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일 / 2008. 5. 4
본문) 마태복음 12:9-14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네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이 모두 다섯 번인데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다섯 번 전부 다 병자들을 고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수십 가지 되는데 이상하게 안식일에 행하신 기적들은 다 병자들을 고치신 것들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만 행하셨을까 라는 물음을 저는 해 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이 첫 번째인데 이것과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3:1-6, 누가복음 6:6-1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사건이 두 개,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사건이 두 개, 그래서 합해서 다섯 개입니다.
등 굽은 여자를 고치신 사건(누가복음 13:10-17).
수종병 앓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누가복음 14:1-6).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요한복음 5:1-18).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신 사건(요한복음 9:1-34).
그런데 여러분!
그 다섯 군데의 본문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아주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실 때 반드시 그 옆에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러한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맆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느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선 누가복음 13;10 이하에 나오는 등 굽은 여자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누가복음 13:10-13)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녀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병마에서 풀려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14절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였다, 즉 몹시 화를 내었다고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차마 예수님께 덤비지는 못하고 둘러선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였습니다. 쓸데없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지 말고, 다른 날에 고치라는 것이니 이는 물론 예수님 들으라고 한 소리이지요.
14:1부터 보면 예수께서 수종병 앓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앞에 수종병 환자가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하필이면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많은 바리새인들이 거기 들어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한결같이 언짢은 눈으로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와중에 예수 앞에 수종병 환자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나 안 고쳐주나 보자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예수께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당연합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잠잠하였다”라고 누가복음 기자는 기록합니다. 마음이 꽁해져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께서 그 병자를 손으로 잡아서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무려 38년이나 중풍병을 앓았던 환자를 고치셨다는 유명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 . . .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가 한 사람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워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요한복음 5:1-3, 5-9)
자, 38년 동안 병을 앓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셨으니 당연히 그를 고쳐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신 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습니다. 아니 38년 된 병자라면 하루 이틀 더 있는다고 해서 큰일 날 것도 아닌데 그 하루를 참지 못하고 고쳐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지켜본 유대 사람들이 그 병이 나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그러니까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38년 된 환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셨다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는데,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 질문은 물론 당시 사람들, 특히 율법에 정통했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무언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본인이나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누군가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부인하셨습니다.
“아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번에도 하필 그 사건이 일어난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또다시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내가 눈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복음 9:14-15)
이때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아니 사실은 대다수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날이 안식일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복음서에 나오는 다섯 가지 사건, 즉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의 결정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리새파 사람들도 와 있었는데 오늘의 본문에는 다른 사건 때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네 가지 사건은 그것을 통해 예수를 고발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시비를 걸기는 했지만 그것이 법적인 문제로 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고발하려고 일부러 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문제를 삼기 위해서 일부러 물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벼르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께 일부러 도전을 감행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틀림없이 병자를 고쳐주실 줄 알고 일부러 도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기준은 오직 하나, 율법을 문자대로 지키느냐 아니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어떤 행위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을 살리느냐 아니냐 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관심은 오직 하나, ‘그 행동이 옳은 일이냐, 아니냐’ 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런 다음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런데 보십시오. 그가 손을 내미니, 다른 손과 같이 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로 양을 치는 유목민들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양은 가장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이라는 짐승이 자기들 마음대로 풀을 찾아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지역이 원래 석회암 지대이기 때문에 군데군데 구덩이가 많습니다. 거기에 양들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빠지면 구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일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습니다. 꺼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그러다 결국 두 가지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 양이 먹을 양식을 구덩이에 넣어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안식일이 지나면 양을 꺼내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그 양이 스스로 그 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받침대들을 잔뜩 넣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이 제 발로 걸어서 올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구한 것이 아니고 양이 제 발로 걸어온 것이니까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여러분!
두 가지 다 얼마나 속 보이는 짓입니까? 이왕 그 다음날 꺼내줄 거라면 하루 동안 양식을 안 준다고 해서 굶어죽을 리도 없고, 또 받침대들을 잔뜩 넣어주는 것이나 직접 들어가서 꺼내오는 것이나 뭐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지극히 형식적인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오직 문자적으로 안식일을 지켰다, 안 지켰다 에만 관심이 있고 그것만이 그들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의 기준은 오직 하나, 그 행동이 옳은 일이냐, 그른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옳은 일과 그른 일을 구분하는 기준, 그것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냐, 아니면 생명을 죽이는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안식일이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언제나 해야 하는 일이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면 더구나 안식일이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언제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자 하셨던 일, 일생을 두고 하신 일은 바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이라면 그 누구하고도 맞붙어 싸우셨습니다. 즉 예수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당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서,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삶의 기준을 바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두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바로 그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진실로 말하면 예수는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사탄의 졸개들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좀처럼 정치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마는 오늘은 도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제가 목회서신 란에도 간단하게 썼지만 왜 그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지 좀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그저께와 어저께, 이명박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만들어놓은 청계광장에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이명박 탄핵을 외쳤습니다. “경제를 살리겠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로 아주 쉽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고 큰소리치던 그 사람이 불과 두 달 만에 지지도가 35%로 떨어지고, 인터넷 상에 탄핵에 찬성한다고 서명한 사람이 100만 명이요, 한밤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고소영 내각, 강부자 청와대 수석, ‘어린쥐’로 상징되는 영어 몰입식 교육, 일본에 가서 보인 굴욕적인 외교 등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마는 역시 문제는 대운하와 쇠고기 수입개방입니다.
대운하는 한 마디로 5,000만 국민의 생명이 달려있는 강물 위에 배를 띄움으로써 마실 물을 원천적으로 더럽힌다는 것이요, 동시에 강바닥을 파내고, 강둑에 시멘트벽을 쌓고 산을 뚫음으로써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면 그야말로 겉잡을 수 없는 피해가 생긴답니다. 한 마디로 자연의 생명체들을 죽이고,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을 죽여서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천박한 생각의 나타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운하를 만들어서 배를 띄우면, 그래서 화물을 싣고 서울과 부산 사이를 오가게 한다면 그 배가 한 번 가는데 무려 67시간이 걸린답니다. 한 마디로 경운기보다 느리답니다.
대운하 건설은 강 주변의 땅을 사 놓은 사람들, 운하를 건설하는 업자들 이외에는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없는 일입니다.
쇠고기 수입은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미국인들도 먹지 않는 소의 모든 부위를 세계 200개 넘는 나라 가운데 오직 우리나라만 수입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지요. 이제 곧 학교급식과 군대 짬밥부터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 갈 텐데 그러면 언제, 누가 광우병에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온 백성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대통령이 하는 말, ‘안 사먹으면 될 것 아니냐?’ 이것 역시 돈만 벌 수 있다면 생명은 돌아볼 것 없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 이명박의 죄, 그것은 바로 생명을 죽여서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장로인지는 몰라도 기독교인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따라야 하는 예수님의 삶의 기준, 그것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졌던 삶의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인데 그 기준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따라 살면 그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요, 이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바로 사탄의 제자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이 기준 가지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8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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