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3. 30 / 둘 다 배척하다 / 마태복음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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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배척하다/ 2008. 3. 30.


본문) 마태복음 11:16-19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우리가 지난 두 주에 걸쳐 살펴보았던 11:2-14절까지의 말씀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질문을 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예수가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예수가 던지고 답을 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도 하늘나라이고, 예수가 선포한 것도 하늘나라이므로 결국은 같은 것을 선포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아주 똑같은 말씀이 누가복음 7:18-28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두 본문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시면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금방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예수께서 등장하셔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실 때까지 당시 유대인들이, 특히 종교지도자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가 선포했던 하늘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하늘나라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께서 선포했던 하늘나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당시 유대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도대체 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선포한 하늘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요? 오늘의 본문은 바로 거기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7:31-35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


여러분, 아이들은 장난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장난거리를 찾아냅니다. 여러분도 모두 어렸을 때 장난치던 것들이 생각나실 것입니다. 물론 지금하고 옛날하고 노는 것이 아주 다르지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딱지치기, 제기차기, 자치기 같은 것을 주로 했고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주로 했지요. 놀이터도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골목길이 그냥 놀이터였지요.

자, 예수님이 지금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제대로 된, 오늘날과 같은 놀이터가 그때는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터가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장난감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 그들의 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지금 두 편으로 갈라져서 앉아있는데 한쪽 편에 앉은 아이들이 다른 편에 앉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아이들이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하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본 아이들이 그것을 흉내 내는 놀이를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우선 결혼식놀이가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가족 전체와 마을, 그리고 손님들과 행인들에게도 음식을 베푸는 큰 축제였습니다. 보통 결혼식 때는 잔치와 노래, 춤이 계속해서 일주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결혼식 날 신부는 머리와 드레스를 덮는 긴 면사포를 쓰고, 신부의 친구들은 띠로 신부의 겉옷 주위를 묶습니다. 그리고 행렬은 연주자들을 선두로 하여 신랑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남자들은 음악에 맞추어 앞으로 나가면서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전문적으로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피리를 불면 거기 모인 하객들은 거기에 맞춰 춤을 추면서 결혼을 축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것을 흉내 내어 결혼식 놀이를 하는데 한쪽에서 아이들이 피리를 불면 다른 쪽 아이들은 거기에 맞춰 춤을 추면서 노는 것입니다.


이제 장례식 놀이가 있습니다. 먼저 장례식을 살펴봅시다. 유대인들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숨을 거두면 그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을 찢고, 이어 굵은 삼베로 허리를 묶고 재나 흙을 머리에 뿌렸습니다. 이것은 죽은 이에 대한 슬픔과 그 마음의 아픔이 극심하다는 의식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본격적으로 장례가 시작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신 앞에서 가족이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곡소리는 아주 커야 했는데 이는 마을 사람들이 그 곡소리를 듣고서 초상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전문적으로 곡소리를 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전문적으로 크게 곡을 하면 가족들은 거기에 맞추어 가슴을 치며 울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것을 흉내 내어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 한쪽에서 아이들이 곡을 하면 다른 쪽 아이들은 거기에 맞추어 가슴을 치고 울면서 노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놀이를 하지 않고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자, 여러분!

누가 잘못한 것입니까? 피리를 불고 곡을 한 아이들입니까? 아니면 거기에 맞춰 춤을 추지 않고, 울지 않은 아이들입니까? 분명히 16-17절만 보면 후자 즉 피리와 곡에 맞춰 춤추지 않고 울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한쪽에서 피리를 불고 곡을 하는데 거기에 맞추어서 춤추지 않았고, 울지 않았으니 야단을 맞아도 싼 형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요?


예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여러분,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아이들이 노는 이야기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여러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는 귀신이 들렸다. 그러니까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도 비난하고, 예수님도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회개의 설교도 자기들에게 맞지 않는다고 거부했고, 예수께서 선포했던 기쁜 소식의 설교도 자기들에게 맞지 않는다고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요한은 금식한다고 해서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고, 유대인들은 죄인들과의 엄격한 격리를 요구하는데 예수는 세리들과 식탁을 같이 한다고 해서 배척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도 비판하고, 예수도 비판하면서 자기들만 옳다고, 무조건 자기들만 따르라고 주장하는 아이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상대방을 향해 춤추지 않고 울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그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피리소리에 맞춰 춤추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자기들의 곡소리에 맞춰 울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이 지배욕에 가득차고 다투기 잘하는 아이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 편리한 대로, 자기들 유리한 대로 율법을 해석해 놓고는 세례 요한의 설교도 거기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예수의 설교도 거기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던 것입니다.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둘 다 배척했기에 그들은 자기들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16절과 17절만 보면 따라하지 않는 그 아이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들은 편한 자리에 앉아서 자기들을 따라 하지 않는다고,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그들을 예수께서 비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피리를 불고 곡을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피리 부는 흉내만 내면 되고, 또 가만히 앉아서 ‘아이고, 아이고’ 소리만 내면 됩니다. 우리의 전통장례식장에서도 소리만 내어 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춤을 추는 것이나 가슴을 치며 우는 것은 직접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고, 가슴을 치면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어느 것이 더 쉬운 것인가요? 그러니까 자기들은 편한 일을 하고, 남들은 어려운 일을 시키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꾸짖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요한과 예수에 대한 그들의 비난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살펴봅시다. 우선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한다.”


여러분!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요? 아닙니다. 분명히 요한은 음식도 먹었고, 물도 마셨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채 살 수 있나요? 분명히 마태복음 3:4에 나와 있듯이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물은 기록하지 않아도 당연히 마시는 것이니까 기록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분명히 희랍어 성경에는 ‘메뚜기와 야생 꿀’로 나오는데, 고대의 한 히브리어로 된 마태복음 판본에서는 ‘메뚜기’라는 것이 그와 발음이 비슷한 히브리어 단어를 잘못 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희랍어로 메뚜기를 akris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egkri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막에서 나는 식물로 만든 일종의 빵으로서, 모세의 시절에 고대 이스라엘 인들이 먹던 만나와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7:33에는 분명히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비난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릅니다.

우선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요한이 나실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나실인은 나면서부터 머리도 깎지 않았고, 일체의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빵’을 먹지 않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절은, 요한이 빵 대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만나와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 가공한 빵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주신 음식만 먹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포도주같이 인간이 만든 일체의 술을 먹지 않음으로써 광야에서 절제되고 금욕적이고 고독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신앙의 결단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는 비난의 실제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를 번역한 슬라브판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나무뿌리와 과일’을 먹고 살았으며, 빵을 전혀 먹지 않았고 심지어는 유월절에도 그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온갖 거룩한 척 하는 행동을 다 했으면서도 세례 요한과 같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을 향해서는 비웃고 조롱하면서 그가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여러분!

이 구절이 얼마나 무서운 비난인지 아십니까? 이 구절은 바로 신명기 21:20-21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구절입니다. 제가 18절부터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반항만 하며, 고집이 세어서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아들이 있거든, 그 부모는 그 아들을 붙잡아, 그 성읍의 장로들이 있는 성문 위의 회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우리의 아들이 반항만 하고, 고집이 세어서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방탕한데다가 술만 마십니다’ 하고 호소하십시오.” (신명기 21:18-20)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반항만 하고, 고집이 세어서 말을 듣지 않고, 방탕한데다가 술만 마신다면 어떻게 하느냐? 21절에 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당신들 가운데 악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이스라엘이 그 일을 듣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술을 많이 먹으면 돌로 쳐 죽인 것이지요. 여기 지금 가슴 찔리는 사람들 있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를 향해 돌로 쳐 죽일 자식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들은 율법도 다 지키고,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거룩하게 살고 있는데 예수는 마구 먹어대고 포도주 마시기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사는 자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돌로 쳐 죽일 자식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실은 자기들끼리 어울려서는 실컷 먹어대고 포도주 마시기를 즐기면서,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면서, 겉은 거룩한 것 같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고,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세례 요한과 같은 경건과 절제의 길을 걷지 않았고, 예수님과 같이 참된 사랑과 자비의 길도 걷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한과 예수를 향해 비난만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은 요한과 예수, 둘 다 배척했던 것입니다.


물론 요한과 예수, 두 분 다 배척받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요한은 참수당해 죽었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 다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한 일, 한 행동으로 누가 옳은지, 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요한처럼 경건하게 살든지, 아니면 예수처럼 사랑의 삶을 살든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이 땅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과연 세례 요한이나 예수의 길을 걷고 있다고 인정하실까요? 아니면 요한이나 예수를 다 배척하면서도 말로만 내가 예수 믿는다고 큰소리치고 있다고 꾸중하실까요?

우리 모두 겉모습만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 되어서 진실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늘나라를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