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 / 1983. 4. 24 (동속 주관예배)
우선 찬송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또한 들은 시편 23편은 히브리 성문학(聖文學)의 최고봉이라 불리우는 아름다운 시편으로서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이 작곡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운영 선생 작곡의 이 노래가 세계의 내노라 하는 작곡가들의 작품보다 우리에게는 더 아름답고 예술적이며 종교적인 작품으로 들립니다. 작곡가 나운영 선생은 이 노래를 단 ‘3분만에’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계시하신 하늘의 음악이라고까지 평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23편은 아직 우리 개신교 찬송가에는 안 들어 있지만 카톨릭에서 발행한 ‘새전례카톨릭성가집’에는 102장에 ‘야훼는 나의 목자’란 제목으로 실려 있고 많은 복음 성가집에 실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 등 여러나라 말로 번역되어 많은 외국인들도 애창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저는 오늘 이 노래를 해설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속주관예배에서 설교를 하면서 바로 이러한 찬송이 동속에 속해 있는 속도원 여러 분과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니
내가 내가 여호와 전에
영원토록 영원토록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아멘.
많은 성서의 주석가들은 이 시편이 다윗이 왕이 되어 아무 부족함이 없을 때, 아니 사실은 왕으로써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의견이 일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왕이라고 해도 요즘 우리들이 조 oo라는 사람 때문에 이름을 알게 된 갖가지 보석이나 귀중품은 구경도 못했겠지 만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의 생애라는 것이 부귀 영화로만 가득찬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어릴 때부터 목동으로써 들판에서 찬 이슬을 맞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찾아 왔을 때에도 그의 형들은 전부 다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었지만 가장 귀여움을 받아야 할 막내 다윗은 오히려 들판에 가 있어야 했습니다. 밤에는 추위에 떨어야 했고, 낮에는 뜨거운 햇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나운 짐승이 혹시 양을 물어가지나 않을까 살펴야 했고 무서운 짐승이 나타날 때 들고 싸울 무기라고는 막대기와 돌팔매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드디어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블레셋 민족과의 싸움에서 사울왕의 군사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 거인 골리앗이 두 얼굴의 사나이같이 무서운 힘을 과시하고 있을 때 조그만 소년 다윗이 돌팔매질로 그를 쓰러뜨리고 승리를 차지합니다. 이로써 그는 왕의 신임을 얻고 일약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게다가 왕의 딸을 부인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자기를 총애하던 왕이 순식간에 자기를 죽이려고 기를 쓰는 원수로 변합니다. 왕의 손에 죽을 뻔한 일도 겪고 계속해서 도망다니는 방랑자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울왕은 계속 군대를 풀어 다윗을 죽이려 하고 결국 다윗은 모압 땅으로 도망하고 마지막에는 적국인 블레셋으로까지 도망하게 됩니다. 다윗의 운명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입에 침을 흘리면서 미친 짓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드디어 불행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던 사울왕은 죽고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다윗의 도성을 삼고 마침내 북쪽 이스라엘의 왕도 되었습니다. 탁월한 전략가요, 군사 지휘관이요, 조직가였던 다윗은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그리고 더 나아가 암몬, 에돔, 모압, 아람, 블레셋 등 주변의 모든 민족을 지배하는 당시 세계 최대의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애굽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지역의 명실상부한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걸 지배하고 마음대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의 눈에 밧세바라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뛰었습니다. 그래서는 그만 욕심에 그의 남편을 전쟁에서 죽게 하고는 데려다가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못할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왕인데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게 왕인데 그게 뭐 대단한 일입니까? 뭐라 그러면 입을 콱 틀어막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지도자가 역사상에 한 둘 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웬 늙은이 하나가 오더니 임금에게 맞대 놓고 “잘못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고” 삿대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좀 조용히 넘어가지, 죽자 사자 고생해서 왕이 되고, 이제 좀 재미를 볼까하는데 떠들어 대니 어디 임금 노릇 해 먹겠습니까?
그뿐입니까? 이번에는 또 아들 압살롬이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요단강을 넘어 도망을 해야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세력을 도로 찾기는 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도니야와 솔로몬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싸우고 결국은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비록 역대기상 29:28에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라고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다윗의 일생은 결코 편안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여기에서 시편 23편을 기억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 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그는 자기가 양치는 목자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이 양들을 잘 먹이기 위해 얼마나 애 쓰는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그런 목자이심을 고백합니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이 자기의 죄를 꾸짖을 때 곧 뉘우치고 눈물이 침상을 적실만큼 흐르도록 통회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다윗을 소생시키는 눈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사울 임금이 그를 죽이려고 기를 쓰고 따라 다닐 때 끝내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오히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수많은 어려움, 죽음의 위기 속에서, 자식들의 배반과 자식들끼리의 싸움이라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 지내왔으면서도 그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결코 시련이 없을 것이라거나 슬픔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 바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것을 믿기에,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에,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당신의 집에서 나가라고 내모실 분이 아니시기에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동속에 속해 있는 속도 여러분.
저보다 다들 연세도 높으시고 신앙생활도 오래하신 분들께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움이 왔을 때 다윗의 이 위대한 찬송을 기억하십시다. 비록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 해도 어려움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우리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마십시다. 세상적인 모든 희망과 기쁨이 사라졌을 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고 하는 이 다짐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이 성전, 그리고 새로 지을 성전을 우리 모두 함께 영원히 거하리라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사랑이 가득 찬 성전으로 만드십시다.
저는 이제 우리 주님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오늘 아침 세례식에 동참하신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러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시 23 / 1983. 4. 24 (동속 주관예배)
우선 찬송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또한 들은 시편 23편은 히브리 성문학(聖文學)의 최고봉이라 불리우는 아름다운 시편으로서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이 작곡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운영 선생 작곡의 이 노래가 세계의 내노라 하는 작곡가들의 작품보다 우리에게는 더 아름답고 예술적이며 종교적인 작품으로 들립니다. 작곡가 나운영 선생은 이 노래를 단 ‘3분만에’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계시하신 하늘의 음악이라고까지 평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23편은 아직 우리 개신교 찬송가에는 안 들어 있지만 카톨릭에서 발행한 ‘새전례카톨릭성가집’에는 102장에 ‘야훼는 나의 목자’란 제목으로 실려 있고 많은 복음 성가집에 실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어, 독일어, 불어, 중국어, 일본어 등 여러나라 말로 번역되어 많은 외국인들도 애창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저는 오늘 이 노래를 해설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속주관예배에서 설교를 하면서 바로 이러한 찬송이 동속에 속해 있는 속도원 여러 분과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니
내가 내가 여호와 전에
영원토록 영원토록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아멘.
많은 성서의 주석가들은 이 시편이 다윗이 왕이 되어 아무 부족함이 없을 때, 아니 사실은 왕으로써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의견이 일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왕이라고 해도 요즘 우리들이 조 oo라는 사람 때문에 이름을 알게 된 갖가지 보석이나 귀중품은 구경도 못했겠지 만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의 생애라는 것이 부귀 영화로만 가득찬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어릴 때부터 목동으로써 들판에서 찬 이슬을 맞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찾아 왔을 때에도 그의 형들은 전부 다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었지만 가장 귀여움을 받아야 할 막내 다윗은 오히려 들판에 가 있어야 했습니다. 밤에는 추위에 떨어야 했고, 낮에는 뜨거운 햇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나운 짐승이 혹시 양을 물어가지나 않을까 살펴야 했고 무서운 짐승이 나타날 때 들고 싸울 무기라고는 막대기와 돌팔매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드디어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블레셋 민족과의 싸움에서 사울왕의 군사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 거인 골리앗이 두 얼굴의 사나이같이 무서운 힘을 과시하고 있을 때 조그만 소년 다윗이 돌팔매질로 그를 쓰러뜨리고 승리를 차지합니다. 이로써 그는 왕의 신임을 얻고 일약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게다가 왕의 딸을 부인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자기를 총애하던 왕이 순식간에 자기를 죽이려고 기를 쓰는 원수로 변합니다. 왕의 손에 죽을 뻔한 일도 겪고 계속해서 도망다니는 방랑자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울왕은 계속 군대를 풀어 다윗을 죽이려 하고 결국 다윗은 모압 땅으로 도망하고 마지막에는 적국인 블레셋으로까지 도망하게 됩니다. 다윗의 운명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입에 침을 흘리면서 미친 짓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드디어 불행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던 사울왕은 죽고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다윗의 도성을 삼고 마침내 북쪽 이스라엘의 왕도 되었습니다. 탁월한 전략가요, 군사 지휘관이요, 조직가였던 다윗은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그리고 더 나아가 암몬, 에돔, 모압, 아람, 블레셋 등 주변의 모든 민족을 지배하는 당시 세계 최대의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애굽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지역의 명실상부한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걸 지배하고 마음대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의 눈에 밧세바라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뛰었습니다. 그래서는 그만 욕심에 그의 남편을 전쟁에서 죽게 하고는 데려다가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는 못할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왕인데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게 왕인데 그게 뭐 대단한 일입니까? 뭐라 그러면 입을 콱 틀어막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지도자가 역사상에 한 둘 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웬 늙은이 하나가 오더니 임금에게 맞대 놓고 “잘못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고” 삿대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좀 조용히 넘어가지, 죽자 사자 고생해서 왕이 되고, 이제 좀 재미를 볼까하는데 떠들어 대니 어디 임금 노릇 해 먹겠습니까?
그뿐입니까? 이번에는 또 아들 압살롬이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요단강을 넘어 도망을 해야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세력을 도로 찾기는 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도니야와 솔로몬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싸우고 결국은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비록 역대기상 29:28에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라고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다윗의 일생은 결코 편안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여기에서 시편 23편을 기억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 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그는 자기가 양치는 목자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목자들이 양들을 잘 먹이기 위해 얼마나 애 쓰는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그런 목자이심을 고백합니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이 자기의 죄를 꾸짖을 때 곧 뉘우치고 눈물이 침상을 적실만큼 흐르도록 통회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다윗을 소생시키는 눈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사울 임금이 그를 죽이려고 기를 쓰고 따라 다닐 때 끝내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오히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수많은 어려움, 죽음의 위기 속에서, 자식들의 배반과 자식들끼리의 싸움이라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 지내왔으면서도 그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결코 시련이 없을 것이라거나 슬픔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 바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는 것을 믿기에,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에,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당신의 집에서 나가라고 내모실 분이 아니시기에 기쁨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동속에 속해 있는 속도 여러분.
저보다 다들 연세도 높으시고 신앙생활도 오래하신 분들께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움이 왔을 때 다윗의 이 위대한 찬송을 기억하십시다. 비록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 해도 어려움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우리의 목자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잊지 마십시다. 세상적인 모든 희망과 기쁨이 사라졌을 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고 하는 이 다짐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이 성전, 그리고 새로 지을 성전을 우리 모두 함께 영원히 거하리라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사랑이 가득 찬 성전으로 만드십시다.
저는 이제 우리 주님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오늘 아침 세례식에 동참하신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러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실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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