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5. 11 / 그 이름에 희망을 / 마태복음 12:15-21

람보 2 2015. 4. 3. 15:50

그 이름에 희망을 / 2008. 5. 11.


본문) 마태복음 12:15-21

“그러나 예수께서 이 일을 아시고서, 거기에서 떠나셨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우선 시편 42:1-4의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니,

내가 언제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내가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면서

그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일들을

지금 내가 기억하고 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시편 42:1-4)


여러분, 보십시오.

지금 사람들이 시편 42편을 기록한 시편 기자를 향해 한껏 조롱을 퍼부으며 비웃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믿는다는 하나님이 있기는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그 시편기자를 보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음식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옛날 자기가 기쁜 감사의 노래 소리와 축제의 함성과 함께 무리들을 하나님의 집, 곧 예루살렘 성전으로 인도하면서 그 장막으로 들어가곤 했던 이들을 기억하고 가슴이 미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편기자가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42편의 저자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제사장 출신으로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많은 바빌론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그에게 묻습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제사장이었다고 하면서 네가 제사지내던 하나님이 있기는 어디 있는 거야?‘

“네가 믿는 야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희가 왜 이렇게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잡혀 왔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빌론의 이방인 무리들은 유대에서 붙잡혀 온 사람들을 향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조롱하면서 이제 우리를 위해 노래나 부르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시편 137편의 기자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시편 137:1-3)


그렇습니다.

유대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온 바빌론 사람들이 바로 그 유대인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들이 시온에서 부르던 노래를 불러서 우리의 흥을 돋우어라.”

“우리가 술 마시고 먹고 노는데 너희는 노래 부르며 우리의 기분이나 띄워라.”

결국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 돌리던 노래들을 기껏 술집에서 부르는 유행가로 만들어버리는 모욕을 행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인 바빌론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행한 일입니다.


그뿐입니까? 또 다른 이방인인 에돔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주님,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그 날에,

에돔 사람이 하던 말,

‘헐어 버려라, 헐어 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헐어 버려라.‘

하던 그 말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시편 137:7)


그렇습니다.

주위의 많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이 망하기를 빌면서 저주를 퍼부었고, 결국 바빌론에게 멸망당하여 포로로 잡혀가 조롱당하고 비웃음을 샀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인가요? 분명히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불리던 유대인들, 다윗과 솔로몬 왕의 영광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철저하게 멸망당하고 처절한 아픔을 겪게 된 것인가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지고, 거짓 예언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선포합니다.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예레미야서 5:26-31)


그렇습니다.

유대 백성들 중에는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벼락부자가 되고, 그 돈의 힘으로 세도를 부리고, 피둥피둥 살이 쪄서 살에는 윤기가 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웁니다. 또 재판관들은 고아들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의는 사라지고, 불의가 가득 차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불의가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으로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바로 예언자들이 거짓으로 예언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예언자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설교자들이니 이는 곧 설교자들이 거짓으로 설교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경험,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인간적인 생각들만을 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사장들은 그 거짓 말씀들을 따라 백성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은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때에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멸망은,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가고 조롱당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그것은 예언자들이 거짓으로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것만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으로 모두 끝난 것인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 와서 조롱당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인가? 이제 희망은 사라진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40년에 걸친 포로 생활을 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 ‘너희는 위로하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 주어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  (이사야서 40:1-2)

이제 복역기간은 끝났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서적으로 보면 ‘두 번째 출애굽’에 해당되는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만들어야 할 새로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물론 정의의 세상입니다. 불의는 사라지고 정의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결국 이제 만들어야 할 새로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가? 과연 죄인인 인간들이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들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오시는 분만이 만드실 수 있는 세상입니다. 즉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 그분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바로 그 하나님의 종을 노래합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사야서 42:1-4)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으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주신 그분은 뭇 민족에게 공의 즉 정의를 베풀 것이며, 진리로 정의를 베풀 것이며, 끝내 세상에 정의를 세울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보내셔서 이 땅에 정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유대인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모든 민족이 참여하는 나라이기에 먼 나라에 사는 이방인들도 다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은 바로 예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이 예언을 인용하여 오늘의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 준 사건으로 인해 그만 예수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 본문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그렇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럴 명분도 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말로만 끝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음먹고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죽음의 위협이 예수께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습니다. 앞뒤 문맥을 보면 이들은 대부분 아픈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고침을 받기 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여러분!

많은 무리가 병 고침을 받았다면 그들은 이제 어떤 행동을 할까요? 당연히 자기들이 살던 동네로 돌아가서 예수가 자기 병을 고쳐 주었다고 동네방네 떠들 것입니다. 더욱 많은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 속에서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17절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 그것은 바로 제가 앞에서 읽어드렸던 바로 그 이사야서 42:1-3의 말씀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해 놓은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자, 보십시오.

여기 예수께서 누구이신가 하는 놀라운 선언이 있습니다.

예수, 그는 하나님께서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하나님의 종입니다.

예수, 그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이방 사람들 즉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니 공의란 곧 바른 인생길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기에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도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도 아니하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정의가 이길 때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 정확히 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잘 들으십시오.

예수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다투거나 외침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상한 갈대라 하여 꺾지 않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해서 등불을 꺼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한 갈대를 싸매어 주고, 깜박이는 등불을 보듬어 주어 생명을 불어넣는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을 통해 정의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저는 며칠 전 ‘100분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밤 두시 반까지 꼼짝하지 않고 보았습니다. 네 사람씩 나와서 쇠고기 수입 찬반을 놓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다들 전문가들이니까 말을 잘 하더군요. 그런데 제 마음에 한 가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쇠고기 수입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 ‘확률로 보아서 광우병이 발생할 확률이 아주 낮다.’ 심지어 누구는 그런 비유를 들더군요.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돈을 찾아가다가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낮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은 광우병에 걸릴 사람이 별로 많지 않으니까 수입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 밑바탕에는 아주 무서운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우병에 걸릴 사람들은 다수를 위해서 희생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데 쇠고기가 먹고 싶으니까 미국산 쇠고기라도 사 먹는 사람들이 광우병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하나를 사랑하고, 그것을 통해 정의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쇠고기를 수입하자는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오로지 수입해서 돈 벌자는 생각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경쟁이 치열합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판단하고,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사람들을 매몰차게 내버리는 세상입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도 서슴지 않고도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했던 것과 똑같이 거짓 예언자들이 큰소리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연약한 자들은 점점 더 보호를 받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일부 교회에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정의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만이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이사야가 선포했던 것처럼, 그리고 복음서 기자가 선포했던 것처럼 이방인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입니다. 그분만이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희망을 걸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