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9 년도

2009. 11. 22 / 내 인생의 주인 / 마태복음 26:14-16

람보 2 2015. 4. 4. 22:24

내 인생의 주인(2009. 11. 22)

 

본문) 마태복음 26:14-16

“그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사람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예수께서는 이제 네 번씩이나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물론 그중 세 번은 갈릴리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이고, 또 딱 부러지게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알려주신 것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갔다 칩시다. 그러나 26장 2절에 나오는 마지막 예고는 그야말로 내일 모레, 그러니까 딱 이틀만 지나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니까 제자들이 충격도 받아야 하고, 또 자기들끼리라도 대책을 세우려고 애쓰는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만약에 어느 집안에서 아버지가 내일 모레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자식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식들이 나서서 병원에 가자, 뭐 해야 하느냐 하면서 모두들 분주해지겠지요. 그게 정상적인 모습이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전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모여서 예수를 어떻게 잡아 죽일까 모의를 하였고, 틀림없이 정탐꾼들을 보내어 예수님 일행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캐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그 정보를 듣고 있었겠지요. 그러면서 어디서 어떻게 예수를 잡아야 좋을지 궁리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까맣게 모른 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 시몬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께 부어드렸고, 제자들은 그 비싼 것을 왜 허비했느냐 하고 난리를 피웠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자, 이렇게 무언가 어수선하고, 무언가 어두운 기운이 예루살렘 성을 감싸고 있을 바로 그 때, 조용히 잔치 자리를 빠져 나간 제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가룟 유다였습니다.

 

가룟 유다,

역사에 가장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은 이름, 유다. 이스라엘 민족이 너무나 즐겨 사용했기에 구약과 신약 모두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바로 이 순간 이후 그 누구도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게 된 이름. 유다. 심지어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말도록 법으로 금지시켰다고 할 정도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이름이 되어버린 이름, 유다. 바로 그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고,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복음서 기자는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 2,000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유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 왔습니다. 유다가 도대체 왜 예수를 배반했는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애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미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가룟 유다를 옹호하고, 심지어는 가룟 유다야말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참된 제자라고까지 옹호하는 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유명한 유다복음서와 같은 영지주의 책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도 이미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서를 강해할 때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으니까 새삼 여러 이유를 말씀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오직 오늘의 본문에 충실하게 집중함으로써 오늘 주시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에는 이 본문이 아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가복음 14:10-11)

 

여기에는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가 무엇인지, 돈을 얼마나 받기로 했는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를 넘겨줄 “마음을 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만을 보면 유다가 왜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는지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이에 덧붙여 조금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여,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유다는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누가복음 22:1-6)

 

그렇습니다.

마가나 마태에는 없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사탄이 시키는 대로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은 사탄 즉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이것을 이어받아 사탄이 들어간 때까지 밝혀주는데 바로 최후의 만찬 때입니다.

“그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요한복음 13:27)

 

이렇게 놓고 보면 마가복음부터 시작해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는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단순히 “마음을 품고”로 되어 있다가 누가복음에 가서 “사탄이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갔고”, 요한복음에는 그 사탄이 들어간 시간이 예수께서 유다에게 “빵조각을 준”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태복음의 내용은 누가나 요한과는 전혀 다르고, 또 마가복음과 비교하면 조금 구체적입니다. 즉 마태복음에 의하면 유다는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예수를 팔아먹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스승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대가로 준 것은 바로 돈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셈하여 주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잡아 넘겨주는 일에 성공하면 돈을 주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돈을 준 것입니다. 아직 넘겨주는 일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데 그 자리에서 덥석 돈을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철저하게 돈을 중심으로 한 거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숨의 값으로 돈을 주고받은 것입니다.

 

은돈 서른 닢, 그것은 바로 종의 몸값이니 출애굽기에 나와 있습니다.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게 하였으면, 소 임자는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고, 그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21:32)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단돈 은화 삼십, 그러니까 몸종 한 사람의 값에 해당되는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돈의 액수가 너무 적은 것으로 보아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아먹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유다가 돈을 받고 주님을 넘겨주기로 했다고 증거합니다.

 

돈, 헬라어로 맘몬(Mammon)은 바로 신의 이름입니다. 그런 점에서 돈은 하나의 종교입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탐심이자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악한 세력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께 맞설 수 있는 세력이 바로 돈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순전한 마음과 온전한 순종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거두어가는 악한 영적 세력이 바로 돈입니다. 그래서 리차드 훠스터(Richard Foster)는 “돈은 단순히 중립적인 교화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힘(power)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갈파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돈은 단순한 종이조각이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위를 강탈하려는 악마적 존재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돈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하나의 영적 실체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도록 충동질하는 영적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모 재벌회장입니다. 그가 수십 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재산을 단돈 몇 십 억 원의 상속세만 내고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을 다 아십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어느 단체에서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끝내 그 회장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회사의 불법을 그 회사에서 일하던 변호사가 폭로했는데 결국 그 변호사만 쫓겨나고 그 회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그 누구도 그 회장 앞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바로 돈에서 나옵니다. 돈이 바로 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하나님과 돈 가운데 돈을 택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택하지 않고 돈을 주인으로 택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예가 있으니 그는 예수를 단 한 번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를 때도 그는 끈질기게 예수를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뒤에 그 증거가 나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다.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그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 예수를 넘겨줄 사람인 유다가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26:20-25)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그와 함께 하였다.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암호를 정하여 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으시오’하고 말해 놓았다. 유다가 곧바로 예수께 다가가서 ‘안녕하십니까? 선생님!’하고 말하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마태복음 26:47-49)

 

여러분, 보십시오.

분명히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했는데 유독 유다만 ’선생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예수가 바로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제자들은 비록 나중에 예수를 모른다고 하고, 도망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결코 단 한 번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많은 랍비 가운데 하나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그러한 그의 인생의 주인은 예수가 아니라 바로 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전 삼십을 받고도 예수를 팔아넘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은전 삼십이 지극히 적은 돈이기에 돈이 주목적은 아니라고 보기도 하지만 적어도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는 돈 자체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고라도 스승을 팔아넘길 만큼 그가 돈을 사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즉 유다는 예수가 아니라 돈을 주인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오늘의 본문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마가, 마태, 누가 세 복음서에 나와 있는 유다의 배반 이야기는 줄거리는 같지만 이미 본 것처럼 미묘한 차이가 있고, 따라서 세 복음서가 각자 말하고 싶은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세 복음서가 똑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가룟 유다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 여기서 말하는 열두 제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분명히 다른 열한 사람과 같이 주님께로부터 직접 택함을 받은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삼 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녔고, 모든 것을 함께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가르침을 들었고, 주님이 행하시는 능력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사랑도 느꼈고, 많은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그가 주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복음서 기자들은 왜 유다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빼놓지 않고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라고 썼을까요? 배반자는 멀리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이, 주님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대개 주님을 배반합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을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 믿음이 작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 인생의 주인은 누구냐?” 하나님이냐, 돈이냐? 여기에 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