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십니까? /2008. 3. 16
본문) 마태복음 11:2-6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우리가 예수를 메시아로서 중심에 놓고 성경을 읽을 때 그 앞과 뒤에 놓일 만한 인물이 하나씩 있으니 앞에는 세례 요한이 있고, 뒤에는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대로 메시아로 오실 예수를 준비하기 위해 오신 분이요, 바울은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그분의 사역을 이어받아 체계적인 전도사역을 감당함으로써 교회의 터전을 이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역할은 너무나 크고, 그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세계로 전해지는데 있어서 그야말로 초석의 역할을 한 사람이 바울이기에 그는 열 두 사도 이외에 유일하게 사도라고 불렸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는 열권이 넘는 책을 남김으로써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어떤가요? 세례 요한은 책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도 바울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했던가는 그의 이야기가 네 복음서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 졌다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아예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마가복음 1장 1-4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똑같이 3장에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길게 기록하고, 이어서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공적인 삶을 시작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기자는 똑같이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가 메시아를 예비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선구자인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5절 이하를 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400년 가까이 예언자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제 400년 만에 광야에 한 사람이 등장했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모습도 그렇고, 그의 외치는 말씀도 그렇고, 또 그가 회개를 촉구하면서 베푸는 세례도 그렇고 모두 다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누가복음 기자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누가복음 3:15)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누가복음 3:16-17)
그런데 네 복음서 중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 가장 길게 증언하고 있는 책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어보게 하였다.
그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그는 고백하였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아요?’ 요한은 ‘아니오’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하고 그들이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요한복음 1:19-23)
여러분! 잘 보십시오.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향해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리스도요? 아니면 엘리야라도 된단 말이요?” 그러나 분명히 요한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왜 세례를 주느냐고,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주느냐고, 무슨 자격으로 회개하라고 떠드느냐고 따져 묻자 요한은 전혀 엉뚱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요한복음 1:26-27)
그렇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서 1:29-34에서 참으로 놀라운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입니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9-34)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것을 알았습니다. 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복음서 모두에서 이미 세례 요한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아인 것을 아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분명히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자기 입으로 증거했고, 심지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증언했던 세례 요한이 이제 와서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자, 이제 차분히 상황 정리를 해 봅시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이때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14장 1-12절까지의 본문을 볼 때 자세하게 하기로 합시다.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즉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물어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세례 요한에게도 제자들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제자들이 있었던 것은 복음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35-3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 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안드레입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3장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제법 많았음을 보여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 살렘 근처에 있는 에논에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서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 그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요한복음 3:22-25)
그러다 그만 세례 요한이 분봉왕 헤롯에게 붙잡혀서 죽게 되는데 그때 요한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바로 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께 가서 알려 드렸다.” (마태복음 14:12)
심지어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죽고 나서 2, 30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세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세례 요한을 따르던 무리들이 제법 오랫동안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24-25 참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히 예수 중심이고 세례 요한은 예비자라고 생각하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우리가 세례 요한파라고 부를 수 있는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믿고 따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점점 쇠퇴하다가 없어졌고, 기독교는 발전을 계속해서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어쨌든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미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던 세례 요한이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예수께 묻고 있는 것인가요?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이런 물음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니 도대체 왜 세례 요한은 예수께 당신이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인가요?
이제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세례 요한은 문자 그대로 “세례를 베푸는 요한”이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요한은 왜 세례를 베풀었는가요?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의 표시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라고, 그러니 회개하라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했던 것이지요. 한 마디로 그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죄인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회개를 선포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 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마태복음 3:7-8)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관심은 오로지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기에 예수는 자기의 뒤를 이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그들이 모두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를 심판자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소개하는데 그가 소개하는 예수 역시 심판자로 오신 분이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마태복음 3:11-12)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는 심판자입니다. 자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한 심판자였습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심판자라는 말은 최후의 심판, 종말의 때의 심판이 이루어질 심판자로 오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가 자기보다 더 엄격하게, 더 확실하게 세상을 심판하고, 지옥불로 세상을 정화시킬 심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께서 정식으로 활동을 하게 되면 우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심판하실 것이고, 이어서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세례 요한은 믿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를 감옥에 집어넣은 헤롯왕과 그 주위 권력집단을 미워하고 예수께서 그들을 심판하고 자기를 구원해 줄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꾸 시간은 흐르고 자기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제자들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쓸데없는 무리들을 모아놓고 설교나 한다는데 그 내용이 이상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도무지 심판과는 관계없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병자들이나 고치고,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떠들기나 하고, 세상을 심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는데도 맞서 싸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제자들이 이러한 예수의 활동을 다 전했을 것이고, 그래서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묻게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당신이 내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기는 맞는 것이요?”
물론 예수께서는 요한이 왜 묻는지, 그것이 무슨 뜻을 가진 물음인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일을 여섯 가지로 정리하셨습니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걷는다.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듣는다. 죽은 사람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
한 마디로 구원과 복음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생명과 희망의 소식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심판하고 멸망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희망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말씀들을 인용해서 오늘의 본문을 만들었고, 동시에 마태복음 8-9장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의 사건을 정리해서 그것으로 오늘의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정리해 놓은 여섯 가지 사건들은 대부분 앞부분, 즉 8-9장에서 친히 행하신 일들입니다. 첫 번째, ‘눈 먼 사람이 보고’라는 표현은 9:27-31에 나오는 대로 예수께서 눈 먼 두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라고 되어 있는 것은 9:1-8에 나오는 중풍병 환자와 관계있습니다. 중풍에 걸리면 대개 반신불수가 되고, 그래서 누워 있다가 조금 나으면 다리를 절면서 조금씩 걷게 되지요. 예수께서 그런 사람들을 제대로 걷게 해 주셨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된 것은 8:1-4에 나오고 네 번째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말도 못하게 되니까 9:32-34에 나오는 말 못하는 사람과 관계됩니다.
다섯 번째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 9:18-26에 나오는 지도자의 딸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섯 가지 중 다섯 가지가 모두 다 예수께서 친히 행하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로 나오는 것,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는 구절은 도대체 무엇과 관계되는 것인가요? 마태복음 1-10장 어디에도 이런 구절이나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이 구절을 ‘가난한 사람은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은 죄인들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메시아의 역할이라고 보았던 데 비해서 예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세상, 곧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신 메시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진 것 없고, 권력으로부터도 멀고,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앞에 나오는 사람들, 즉 눈 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나병환자, 듣지 못하는 사람, 죽은 사람 등 모두 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어디서 치료받을 데 없고, 의지할 데 없고 그 누구로부터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당한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당신이 선포하신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세례 요한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향해서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약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즉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 그래서 희망이 없는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복음을 주고 그래서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 것, 이것이 신약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에게 잘못된 생각을 고칠 것을 요구하셨던 예수께서는 한 마디 덧붙이셨습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제 우리는, 아니 한국교회는 절실한 마음으로 물어야 합니다.
예수,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제 우리는 마음 깊이 물어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 예수는 과연 어떤 분인가?
내 인생에 있어서 예수는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인가?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희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누리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과 생명을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8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 3. 30 / 둘 다 배척하다 / 마태복음 11:16-19 (0) | 2015.04.03 |
---|---|
2008. 3. 23 / 하늘나라를 강탈한 자들 / 마태복음 11:7-15 (0) | 2015.04.03 |
2008. 3. 9 / 예수님의 대리자 / 마태복음 10:40-11:1 (0) | 2015.04.03 |
2008. 2. 17 / 분열을 통한 평화 / 마태복음 10:34-39 (0) | 2015.04.03 |
2008. 2. 10 / 두려워하지 말아라 / 마태복음 10:26-33 (0) | 201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