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9 년도

2009. 11. 15 / 아무것도 없는데 / 하박국서 3:14-19(추수감사주일)

람보 2 2015. 4. 4. 22:22

아무것도 없는데(2009. 11. 15)

 

본문) 하박국서 3:14-19)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우리는 지금까지 마태복음을 함께 읽어 왔는데 이제 막 예수님의 다섯 번째 설교를 살펴보고 고난의 길로 막 접어드는 상황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잡아 죽일 모의를 하는 와중에 한 여인이 나타나 향유를 붓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가룟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기 위해 대제사장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순서대로 하면 오늘은 가룟 유다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룟 유다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추수감사주일과 가룟 유다 사건이 어울리지가 않았습니다. 도대체 가룟 유다를 통해 무엇을 감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내가 가룟 유다가 아닌 것을 감사한다고 설교한단 말인가?

그래서 할 수 없이 이번만은 순서에 따른 강해설교를 하지 말고 절기에 맞는 설교를 하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본문을 찾으려고 생각했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인 하박국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숨에 읽었고, 설교 제목도 그 자리에서 정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아마도 제 마음 속에 오늘의 본문이 요즘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형편과 너무나 흡사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제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20년 넘게 목회하면서 토요일이 되도록 추수감사주일 헌금을 준비하지 못해서 특별헌금을 할 만한 형편이 도무지 안 되는 것이 올해가 처음인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추수감사주일을 지킨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설교제목도 “아무 것도 없는데” 라고 금방 떠올라 왔던 것입니다.

 

예언자 하박국은 노래합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보십시오.

하박국은 그야말로 진짜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는 거두어들일 곡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양을 기르는 우리는 있는데 그 안에 양은 한 마리도 없고, 외양간은 있는데 그 안에 있어야 할 소는커녕 송아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장 먹고 살 수 없고, 굶주려야 할 형편입니다. 그야말로 사는 것이 너무나 한심하고, 불평이 쏟아질 수밖에 없고, 눈앞이 캄캄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노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하박국이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놀라운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기원전 609년, 유다 왕국의 요시야 왕이 이집트의 바로 느고 2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의 북진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싸우다가 전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여덟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서른한 해 동안 나라를 다스렸던 요시야 왕의 죽음과 함께 유다 왕국은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요시야 왕은 하나님께 크게 칭찬받은 왕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열왕기하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주님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지키려고,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없애 버렸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다 기울이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 기울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주님께로 돌이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열왕기하 23:24-25)

 

하나님께서 이러한 요시야 왕을 축복하셔서 그의 시대에는 나라도 안정되고 백성들도 먹고 살 만 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이 죽고 나서 그의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불과 석 달 만에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에게 사로잡혀 갔습니다.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열한 해 동안 다스렸는데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이나 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라고 열왕기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이 행한 일들, 즉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들‘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증조할아버지인 므낫세 왕의 온갖 못된 짓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므낫세가 지은 그 죄 때문에 그들을 주님 앞에서 내쫓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유다에게서 성취된 일이었다. 더욱이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예루살렘을 죄 없는 사람의 피로 가득 채운 그의 죄를, 주님께서는 결코 용서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열왕기하 24:3-4)

 

여러분!

바로 이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하박국입니다. 그는 므낫세 왕의 온갖 악행을 전해 들었고, 또 여호아하스 왕과 여호야김 왕이 저지르는 악행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가 직접 보았던 사건 하나가 예레미야 2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기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였다. 그도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으로, 이 도성과 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하였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이, 자기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과 함께 그의 말을 들은 뒤에, 그를 직접 죽이려고 찾았다. 우리야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여호야김 왕이 악볼의 아들 엘라단에게 몇 사람의 수행원을 딸려서 이집트로 보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오자,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공동묘지에 던졌다.” (예레미야서 26:20-23)

 

여호야김 왕이 왜 예언자 우리야를 죽였습니까?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예언을,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권력자들이 자기들 귀에 듣기 좋은 설교만 들여 하고, 바른 소리 그래서 권력자들의 귀에 거슬리는 설교를 하면 제 마음대로 죽여 버리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박국이 살던 시대는 이와 같이 온갖 불의가 가득 차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것도 공권력이 나서서 약탈과 폭력을 행사하고,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라지고,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왜 이런 상황을 두고만 보시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박국서 1장입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하박국서 1:2-4)

 

자, 이러한 하박국의 질문에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약탈과 폭력을 행하고, 공의를 짓밟는 유다 왕국을 심판하기 위해 바빌로니아 사람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민족들을 눈여겨 보아라.

놀라고 질겁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너희가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그 일을 벌이겠다.

너희가 듣고도,

도저히 잊지 못할 일을 벌이겠다.

이제 내가 바빌로니아 사람을 일으키겠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민족이어서,

천하를 주름잡고 돌아다니며,

남들이 사는 곳을 제 것처럼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두렵고 무서운 백성이다.

자기들이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그들이 부리는 말은 표범보다 날쌔고,

해거름에 나타나는 굶주린 늑대보다도 사납다.

그들의 기병은 쏜살같이 달린다.

먼 곳에서 그렇게 달려온다.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날쌔게 달려온다.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러 오는데,

폭력을 앞세우고 와서,

포로를 모래알처럼 많이 사로잡아 갈 것이다.

그들은 왕들을 업신여기고,

통치자들을 비웃을 것이다.

견고한 성도 모두 우습게 여기고,

흙 언덕을 쌓아서 그 성들을 점령할 것이다.“ (하박국서 1:5-10)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일으켜 유다의 왕과 권력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은 정복당하고, 유다 왕국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 되었는가? 이제 불의는 사라지고, 정의는 회복되었는가? 아닙니다. 정의가 회복되기는커녕 남은 것이라고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처절한 파멸뿐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은 두 번에 걸쳐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완전히 파멸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이 도성을 포위하였다. 이렇게 그의 군대가 포위하고 있는 동안에,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 도성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유다의 여호야긴 왕은 그의 어머니와 신하들과 지휘관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빌로니아 왕을 맞으러 나갔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왕은 오히려 여호야긴을 사로잡아 갔다. 때는 바빌로니아 왕 제 팔년이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보물과 왕궁 안에 있는 보물들을 모두 탈취하여 갔고,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만든 주님의 성전의 금그릇들을 모두 산산조각 내어서 깨뜨려 버렸다. 이것은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된 일이다. 더욱이 그는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과, 관리와 용사 만 명뿐만 아니라, 모든 기술자와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갔다. 그래서 그 땅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 말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열왕기하 24:10-14)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 제 십구 년 다섯째 달 칠일에, 바빌로니아 왕의 부하인 느부사라단 근위대장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는 주님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건물 곧 큰 건물은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근위대장이 지휘하는 바빌로니아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의 사면 성벽을 헐어 버렸다. 느부사라단 근위대장은 도성 안에 남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과 바빌로니아 왕에게 투항한 사람들과 나머지 수많은 백성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그 땅에서 가장 가난한 백성 가운데 일부를 남겨 두어서,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열왕기하 25:8-12)

 

그렇습니다.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왕을 비롯한 고관대작들과 기술자들은 모두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래서 남은 것은 폐허가 된 땅과 가난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 말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열왕기하 24:14)

“그러나 근위대장은, 그 땅에서 가장 가난한 백성 가운데 일부를 남겨 두어서,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열왕기하 25:12)

 

여러분!

예언자 하박국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성은 무너지고, 땅은 황폐해지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있던 곡식이나 과일은 다 빼앗기고,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던 상황에서 그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본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렇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것도 개인의 잘못이나 개인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패역함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찌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하박국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하박국은 강대국 바빌로니아나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왕을 비롯한 정치 세력에게 희망을 거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바로 그런 상황 한복판에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조건을 베푸셨기에 감사한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올리브나무에 열매가 많이 있고, 밭에서 거둘 것이 많고, 소와 양이 많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감사란 좋은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너무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주어진 조건이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감사란 모든 것이 다 잘 되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어 보이는, 절망에 사로잡힐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감사란 오로지 참된 믿음에서만 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헌금할 돈도 없었는데 토요일 저녁 늦은 시간에 농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서 통장정리를 했더니 뜻밖에도 그동안 교습소 회비를 내지 않던 학생 두 사람의 회비가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 돈으로 오늘 헌금도 내고, 점심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보잘 것 없는, 그야말로 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한 예루살렘에 남겨진 사람들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그 어느 해보다 쓸쓸하고 초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이 추수감사주일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박국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통해 참다운 믿음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