게 부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마지막에 와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를 향해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하고 묻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로마 총독 빌라도입니다.

 

한밤중에 몰래 예수를 붙잡아다가 밤새 심문을 행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새벽이 되어서, 모두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끼리 아무리 결의를 해도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선고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 권한은 오로지 로마황제의 대리인인 총독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시게 되었던 것이고, 이때 총독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

 

물론 이 물음은 빌라도가 예수를 진정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믿었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 아니라 예수를 조롱하고, 유대인들을 비웃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의 입을 통해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소”라고 대답하게 함으로써 로마 총독,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대표자가 자기 입으로 예수야말로 “유대인의 왕”임을 인정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총독 빌라도,

비록 오늘의 본문에는 얼핏 보면 빌라도가 매우 신사적이고 예수를 살려내기 위해 무척 애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빌라도는 아주 야만적이고 잔인했으며, 유대인 피지배민들을 거리낌없이 경멸하고 멸시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기원후 27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은퇴한 후 황제처럼 군림했던 세야누스의 지원을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힘은 막강했고, 그는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빌라도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 (누가복음 13:1-3)

 

또한 당대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빌라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기록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천성적으로 완고하고 강력한 의지와 무자비함이 뒤섞인 인물, 불같은 성격과 앙심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바로 그런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것입니다. 빌라도 자신이 이것저것 물어보았을 것이고, 또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온갖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해서 끊임없이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전부 다 예수에게 불리한 내용이었을 것이 뻔합니다. 그 주위에 예수를 도와주고, 예수님께 유리한 증언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열 제자는 다 도망갔고, 베드로는 바깥으로 나가서 울고 있었고,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철저하게 혼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온갖 억울한 말과 모함과 비방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피고가 된 사람으로서 마땅히 무언가 대답을 하고, 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명도 하고, 증인들의 모순도 지적하면서 반박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마디도, 단 한 가지 고발에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은 매우 이상히 여겼다.”

 

이후 15-26절까지 매우 긴 본문이 이어집니다마는 예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갖고 흥정하는 듯 한 그 상황 속에서도 단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갖 고통을 다 겪으시면서도 단 한 마디, 그것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비통에 젖은 말씀 한 마디만 하시고는 일체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침묵, 그것은 분명히 엄청난 용기이자 권위에 대한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것은 예수가 바로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바 “침묵하는 고난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그의 책 53장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이사야서 53:1-9)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글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예언을 이루셨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침묵하는 고난의 종”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와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주고 손을 씻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두 가지는 오로지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기자는 구약성경에 비추어 은연중에 빌라도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약에 의하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쓸 사람들이 면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손을 씻는 것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주검이 들에서 발견될 때에는, 장로들과 재판관들이 현장에 나가서, 그 주검 주위에 있는 성읍들에 이르는 거리를 재십시오. 그 주검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이 있을 터이니, 그 성읍의 장로들은 아직 멍에를 메고 일한 적이 없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물이 늘 흐르는 골짜기, 갈지도 심지도 않은 골짜기로 그 암송아지를 끌고 내려가, 물가에서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서 죽이십시오. 그 때에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으로서, 모든 소송과 분쟁을 판결할 것입니다. 이때에 피살자의 주검이 발견된 곳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의 장로들은 물가에서, 목이 꺾인 암송아지 위에 냇물로 손을 씻고, 아래와 같이 증언하십시오.

‘우리는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이 사람이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속량하여 주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에게 무죄한 사람을 죽인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들은 살인의 책임을 벗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지워진 살인의 책임을 벗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 (신명기 21:1-9)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나는 헛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과 한자리에 앉지 않고,

음흉한 자들과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악인들의 모임에서

그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고,

한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내가 손을 씻어 내 무죄함을 드러내며,

주님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 (시편 26:1-7)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결정한 것은 누구인가? 빌라도가 손을 씻고, 책임이 없다고 말하자 무리들이 외칩니다.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 (25절)

이 구절은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의 피는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책임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사형에 처하게 한 결정적인 힘, 그것은 바로 백성 전체입니다. 메시아를 거부한 것은 그 책임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설득된 백성 전체입니다. 이것저것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은 채 맹목적으로 지도자를 따라갔던 무지한 백성들, 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일부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고, 반복음적이고, 권력지향적인 목사들이 잘못 이끌어간다는 것도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그런 목사들의 설교나 목회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목사를 믿는 것인지 구분도 못하고, 설교가 성서적인지 아닌지 따지지도 않고,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 묻지도 않은 채 열심히 헌금 바치고 봉사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교인들이 한국교회를 망치는 근본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예수를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대꾸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가 어디 서 있는지,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한국교회의 현실을 냉철히 살펴보면서 예수 편에 서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