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에 대한 가르침
마태복음 5장 21-26절/2007년 4월 1일
여러분!
십계명 가운데 제 6 계명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바로 ‘살인하지 못한다’라는 계명입니다(출 20:13, 신 5:17). 제 6 계명은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계명 중의 둘째 계명입니다. 두 번째 부분 중의 첫째 계명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월요성서연구 시간에 살펴본 것이지만 그 계명이 사실은 부모님을 통해 우리를 통해나게 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살인하지 못한다’ 는 계명은 사실상 두 번째 부분의 첫째 계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계명은 중요합니다.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거의 첫 번째 계명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서에는 십계명 말고도 이 계명과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들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리고 각 구절들은 상황에 따라 좀 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십계명 바로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 2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그가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 실수로 죽였으면, 내가 너희에게 정하여 주는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 그러나 홧김에 일부러 이웃을 죽인 자는, 나의 제단으로 피하여 오더라도 끌어내서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21장 12-14절)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의적인 살인과 과실치사를 구분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도피성 제도를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하지만 만약 실수로 죽인 것이라면, 도피성으로 피해서 살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홧김에 일부러 죽였다면, 도피성에 피했더라도 반드시 글어내어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24장에 나오는 말씀은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남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짐승을 죽인 사람은, 생명으로 생명을 갚아야 하므로, 살아 있는 것으로 물어주어야 한다. 자기 이웃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입힌 만큼 그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혀라. 부러뜨린 것은 부러뜨린 것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상처를 입힌 사람은, 자기도 그만큼 상처를 받아야 한다. 남의 짐승을 죽인 사람은 그것을 물어 주어야 하고,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이 법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사는 외국 사람에게도 같이 적용된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레위기 24장 17-22절)
또한 민수기 35장에는 살인자에 대한 복수를 허락해 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쇠붙이 같은 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사람을 죽일 만 한 돌을 들고 있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만일 사람을 죽일 만 한 나무 연장을 들고 있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그 살인자를 죽일 사람은 피해자의 피를 보복할 친족이다. 그는 그 살인자를 만나는 대로 죽일 수 있다.” (민수기 35장 16-19절)
그러니까 쇠붙이, 돌, 나무 연장을 준비했다가 사람을 죽이면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복수해야 하는데 그 피해자의 친족이 복수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구약의 율법에서는 이렇게도 여러 군데서 살인에 관한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인가요? 흔히 하는 말처럼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이 내 이빨 하나를 부러뜨리면 다른 사람의 이빨 두세 개를 부러뜨려야 속이 시원하고, 내가 한 대 맞으면 상대방을 죽도록 패야 후련하다고 하니까, 그래서 복수를 하도록 내버려두면 보복의 악순환이 이루어지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 정해주신 제도인가요? 이것이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말하고 있는바 동태복수법(同態復搜法)인데 성경도 단순히 그런 차원에서 이러한 차원에서 법을 정해 주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에 사는 모든 짐승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채소를 너희에게 먹을거리로 준 것 같이, 내가 이것들도 다 너희에게 준다.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거기에서 번성하여라.“ (창세기 9장 1-7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당신이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실 터인데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세상에 보내신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에 관계없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의 양에 관계없이, 그 사람의 학력에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장애를 가졌던지 아니든지, 어른이든지 아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그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인간을 죽이는 일은 단순히 생명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함으로써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도전한 것입니다. 이 계명이 이렇게 중요하기에, 그 의미가 너무나 깊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하시면서 그 첫 번째 것으로 살인의 문제를 들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렇습니다.
‘살인하지 말아라’ 라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기에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문자 그대로 보면, 즉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에 따른다면 그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계명을 다 지키는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리가 없고, 그러니까 그들은 이 계명을 분명히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과연 이 계명에 들어있는 그 정신을 다 지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손에 피를 묻혀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존중하는 그 정신이 지켜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22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살인을 금하는 이 계명은, 제대로 완전히 이해된다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분노, 무례함과 경멸 같은 내적 태도들까지도 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동족 형제자매 또는 신앙의 형제자매들에게 분노하는 것조차 금하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분노하면 쉽게 내뱉는 두 가지 욕설도 금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여기 세 단계가 나타납니다. 우선 형제자매에게 분노하는(성내는) 일 --> 형제자매를 향해서 얼간이라고 말하는 것(모욕하는 일) --> 형제자매를 향해서 바보라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 그 단계마다 심판을 받음 --> 최고 의회에 끌려감 --> 지옥 불 속에 던져짐이라는 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단계 별로 처벌도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행위에 비해 주어지는 벌이 너무나 무겁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형제자매들에게 성낸다고 해서 심판을 받고, 형제자매를 향해서 얼간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최고재판소까지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바보라고 욕했다고 해서 지옥 불 속에 들어간다면 도대체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렇게 설교하지만 저도 이렇게 말한 적이 분명히 있는데 여러분은 그런 말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가요? 도대체 예수께서는 왜 이렇게 심한 말을 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바보’, 다른 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엄청난 의미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시편 14편 1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말을 야곱의 자손에게 전하고,
유다 백성에게 들려주어라.
이 어리석고 깨달을 줄 모르는 백성아,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백성아,
너희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예레미야서 5장 20-21절)
그렇습니다.
‘바보’니, ‘어리석은 자’니 하는 단어는 구약으로 보면 바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 즉 무신론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형제자매를 향해서 얼간이라고 욕을 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적인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인간의 재판을 받게 되며, 형제자매를 향해 함부로 바보라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라고 욕하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기에 그런 자들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상대방에게 개인적으로 화를 내면 심판을 받을 것이고, 얼간이라고 부름으로써 상대방과 인간들과의 관계를 끊는 그런 욕을 하면 최고재판소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을 것이고, 바보라고 부름으로써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면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자매를 향해서 화를 내고, 얼간이라고 욕을 하고, 바보라고 말하는 일은 인간들 사이에서 너무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누구나 저지르는 잘못인데 거기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최고법정인 예루살렘 의회에 불려가고, 하나님의 영원한 벌인 지옥을 말하는 것은 놀라울 만큼 의도적인 불균형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일부러 균형에 맞지 않게 말하신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분노는 이미 형제자매들에 대한 공격이며, 공동체 관계를 해치는 범죄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버리는 범죄이기에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살인과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살인하지 말아라’라는 계명을 없애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법을 육신의 살인을 금하는 규정으로 축소시킨 편협한 해석을 물리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계명을 완전하게 수용하려면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할 형제자매들로 인정하는 그런 변화가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살인 금지 계명에 부여하시는 해석을 두 가지 예를 들어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23-24절이 첫 번째 예요, 25-26절이 두 번째 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무슨 말입니까?
옳든 그르든 ‘형제나 자매가 당신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이 갈등이 살인의 근원이 되므로 화해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종교적 행위보다, 즉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급한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한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먼저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해를 추구하는 형제적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장 13절)
두 번째 예는 25-26절에 나옵니다.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를 촉구하심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을 우리가 기꺼이 없애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빚을 없애주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특히 26절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선고를 나타내줍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기자는 그의 책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강조했고, 그래서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 비유도 마태복음 25장에만 나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분노의 문제와 결부시켰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계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정신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 내게 잘못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베풀 것을 권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2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를 죽일 만큼 끔찍한 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여섯 번째 계명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형제자매를 향해서 성내고, 얼간이라고 말하고, 도 누군가를 바보라고 불렀다면, 또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앞에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간직하고 언제나 자비를 베풀고, 내 형제자매들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내 형제자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를 언제나 존중하고 화해하며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7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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