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4. 20 / 나에게 오너라 / 마태복음 11:28-30

람보 2 2015. 4. 3. 15:43

나에게 오너라 / 2008. 4. 20.


본문)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사실 오늘의 본문은 성경구절들 가운데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가지고 하는 설교들은 대부분 그 내용이 비슷합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 편해지고,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 설교들을 읽거나 들으면서 한 가지 물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 이야기가 그런 정도의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여기 왜 예수께서 ‘내 멍에는 메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셨을까? 만약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면 예수께서 ‘내게로 오면 멍에도 지지 않고, 짐도 지지 않는다’라고 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린 대로 저는 복음서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풀어가고 있는데 만일에 그런 설교를 해 버린다면 오늘의 본문과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제가 놓치게 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게 예수 믿으면 복 받고 편하게 잘 살 것이라는 뜻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의 본문의 뜻을 찾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구약 예레미야서 27장 1-4절의 말씀을 읽어드리고 오늘의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에,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무 멍에들을 만들어 밧줄을 달고, 그 멍에들을 네 목으로 매어다가, 지금 유다 왕 시드기야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와 있는 사절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것들을 에돔 왕과 모압 왕과 암몬 사람의 왕과 두로 왕과 시돈 왕에게로 보내어라. 너는 또 그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여, 각자 상전에게 전하게 하여라.’ “


때는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 시드기야가 누구인가요? 바로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이요, 바로 그가 나라를 다스린 지 11년 만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맙니다.

바로 그 시드기야 왕이 즉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나무 멍에들을 여러 개 만들어서 밧줄을 달고, 그 멍에들을 목에 매어다가, 예루살렘에 와 있던 나라의 사절들을 통해 주변 나라 여러 왕들에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은 공연히 큰소리치면서 바빌로니아에게 저항할 생각하지 말고 바빌로니아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나무 멍에를 메는 심정으로 느부갓네살 왕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처벌해서라도, 그들을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멸망당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만들라고 하신 나무 멍에는 바빌로니아를 섬기는 표시입니다.


물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예언했고, 그래서 여러 왕들에게 멍에를 보내고, 또 멍에 하나는 자기 목에 메고 시드기야 왕 앞에 나아가 선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이렇게 멍에를 메고 있는 것처럼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겨서 살아남도록 하십시오.”

그러니까 바빌로니아 왕에게 공연히 대항했다가 멸망당하지 말고, 그에게 항복하고 그를 섬김으로써 살아남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왕과 모든 신하들, 제사장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모욕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그때 만든 나무 멍에를 계속 목에다 메고 끊임없이 말씀을 선포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중 예언자 중 하나였던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예언은 틀렸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꺾어 버리시겠다고, 즉 바빌로니아를 물리치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빼앗아 꺾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예레미야서 28:13-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언자 하나냐가 예언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빼앗아 꺾어 버린 뒤에,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너는 나무로 만든 멍에를 꺾어 버렸으나, 오히려 그 대신에 쇠로 멍에를 만들고 말았다. 진실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이 모든 민족의 목에 쇠로 만든 멍에를 메워 놓고,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수밖에 없다. 나는 심지어 들짐승도 그에게 넘겨주었다.‘ “ (예레미야서 28:13-14)


자,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요? 나무로 만든 멍에는 무엇이고, 쇠로 만든 멍에는 무엇인가요?

유다 백성은 원래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갔고, 우상숭배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채찍으로 치셨는데 그것이 먼저 앗시리아를 통해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것을 보고 남왕국 유다만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을 배반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바빌로니아를 도구로 삼아 남왕국 유다를 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것도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게 하고 그것을 통해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즉 바빌로니아 왕이 주는 멍에를 메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무로 만든 멍에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이 그 멍에를 거부했기에, 그래서 이제 아주 철저하게 멸망당하고, 또 오랫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겠기에 그것은 마치 쇠로 만든 멍에와 같이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주는 일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무 멍에만 메면 될 것이 말을 듣지 않았기에 쇠로 만든 멍에를 메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일렀다.

가던 길을 멈추어서 살펴보고,

옛길이 어딘지,

가장 좋은 길이 어딘지 물어 보고,

그 길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평안히 쉴 곳을 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그 길로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예레미야서 6:16)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와 평안히 쉴 곳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로 가지 않고 끝내 멸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후, 즉 나라의 멸망으로 포로생활을 하게 된 이후 유다 백성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이 잘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새삼스럽게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은 길,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와서 고국으로 돌아갈 날은 기약이 없고, 더 이상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도 없고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책으로 전해지던 율법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가르치고, 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안식일법과 정결예법을 중심으로 한 율법이 유대인들의 삶의 전부이자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빌론 포로기를 계기로 유대교가 생겨났고, 그 핵심은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 오경에서 찾아낸 하나님의 명령이 모두 613가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도 613가지 율법조항을 다 지키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그것을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율법으로는 완전하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제 세월이 흘러 예수님 당시에 이르게 되었을 때 유다 백성들은 두 가지 멍에를 메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멍에요, 또 하나는 로마제국의 지배라는 멍에였습니다.


율법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암 하레츠’라고 불리던 일반 백성들은, 성경에 나오는 무리들은 도무지 613가지나 되는 율법조항들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좌절과 절망에 이르는 길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요구하는 율법 준수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는지 다음 주에 보게 될 12:1-8절 그리고 12:9-14절에 나오는 사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쁨으로 지키며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야 할 율법이 오히려 어깨를 짓누르고,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드는 짐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멍에입니다.


로마제국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식민 지배를 하는 로마 당국과 군인들로부터 당하는 억압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당국에 엄청난 세금을 물어야 했고, 강제노역을 해야 했고, 로마제국에 저항해서 싸웠다가는 붙잡혀서 십자가 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한 번에 무려 5,000명이 십자가형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야말로 유대인들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었고, 멍에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백성들은 율법의 멍에도 메야 했고, 로마의 멍에도 메야 했습니다. 그것들이 당시 백성들의 어깨를 한없이 누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의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 가지 멍에를 메고 삶에 지쳐 쓰러져가는 백성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무거운 짐을 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율법의 짐, 로마제국의 짐을 지고 사느라 삶에 지치고 나날의 긴장으로 지친 사람들은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멍에를 내려놓고 그 대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한테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니 왜냐하면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주님의 멍에는 무엇이고, 주님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편하고 가볍다는 말입니까?


우선 율법의 멍에는 613가지나 되는 율법조항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613가지 모두를 다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그중 하나라도 어기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겁을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해 놓고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 (마태복음 23:1-4)

    


여러분, 사실 그들이 요구하는 짐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일반백성들이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613가지가 무엇인지 다 외울 수도 없었고, 따라서 당연히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613가지나 되는 계명들을 단 두 가지로 정리하셨으니 황금률과 사랑의 이중계명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태복음 7:12)

“그들 가운데 율법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 22:35-40)


그렇습니다.

율법조항 613가지를 다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나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본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의 멍에입니다. 즉 주님의 멍에란 한 마디로 사랑의 멍에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면 힘이 들지만 내가 좋아서 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기꺼이, 가볍게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사랑의 멍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메라고 하시는 주님의 멍에입니다.


또한 당시 많은 사람들은 로마제국이라는 멍에를 벗기 위해 무력으로 저항했습니다. 싸우고, 죽이고, 그리고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로마제국을 넘어서서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마태복음 5-7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헌법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만 참 평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제국과의 전쟁을 위한 짐은 무겁고, 세상을 피로 물들이지만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지는 짐은 가볍고 편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예수의 짐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요, 주님의 짐은 희생의 짐이기에 그것은 편하고, 가벼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로 오면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님께서 보내시는 초대장입니다. 율법의 멍에를 지고, 세상 권력의 짐을 지고 눈앞의 현실에 지쳐 쓰러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라고 부르시는 초대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오너라. 나와 함께 사랑의 멍에를 메고, 희생의 짐을 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