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9 년도

2009. 9. 6 / 종말의 시작 / 마태복음 24:4-14

람보 2 2015. 4. 4. 21:54

종말의 시작(2009. 9. 6)


본문) 마태복음 24:4-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이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또 너희는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난 소식과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당황하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민족이 민족을 거슬러 일어나고, 나라가 나라를 거슬러 일어날 것이며, 여기저기서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은 진통의 시작이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줄 것이며, 너희를 죽일 것이다. 또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쓴 “웃음과 망각의 책” 속에 쿤데라와 필립 로스가 남긴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필립 로스   : 세상이 곧 멸망되리라고 생각합니까?

밀란 쿤데라 : 얼마나 ‘곧’인가에 달렸죠?

로스   : 내일이나 모레라고 해두죠?

쿤데라 : 세상이 파멸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옛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로스   : 그렇다면 걱정할 게 없군요.

쿤데라 : 오히려 그 반대죠. 두려움이라는 것이 인간의 정신 속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머물러 있었다면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지구상에 생물체가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나타났던 그 수많은 생물체 중에서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생물은 인간입니다. 인간만이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죽음이 과연 모든 것의 끝인지, 아니면 죽음 너머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그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인간만이 스스로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때가 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도 맨 처음에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말한 다음에 바로 이어서 2장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인간 창조 사건의 핵심은 결국 “인간은 왜 죽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저자는 그 물음의 답은 바로 “죄”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동생을 죽인 가인도 죄의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인 자신도 자기가 지은 죄의 값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죽을 것을 겁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을 죽였을 때 그는 살인이라는 가장 끔찍한 죄를 지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당장 죽지는 않았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에도 오래 살아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도시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이기는 하지만 죽음이 죄로 나타난 첫 번째 형벌은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죄 때문에 벌을 받기는 하지만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벌을 받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을 읽어보면 가인에게 죽음의 벌이 내리기 전에 먼저 내려진 형벌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첫 번째 형벌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바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주님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창 4:13-14)


그렇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을 사로잡은 근원적인 형벌,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두려움,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죽을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근원적인 형벌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개인적인 차원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질병, 사고 등과 같은 나 개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개인의 죽음, 내 가족의 죽음, 조금 더 나아가서 일가친척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죽음을 곧 모든 것의 끝,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간 전체의 모임인 인류 역사는 어떻게 되는가? 인간 하나하나의 삶에는 끝이 있고, 마지막이 있다면 인류에게도 끝이 있고, 마지막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인류에게도 끝이 있고, 마지막이 있다면 그 마지막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을 이미 성서저자들이 하고 있었으니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들을 우리는 묵시문학이라고 부릅니다.

묵시문학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책들이 구약에서는 다니엘서와 에스겔서의 일부이고 신약에는 요한계시록 등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의 본문이 들어있는 마태복음 24-25장이 바로 묵시문학에 속하는 책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묵시문학들은 왜 나타나는가?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모든 것이 다 잘 되면, 돈도 잘 벌고,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죽어서 천당간다는 따위의 주장이 필요없습니다.

그런데 사는 것이 너무 힘들면,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 특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예를 들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거나 핍박을 당하게 되면 차라리 빨리 하나님이 오셔서 박해자들을 없애버리고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뒤집어져서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래서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묵시문학이 나타났고, 그것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들을 극심하게 박해하던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묵시문학은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랫동안의 식민지 생활과 그로 인한 박해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꺼번에 6,000명이 한꺼번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갖가지 세금으로 인한 너무나도 궁핍한 생활,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기근, 심지어는 지진이나 메뚜기떼 같은 자연재해까지 너무나 많은 어려움이 유대인들을 괴롭혔고, 그래서 차라리 세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빠져든 것이 바로 묵시문학이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하루속히 세상 끝 날이 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제자들의 질문은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종말의 때가 언제인가? 그리고 종말이 될 때 나타날 징조가 무엇인가? 그 시간과 징조만 알면 누구나 준비를 할 수 있겠지요.


예수께서는 질문을 받고 종말의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대꾸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중말의 징조에 대해서만 대답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종말의 징조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가짜 메시아 출현(4-5절), 전쟁과 기근과 지진(6-7절), 범세계적 박해와 범세계적 전도(9-14절)가 그것입니다.


첫 번째 징조는 가짜 메시아들의 출현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이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


여러분!

최근에 전라도 광주에 위대한 능력의 종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방주축복교회 담임목사라는 정바울 목사입니다. 그는 미국, 호주,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집회를 하느라고 몹시도 바쁘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이 선전하는 말, “우리 목사님은 예수님의 능력 98%를 받아서 행한다.”


그는 집회 때마다 모세처럼 막대기를 휘두르고, 엘리야처럼 보자기를 휘두르며 사람들에게 “엘리야의 능력을 주겠다”고 외치고, 바울처럼 쓰러진 사람들 위에 손수건을 얹어서 고친다고 큰소리칩니다. 심지어 그가 컵에 담긴 물을 향해 ‘포도주가 될찌어다’라고 외치는 장면까지 동영상에 찍혀 있었습니다. 이제 정바울 목사가 다음으로 주장할 것은 하나 남아있지요. 자기가 재림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과천에 근거지를 두고 한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는 자칭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자칭 예수 메시아가 우리나라에 무려 4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말세의 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징조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입니다. 솔직히 인류 역사상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없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기원 1세기 때만 보아도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글라우디오 황제 때인 46-48년, 로마 제국 거의 전역에 극심한 기근이 들었음을 사도행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61년에는 소아시아에 지진이 일어났고, 63년에는 그 유명한 대지진이 폼페이 시에서 일어나 도시 전체가 화산재로 파묻히는 엄청난 재앙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이것이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갖가지 재앙들은 이제 종말이 가까이 온 징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 징조는 범세계적인 박해와 범세계적인 전도였습니다. 예수께서도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제자들도 끊임없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 퍼져 나갔고, 그들에 의해 복음이 당시 세계의 끝, 스페인이나 영국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것 역시 종말의 징조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나타나는 멸망의 징조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동체 안에서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10-12절에 나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덩치는 커졌는데 서로 걸려 넘어지고, 서로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잘못된 복음으로, 헛된 진리로 홀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궁극적으로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게 되는데 그것이 종말이 가까웠음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끝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외부의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요인 즉 사랑의 소멸로 인해 올 것입니다. 결국 서로 사랑하지 않는 공동체는 곧 멸망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란 교리적으로 잘못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 자들이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수많은 신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구절입니다.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곧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 세상을 바르게 사는 길은 우리에게 마지막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공동체도 그렇고, 인류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넘어서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지막까지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