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 년도

1983. 5. / 카인의 후예 / 창세기 4:1-16

람보 2 2015. 3. 5. 15:52

카인의 후예 (1983.5 )

카인의 후예

창 4:1-16 / 1983.5

오늘은 우리 교회가 야외예배로 나가는 날입니다. 어른들로부터 유치부 아이들까지 모두가 어울려 함께 기쁘게 지내고자 여러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와서 1부 예배에 참석하고 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은 물론 다 사정이 있으시겠지만 모처럼 맞이하는 야외예배에도 못 가실 정도로 바쁘신 분들이라고 생각하니 “좀 안됐다”는 미안한 마음이 생깁니다.

5월은 가정의 달, 그리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아마 여기 앉아계신 우리 모두는 5월에는 좀 좋은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어린이날을 보냈고, 이제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는 저의 마음에는 지난 4월이 너무나 잔인했던 달이었음이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던 두 가지 사건을 기억합니다.

첫 번째 사건, 그것은 서른아홉 살 먹은 한 남자의 탈주 사건입니다. 주로 고관대작의 집만 털던 그는 우리에게 다이아몬드 하나의 값이 1억 원이 더 된다든가 여자용 파텍 시계는 하나에 2,100만 원 쯤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며칠을 피해 다니던 그는 소위 “대도”라는 말이 무색하게 멀리 도망도 못 가고 잡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큰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4월이 진정 “잔인한 달”임을 보여 준 것은 공교롭게도 조세형과 똑같은 39살의 한 여인이었습니다.

10여년이나 함께 살아왔고 자식까지 둔 부인이 남편에게 독약을 먹여 죽게 한 사건, 그것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설득하여 아버지를 죽이는 일에 가담시키고 세 차례에 걸친 예행연습까지 시킨 엄마, 사건의 수사방향을 어지럽히기 위하여 협박편지까지 써서 몰래 갖다 놓을 수 있었던 여인, 아니 자기의 범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남편이 독살 된 후 자기에게 돌아올 의심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 그것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세 차례의 살인 연습까지 했던 여인.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돈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남편을 죽일 수 있는가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모든 신문, 방송은 일제히 가정의 위기, 파탄을 말하고 이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는 이야기들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관심은 범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고, 그녀의 인간성이 어떻고, 돈을 벌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를 다루었으며 그녀와 인터뷰하기 위해 각 방송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현대의 불행은 결국 “돈”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보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살벌한가?”
“우리들이 사는 이 사회는 과연 희망이 있는가?”
하는 생각들이 저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사람들이 너무 그 여인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 여인이 아닌 남편에게 관심이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먹고 살려고 애쓰다가 부인의 손에, 아니 부인과 사랑하는 아들의 공모에 의해 죽어간 남편 염필수, 그의 죽음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묻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들을 하면서 저는 성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오늘의 본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저는 오늘의 본문에서 바로 오늘의 현실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범죄하여 낙원에서 쫓겨난 후 낳은 두 아들, 카인과 아벨. 그들은 분명히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뜻밖에도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 둘밖에 없는 형제 사이에 일어난 살인사건,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사건이었으며 불행하게도 그것은 남이 아닌 바로 친형제에 의한 살인이었습니다.

도대체 카인은 아벨을 왜 죽였는가요?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카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반기시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가 났다고 성서는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던가요? 비록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책 11장 4절에서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은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오늘의 본문만으로는 사실 그 이유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구약학자들에 따르면 이 부분은 다음 두 가지로 주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형 카인은 농경민이고 동생 아벨은 유목민이라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카인은 밭을 가는 농민이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다는 2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하나님은 유목민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모세가 그렇고, 이스라엘 민족은 사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아니라 양떼를 끌고 다니는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목민인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 몇 천 년 전인 고대 사회에서 형은 곧 지배계급, 동생은 피지배계급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형은 상속권을 가지고, 힘으로 남을 억압할 수 있는 특권층을 상징하고, 동생은 가진 것 없고 지배층으로부터 끊임없이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불행한, 무력한 백성들을 상징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성서의 하나님은 지배층의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억압당하는 불쌍한 백성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많이 나오는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단어,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라 할 때의 그 “히브리”라는 단어는 최근의 구약연구에 의해 어느 민족이 아닌 특정 사회 계층을 말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한 마디로 번역해서 “쌍놈”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이기에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것이라고 기록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둘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해석들만 가지고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성서를 보면서 저는 8절과 9절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카인이 아우 아벨을 들로 꾀어 나가 쳐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모른다고 잡아떼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바로 이 부르짖음에서 저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의 근본원인은 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상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 상실, 그 밑바닥에는 바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이 나와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사실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도 지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사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아니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바로 카인임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끔찍한 일들의 근본원인은 사실은 돈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헌금도 드리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카인은 지금도 살아있지 않는가요? 남편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고, 아무 죄 없는 자식들과 동반자살을 그렇게 쉽게 하고, 음료수에 독약을 넣어 아무나 먹고 죽으라고 내놓은 이 모든 현실은 바로 "카인의 후예“들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들 중에 누가 ”나는 남에게 약을 먹이지도 않았고, 남몰래 생명보험에도 들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카인의 후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와서도 저는 앞에서 했던 물음을 계속하게 됩니다. “부인의 손에 죽어간 남편 염필수씨, 그의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또 “형 카인의 손에 죽은 동생 아벨, 그의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물론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죽음에 대해 형 카인에게 책임을 추궁하시고, 그 죄의 댓가로 카인에게 저주를 내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미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 죽음을, 염씨의 죽음, 아벨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막을 수는 없었던가요? 물론 이 물음은 지금의 저만이 던지는 물음은 아닙니다. 일찍이 욥이 던졌고, 선지자 하박국이 던졌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던졌고, ‘침묵’의 저자 엔토 슈샤크가 던졌고, ‘순교자’의 저자 김은국이 던졌던 물음이었습니다.

이 물음, 염씨의 죽음, 그리고 아벨의 죽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물음은 바로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둔 하나님은 너무나 무기력한 분이 아닌가라는 물음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이 물음에 대해 성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는 다시 성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물건을 다 빼앗기고 반쯤 죽게 된 채 길거리에 내동댕이쳐 진 이야기, 그리고 그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 중 뜻밖에도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치료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 쉽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의 생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한 때 영광스러웠지만, 인기 좋았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하시고 죽어간 예수. 그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강도 만나 죽게 된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요?
우리들이 주님으로 믿는 예수, 그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마 26:67-68에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 뱉고 주먹으로 치고 또 어떤 자들은 뺨을 때리면서 ‘그리스도야,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하며 조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뿐인가요? “가시로 왕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오른 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하고 떠들며 조롱하고 침 뱉고 머리를 때렸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어떠하셨던가요? 무슨 일을 하셨던가요? 무슨 말을 하셨던가요?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오직 하나, 침묵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침묵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면 아벨의 죽음, 그리고 특별히 염씨의 죽음은 바로 이웃과의 단절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것으로 믿으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볼 수는 없는가요?

일찍이 “황무지”의 시인 엘리오트가 예언한 대로 저 “대낮에도 망령이 통행인의 소매를 이끄는 도시”에서 “사람, 아니 찬바람에 나부끼는 종이 조각들”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 우리들. 그렇기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 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고 한탄하면서 사는 현대인들에게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는가요?

4월을 잔인한 달로 만드는 손길은 남이 아닌 바로 우리들, 그것도 예수 믿겠다고 다짐하고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손길이라고 고백하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누군가에 대한 책임 추궁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회개의 눈물이라고 하는 깨우침은 아닌가요?

저는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동생을 죽인 죄로 저주를 받은 카인, 동생은 자기 손에 죽었는데도 자기는 죽을까봐 두려워 떠는 카인, 바로 그 카인을 보호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남편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범행을 재현할 수 있고, 또 며칠 만에 쉽게 잊어버린 채 내가 손해 볼 수 없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카인의 후예들, 바로 우리들을 그래도 사랑하셔서 보호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앉아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바로 카인의 후예들이라고, 하나님 당신이 아니고는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고백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린이 날, 어버이 주일, 그리고 가정의 달을 떳떳하게 맞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고 가정의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의 주인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