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4. 13 / 누가 하나님을 보는가? / 마태복음 11:25-27

람보 2 2015. 4. 3. 15:41

누가 하나님을 보는가? /2008. 4. 13


본문) 마태복음 11:25-27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선택된 백성들이었던 유대인들의 마을인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을 향해 ‘너에게 화가 있다’라고 꾸짖으시며 회개하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이 많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기에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끊임없이 비난받고 멸시당하던 이방인들, 즉 시돈과 두로와 소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쉽게 견딜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는 가버나움이 하늘에 오를 것처럼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에서 한 가지 이유를 더 찾아냈으니 그들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지 않고, 제 배만 채우려 하고 자기들만 잘 먹고 잘 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주 본문에 나왔던 유대인들의 세 마을, 즉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고, 모두 다 교만했으며, 마을 주민 전체가 다 부자인데도 이웃을 돕지 않았던가 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런 것도 구분하지 않으시고 무더기로 한꺼번에 꾸짖으신 것인가요?


사실 예수께서 사시던 당시 유대인 사회는 전체적으로 지극히 가난한 사회였습니다. 2,000년 전이고 더구나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사회였으니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잘 살았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를 되돌아보면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제 어릴 때 기억 속에도 동네아이들 중에 먹을 것이 없어서 술 찌꺼기를 먹고 학교에 왔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우유나 옥수수 가루를 딱딱하게 만들어서 한 덩어리씩 주면 그건 대단히 기쁜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이 천 년 전에 식민지 사람들이 잘 살았다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굶주렸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좀 쉬고 싶으셔서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지자, 무리들이 여러 동네에서 몰려 나와서, 걸어서 예수가 있는 곳을 찾아왔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는데 무리들이 걸어서 그곳을 찾아갔다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굉장히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모두들 지치고 힘들었겠지요.

어쨌든 예수께서는 찾아온 무리들을 귀찮다 여기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시간이 흘러 저녁때가 다 되었습니다. 모두들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아침, 점심 식사도 못하고 먼 길을 걸었으니 얼마나 허기지고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면 좋겠지만 어디 그럴 형편이 되나요?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이제 날도 저물고 먹을 것도 없으니 각자 흩어져서 알아서 식사를 해결해야 하지요. 물론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준비된 음식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아니,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니요? 그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계산하지 않고 어른 남자들만 쳐서 오천 명쯤 되었는데, 그러니까 남녀노소 다 합하면 적어도 이만 명은 된다는 말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도대체 무엇으로 먹인단 말입니까? 아마 제자들은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음식을, 도시락을 싸 온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지요. 요한복음 6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요한복음 6:8-9)


물론 성경에 보면 이 사건은 해피앤딩으로 결말을 맺지만 결국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식사 한 끼 때울 수 없어서 번번이 굶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들이 무슨 수로 다른 사람들을 돕고 베풀 것이며,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고 교만을 떨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을 예수께서 모르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20-24절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심판 이야기는 결코 갈릴리 일대에 살던 그 가난하고 굶주리며 질병에 걸려 죽어가던 일반백성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세금에 시달리고, 자연재해로 고통당하고, 온갖 질병으로 신음하면서 죽지 못해 살던, 아니 그렇게 어렵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던 일반백성들을 심판하고자 했던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예수께로부터 저주받을 짓을 했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도대체 누가 재산을 쌓아두고 소돔 사람들같이 교만해져서 하늘에까지 치솟으려고 애를 썼단 말입니까? 그들은 바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사두개파 사람들 같은 종교지도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일반백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자들이었고, 배운 것이 많았고, 가진 것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시장바닥을 지나갈 때에도 가운을 입고, 어깨에 힘주고 팔자걸음 하면서 으스댔습니다. 그들이 지나가면 백성들은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그들에게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가면 맨 앞에 앉아서 보란 듯이 자기를 과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꾸짖었던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 곳곳에 나와 있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면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하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여러분!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요,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들’입니다. 물론 앞에 나오는 것은 ‘자칭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요, 뒤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은 정확히 번역하자면 ‘어리석은 사람들’, ‘어린아이 같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자칭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물론 율법을 알고 다 지킨다고 큰소리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사회의 상층부를 이룬 사람들로서 재산도 많고, 배운 것도 많아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위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않는다고 손가락질하면서 ‘암 하레츠’라고 불렀으니 이는 곧 ‘땅의 백성들’이요, 쉽게 말하면 시골뜨기들, 촌놈들, 쌍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렁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요한복음 7:49)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같이 정식학교도 나오지 않고, 율법교사도 아니고, 시골뜨기 몇 사람을 제자랍시고 데리고 다니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도 그들에게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실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 어린아이들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기에 주님 앞에 내세울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들, 그래서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스스로 지혜 있다고 큰소리치고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감추시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어린아이들과 같다고 손가락질 받는 백성들에게는 보여 주셨다.”


자, 그렇다면 누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가요?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하다고 큰소리치며 예수를 배척한 종교지도자들인가요? 아니면 어린아이들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 받지만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인가요? 답은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지극히 제한된 존재인 인간이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자기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가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삶과 말씀을 깨닫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이 땅에서 살면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께 맡기셨고, 하나님만이 예수가 당신의 아들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와 예수께서 계시해 주려는 사람들 즉 제자들이 아니면 예수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한 20년 설교를 해 오면서 꾸준히 복음서를 가지고 설교해 왔습니다. 왜 제가 그렇게 깊이 복음서에 빠져있는가? 저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으면 그분이 바로 지금 내 앞에서 행동하식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마치 제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하고,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본문을 읽노라면 그것이 바로 지금 제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감격스럽습니다. 바로 지금 성경을 읽는 제 앞에 주님의 얼굴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저는 예수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도 복음서에 집착하다시피 읽고, 강해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복음서를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바로 그분을 증거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하나님을 보는가요?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만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보다는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그분의 삶에 훨씬 더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사셨고,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저의 관심은 모아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지, 어떤 생각을 하라고 하시는지,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시는지 하는 데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예수를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의 모습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도 말씀을 통해 예수를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그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