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가려느냐?
요한 6:60-71 / 1983. 3. 13
서기 1592년 한반도의 남쪽 끝 동래 지방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상륙했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이었습니다. 이성계의 건국이후 약 200년간 비교적 평화롭게 지내던 조선은 이로부터 약 7년간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평화가 계속 된다고 해서 아무 준비가 없던 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은 서양에서의 종교개혁 이후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유럽국가, 그 중에서도 포루투칼과 네덜란드 사람들로부터 신식무기, 즉 조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의 독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조선 침략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직전 그는 병사했고, 뒤이어 도꾸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이 권력을 쥐었습니다. 그는 소위 막부정치를 통해 전국을 지배했습니다.
이 때 일본에는 천주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천주교를 통해 서양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지배자들은 서양세력이 자기들을 위협한다고 느끼면서 박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는 바로 박해가 극에 달한 시대였습니다.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자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천주교인들이 가공할 고문과 격렬한 정신적 투쟁 후 자신의 신앙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물론 또 많은 수의 교인들이 재빨리 천주교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저버리고,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 가운데 포루투칼인 신부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던 페레이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이 본국 포르투칼에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제일 번민한 사람은 페레이라의 제자요, 페레이라를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있던 젊은 신부 로드리고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스승이 배교했으리라는 소문을 듣고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로드리고는 신앙의 횃불을 드높일 결심을 하고는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처음에는 잘 숨어 지냈으나 결국 잡혔고, 마지막에는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성화판을 짓밟을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지능적으로 천주교인들을 골라내던 이노우에는 로드리고에게 말했습니다.
“한 번만 밟아라. 그냥 밟기만 해, 마음으로만 굴복하지 않으면 되는거야.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다 이해하실거야.”
젊은 신부 로드리고는 굴복하지 않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먹을 것은 충분했고, 죽음의 위협도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다만 간신히 옆방에서 들려오는 듯 한 신음소리만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 신음소리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배교한 사제 페레이라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일본인 승려의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드리고는 배교한 스승 페레이라를 향해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나 페레이라는 옆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교를 거부한 일본인 신자들이 밧줄에 거꾸로 매어달린 채 죽어가면서 뱉어내는 신음소리였습니다. 페레이라는 말했습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다, 잘 듣게나. 이곳에 갇혀서 들은 저 소리에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신부 로드리고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고 두 귀를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페레이라의 목소리, 신도들의 신음소리는 그의 귀에 사정없이 들려왔습니다.
“그만 해 주시오, 그만 해 주시오. 주여, 당신은 이제야 말로 침묵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옳고, 선하고, 사랑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있다는 것을 이 세상과 인간들에게 명시하기 위해서도 무슨 말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는가? 저들의 신음소리가 계속 되고 있는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침묵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번민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젊은 사제 로드리고는 하나님의 침묵에 견딜 수 없었고, 그러기에 그도 끝내 배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일본의 카톨릭 작가인 엔도오 슈사쿠가 그의 소설 “침묵”에서 묻고 있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자기를 향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 가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침묵할 수 있는가? 자기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분이 아닌가요?
제 1차 대전이 끝나고 불과 20년이 지난 1930년대 말기 유럽은 또 다시 전쟁의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조국 독일, 위대한 민족 게르만을 내세운 히틀러에 의해 드디어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세계를 지배할 민족은 게르만과 유대인 밖에 없다고 하면서 광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우슈비츠 등지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 가운데에는 신학자인 비이젤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밤(night)"라는 책에 남겨 놓았습니다.
"비밀경찰 게쉬타포는 두 유대인 남자와 한 소년을 많은 유대인 포로들 앞에서 교수대에 매달았습니다. 두 남자는 빨리 죽었지만 그 소년의 죽음의 투쟁은 반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 때 내 뒤에서 서 있던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그는 어디에 있는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소년이 여전히 밧줄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는 그 남자가 다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왜 히틀러가 망령을 부리도록 내버려 두는가?
그 소년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가?
선민이라는 유대인들이 수백만 명이 죽어 가고, 악의 세력이 극성을 부리는데도 아무 일을 할 수 없는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분이 아닌가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저는 끊임없이 맴도는 생각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일본이나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지, 그리고 그 때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 지금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러나 그럴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인가요? 하나님은 과연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분이신가요?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Lent Season)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부활절 이전의 4순, 즉 40일간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보내는 계절입니다. 이러한 사순절은 예수께서 공생활을 하시기에 앞서 40일을 광야에서 보내신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맞추도록 노력하셨습니다. 금년 사순절 동안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분을 더 닮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사순절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한 가지 물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앞에서 든 이야기들이 사순절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설교 시간에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할 것이지 왜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가?
여러분의 물음에 대한 답변 대신에 저는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게 됩니다. 66-67절에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라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똑 같은 본문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장면의 모습이 보입니까? 한 번 눈으로 그려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 한 채 떠나가고 이제 몇 명 안 남은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을 향해 너희도 가겠느냐고 물으시는 예수. 성서를 통해 이곳보다 더 쓸쓸해 보이는 장면이 또 있습니까? 이곳보다 더 어깨가 축 처져 있을 예수의 모습이 나타난 데가 또 있습니까? 무기력한 예수, 떠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을 수 없었던 예수, 몇 명 남은 제자들을 쓸쓸한,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는 예수, 바로 그런 예수를 여러분은 상상이나 해 보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차라리 괜찮습니다. 처음 시작 때부터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었더라면, 능력있는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더라면, 그래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사람들에게 아무 희망도 주지 못 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얼마나 인기가 좋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능력을 행사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고, 기대를 걸었습니까?
오늘의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 6장의 1-21절에만 보아도 두 가지 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그 유명한 5병2어의 기적사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여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오히려 열 두 광주리에 넘게 남겼습니다. 이 때 먹을 사람들이 남자 장정들만 쳐서 5000명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 어린아이들까지 치면 한 2만 명쯤 되지 않겠습니까? 이 엄청난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를 붙들어 왕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께서 도망가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바다에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둠이 짙어지도록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 거센 바람이 불고 바다 물결은 사나와졌습니다. 제자들이 기를 쓰고 노를 저어 십 여리 쯤 갔을 때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물 위를 십 여리나 걸어오다니 포장이 잘 된 길도 10 리를 걸으라면 까마득한데 바다에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와진 바다 위를 십 여리나 걸어오시다니. 제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분입니까?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병든 사람을 고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저는 바로 여기에서 “예수 믿으면서 잘 못사는 것은 예수를 잘못 믿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지 3년이 지나도록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은 회개하라. 예수를 믿으면서도 방언을 하지 못 하는 건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한쪽 면, 그것도 비본질적인 면만을 보고 있음을 저는 발견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달려드는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우리만이 잘 살겠다고, 당신에게 빵이 있으니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예수에게 조르는 바로 우리들, 소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달려들던 무리들, 바다 위를 십리 넘게 걸어오신 예수를 보고 놀난 무리들. 바로 그들이 예수를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성서는 그 이유를 정확히 밝혀 줍니다. 그 이유란 바로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즉, 죽음,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고는 아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먹을 것이 있고 기적을 보았을 때 그렇게 열광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부딪혔을 때 예수를 버리고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는 성서의 이야기,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요? 우리도 지금은 예수 믿는다고,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떨어져 나가고, 조금만 힘들면 ‘나는 바뻐서’ 하고 빠져 나가지 않는가요?
십자가의 이야기가 나오자 떨어져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예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혹시 그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지는 않았을까요? “너희도 가려느냐?” 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가냘프게 떨리지는 않았을까요?
바로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제자입니까? 중요한 때에 적절한 대답으로 스승을 만족시켜 주던 베드로,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불과 얼마 후에 자기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리고 죽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여러분!
사순절은 바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입니다.
수많은 신도들이 거꾸로 매어달려 죽어가는데,
수많은 로드리고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간구하는데,
어린아이의 목이 밧줄에 걸려 숨이 넘어가는데.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고 누군가가 묻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순간 교수대에 달려 있는 아이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비이젤을 기억합니다. 교수대 앞에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여기에 있다. 그는 바로 교수대 위에 매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일본의 천주교인들과 함께 거꾸로 매어 달렸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수용소의 교수대에 어린아이와 함께 매어 달렸습니다.
천주교인들을 죽인 일본인들,
유대인들을 죽인 독일인들,
그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빵과 기적만을 보았을 때에는 열렬히 환호하다가 십자가 사건에 부딪치자 순식간에 돌아서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던 무리들, 그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에 의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못 박히신 하나님, 그 분은 바로 예수이십니다. 우리가 영광만을 생각하고, 축복만을 바랄 때 죽음을 준비하시고, 끝내 십자가에서, 침묵 속에서 죽어 가신 분, 그 분은 바로 예수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께서 지금 우리들을 향하여 물어보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 6:60-71 / 1983. 3. 13
서기 1592년 한반도의 남쪽 끝 동래 지방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상륙했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이었습니다. 이성계의 건국이후 약 200년간 비교적 평화롭게 지내던 조선은 이로부터 약 7년간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평화가 계속 된다고 해서 아무 준비가 없던 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은 서양에서의 종교개혁 이후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유럽국가, 그 중에서도 포루투칼과 네덜란드 사람들로부터 신식무기, 즉 조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의 독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조선 침략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직전 그는 병사했고, 뒤이어 도꾸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이 권력을 쥐었습니다. 그는 소위 막부정치를 통해 전국을 지배했습니다.
이 때 일본에는 천주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천주교를 통해 서양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지배자들은 서양세력이 자기들을 위협한다고 느끼면서 박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는 바로 박해가 극에 달한 시대였습니다.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자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천주교인들이 가공할 고문과 격렬한 정신적 투쟁 후 자신의 신앙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물론 또 많은 수의 교인들이 재빨리 천주교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저버리고,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 가운데 포루투칼인 신부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던 페레이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이 본국 포르투칼에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제일 번민한 사람은 페레이라의 제자요, 페레이라를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있던 젊은 신부 로드리고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스승이 배교했으리라는 소문을 듣고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로드리고는 신앙의 횃불을 드높일 결심을 하고는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처음에는 잘 숨어 지냈으나 결국 잡혔고, 마지막에는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성화판을 짓밟을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지능적으로 천주교인들을 골라내던 이노우에는 로드리고에게 말했습니다.
“한 번만 밟아라. 그냥 밟기만 해, 마음으로만 굴복하지 않으면 되는거야.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다 이해하실거야.”
젊은 신부 로드리고는 굴복하지 않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먹을 것은 충분했고, 죽음의 위협도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다만 간신히 옆방에서 들려오는 듯 한 신음소리만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 신음소리는 자기와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배교한 사제 페레이라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일본인 승려의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드리고는 배교한 스승 페레이라를 향해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나 페레이라는 옆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교를 거부한 일본인 신자들이 밧줄에 거꾸로 매어달린 채 죽어가면서 뱉어내는 신음소리였습니다. 페레이라는 말했습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다, 잘 듣게나. 이곳에 갇혀서 들은 저 소리에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신부 로드리고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고 두 귀를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페레이라의 목소리, 신도들의 신음소리는 그의 귀에 사정없이 들려왔습니다.
“그만 해 주시오, 그만 해 주시오. 주여, 당신은 이제야 말로 침묵을 깨뜨려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옳고, 선하고, 사랑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있다는 것을 이 세상과 인간들에게 명시하기 위해서도 무슨 말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는가? 저들의 신음소리가 계속 되고 있는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침묵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은 번민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젊은 사제 로드리고는 하나님의 침묵에 견딜 수 없었고, 그러기에 그도 끝내 배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일본의 카톨릭 작가인 엔도오 슈사쿠가 그의 소설 “침묵”에서 묻고 있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자기를 향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 가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침묵할 수 있는가? 자기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분이 아닌가요?
제 1차 대전이 끝나고 불과 20년이 지난 1930년대 말기 유럽은 또 다시 전쟁의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조국 독일, 위대한 민족 게르만을 내세운 히틀러에 의해 드디어 2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세계를 지배할 민족은 게르만과 유대인 밖에 없다고 하면서 광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우슈비츠 등지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 가운데에는 신학자인 비이젤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밤(night)"라는 책에 남겨 놓았습니다.
"비밀경찰 게쉬타포는 두 유대인 남자와 한 소년을 많은 유대인 포로들 앞에서 교수대에 매달았습니다. 두 남자는 빨리 죽었지만 그 소년의 죽음의 투쟁은 반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 때 내 뒤에서 서 있던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그는 어디에 있는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소년이 여전히 밧줄에 매달려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는 그 남자가 다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왜 히틀러가 망령을 부리도록 내버려 두는가?
그 소년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가?
선민이라는 유대인들이 수백만 명이 죽어 가고, 악의 세력이 극성을 부리는데도 아무 일을 할 수 없는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분이 아닌가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저는 끊임없이 맴도는 생각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일본이나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지, 그리고 그 때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 지금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러나 그럴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인가요? 하나님은 과연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분이신가요?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Lent Season)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부활절 이전의 4순, 즉 40일간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도와 명상의 시간을 보내는 계절입니다. 이러한 사순절은 예수께서 공생활을 하시기에 앞서 40일을 광야에서 보내신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맞추도록 노력하셨습니다. 금년 사순절 동안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분을 더 닮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사순절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한 가지 물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앞에서 든 이야기들이 사순절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설교 시간에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할 것이지 왜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가?
여러분의 물음에 대한 답변 대신에 저는 이제 오늘의 본문을 보게 됩니다. 66-67절에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라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똑 같은 본문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장면의 모습이 보입니까? 한 번 눈으로 그려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 한 채 떠나가고 이제 몇 명 안 남은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을 향해 너희도 가겠느냐고 물으시는 예수. 성서를 통해 이곳보다 더 쓸쓸해 보이는 장면이 또 있습니까? 이곳보다 더 어깨가 축 처져 있을 예수의 모습이 나타난 데가 또 있습니까? 무기력한 예수, 떠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을 수 없었던 예수, 몇 명 남은 제자들을 쓸쓸한,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는 예수, 바로 그런 예수를 여러분은 상상이나 해 보신 적이 있으셨던가요?
그런데 사실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차라리 괜찮습니다. 처음 시작 때부터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었더라면, 능력있는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더라면, 그래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사람들에게 아무 희망도 주지 못 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얼마나 인기가 좋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능력을 행사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고, 기대를 걸었습니까?
오늘의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 6장의 1-21절에만 보아도 두 가지 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그 유명한 5병2어의 기적사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여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오히려 열 두 광주리에 넘게 남겼습니다. 이 때 먹을 사람들이 남자 장정들만 쳐서 5000명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 어린아이들까지 치면 한 2만 명쯤 되지 않겠습니까? 이 엄청난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를 붙들어 왕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께서 도망가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바다에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둠이 짙어지도록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 거센 바람이 불고 바다 물결은 사나와졌습니다. 제자들이 기를 쓰고 노를 저어 십 여리 쯤 갔을 때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물 위를 십 여리나 걸어오다니 포장이 잘 된 길도 10 리를 걸으라면 까마득한데 바다에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와진 바다 위를 십 여리나 걸어오시다니. 제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분입니까?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병든 사람을 고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저는 바로 여기에서 “예수 믿으면서 잘 못사는 것은 예수를 잘못 믿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지 3년이 지나도록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은 회개하라. 예수를 믿으면서도 방언을 하지 못 하는 건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한쪽 면, 그것도 비본질적인 면만을 보고 있음을 저는 발견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달려드는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우리만이 잘 살겠다고, 당신에게 빵이 있으니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예수에게 조르는 바로 우리들, 소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달려들던 무리들, 바다 위를 십리 넘게 걸어오신 예수를 보고 놀난 무리들. 바로 그들이 예수를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성서는 그 이유를 정확히 밝혀 줍니다. 그 이유란 바로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즉, 죽음,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고는 아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먹을 것이 있고 기적을 보았을 때 그렇게 열광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부딪혔을 때 예수를 버리고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는 성서의 이야기,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요? 우리도 지금은 예수 믿는다고,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떨어져 나가고, 조금만 힘들면 ‘나는 바뻐서’ 하고 빠져 나가지 않는가요?
십자가의 이야기가 나오자 떨어져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예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혹시 그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지는 않았을까요? “너희도 가려느냐?” 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가냘프게 떨리지는 않았을까요?
바로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제자입니까? 중요한 때에 적절한 대답으로 스승을 만족시켜 주던 베드로,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불과 얼마 후에 자기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리고 죽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여러분!
사순절은 바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입니다.
수많은 신도들이 거꾸로 매어달려 죽어가는데,
수많은 로드리고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간구하는데,
어린아이의 목이 밧줄에 걸려 숨이 넘어가는데.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고 누군가가 묻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입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순간 교수대에 달려 있는 아이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비이젤을 기억합니다. 교수대 앞에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여기에 있다. 그는 바로 교수대 위에 매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일본의 천주교인들과 함께 거꾸로 매어 달렸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수용소의 교수대에 어린아이와 함께 매어 달렸습니다.
천주교인들을 죽인 일본인들,
유대인들을 죽인 독일인들,
그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빵과 기적만을 보았을 때에는 열렬히 환호하다가 십자가 사건에 부딪치자 순식간에 돌아서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던 무리들, 그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에 의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못 박히신 하나님, 그 분은 바로 예수이십니다. 우리가 영광만을 생각하고, 축복만을 바랄 때 죽음을 준비하시고, 끝내 십자가에서, 침묵 속에서 죽어 가신 분, 그 분은 바로 예수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께서 지금 우리들을 향하여 물어보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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