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7 년도

2007. 3. 18 / 제자들의 사명 / 마태복음 5:13-16

람보 2 2015. 4. 2. 17:08

제자들의 사명


마태복음 5장 13-16절/2007년 3월 18일



  드디어 8주 만에 팔복에 대한 설교를 끝냈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에 여덟 가지 종류의 복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복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니 복이 있기는커녕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무시당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물론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자비하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이루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일들은 참으로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평가받을 일들이지만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손해보고 무시당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또한 마음이 온유하고 자비하며, 깨끗한 사람들이 살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나 악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아 빠졌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온유하고 자비하며, 깨끗한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 취급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입니다.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으면 겉으로는 존경하고, 잘한다고 말하지만 뒤돌아서서는 비웃고, 왕따 시키고, 그래서 결국은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우리나라에도 내부고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기관에 속해 있다가 자기가 속한 내부의 비리를 보고 견딜 수 없어서 그것을 폭로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의 활동으로 부정과 불의가 드러나고 세상이 좀 더 깨끗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내부고발자들은 그 결과 칭찬을 받고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발당하고, 재판을 받고 쫓겨나서 사는 것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성균관대학교 교수 한 사람의 문제도 거기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의를 위해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바보같은 짓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야말로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똑똑한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모욕당하거나 박해받지 않고, 비난받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또 만약 그런 일을 당하면 기를 쓰고 복수해서 분풀이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렇게 당하면 복이 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하늘나라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맞다면,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맞는 말이라고 인정한다면, 결국 하늘나라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하늘나라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나라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8복에 나오는 그 모든 내용들 역시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덟 가지 복에 가장 합당하게 사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즉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이 '너희들'이라고 강조한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물론 그들은 팔복에 나오는 바로 그들, 즉 가난한 자들이고, 슬퍼하는 자들이고, 굶주린 자들이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져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세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위 '상징어' 라고 부르는 부분인데 13절은 소금의 상징어, 14절은 산 위에 자리 잡은 도시의 상징어, 그리고 15-16절은 등불의 상징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 부분을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여러분,

  소금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소금은 맛을 내기도 하고, 냉장고가 없었던 세상에서는 썩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사람이 소금을 흡수하지 못하면 건강을 잃고, 병에 걸려 결국은 죽고 맙니다. 그러니까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입니다. 그래서 티베트 같은 산간오지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소금을 파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수 천 미터가 넘는 산봉우리를 넘어서 마을 마을을 찾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뿐인가?


  그런데 성서적으로 보면 소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물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에서 모든 곡식 제물마다 반드시 소금을 넣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드리는 모든 곡식 제물에는 소금을 넣어야 한다. 네가 드리는 곡식 제물에는 네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에 넣는 그 소금을 빼놓지 말아라. 네가 드리는 모든 제물에는 소금을 넣도록 하여라.”                      (레위기 2장 13절)


  그렇습니다.

  소금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현입니다. 모든 곡식 제물에 소금을 넣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지 않았음을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민수기에서는 '소금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어 올려 나 주에게 바친 거룩한 제물은, 내가 너와 너에게 딸린 아들딸에게 모두 준다. 이것은 너와 너의 자손을 위하여 주 앞에서 대대로 지켜야 하는 소금 언약이다.”                                                  (민수기 18장 19절)


  그렇습니다.

  '소금언약' 은 바로 변하지 않는 언약의 영속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언약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지 않아야 하고, 그러한 영속성의 징표가 바로 소금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소금을 통해 당신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실 것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솔로몬 왕의 손자요, 르호보암 왕의 아들인 아비야는 갈라져 나간 북왕국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과 맞붙어 싸우게 되었을 때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아비야가 에브라임 산간지역에 있는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소리쳤다.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은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소금으로 파기될 수 없는 언약을 맺으시고, 이스라엘을 다윗이 다스릴 나라로 영원히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들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            (역대지하 13장 4-5절)


  물론 이 구절은 솔로몬 왕의 손자인 아비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갈라져나간 여로보암을 꾸짖고 자기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소금 언약을 억지로 끌어들인 것이지요. 그러나 어쨌든 아비야는 소금언약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은 제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맛을 내야하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제자들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하고, 그 언약을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짓밟게 되는 것처럼 제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그 삶이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삶이 되지 못하면 존재가치가 없어져서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짓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다.”


  여러분!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살던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양쪽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았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대륙과 일본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던 것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방어하기 편하게 산 위에 도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산꼭대기에 있기에 사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금방 눈에 띄었고, 그래서 결코 자기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한 민족들은 그 누구나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최후의 공격 목표로 삼았고, 그래서 예루살렘은 몇 번 씩이나 처절한 침략을 당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바로 그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 될 날이 올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시로 받은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이사야서 2장 1-3절)


  그렇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산 위에 자리 잡은 빛의 도시인 예루살렘의 사명, 곧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을 비출 이스라엘의 사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존재는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세 번째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그렇습니다.

  등불은 비추어지기 위해 존재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됫박’은 불을 끄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고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에서 등불을 쓰지 않을 때 그것을 두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등불을 켜서 됫박 아래에 둔다면 집안을 환하게 비출 수도 없고, 또 등불을 켠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등불을 켰다면 반드시 등경 위에 두어야 하고,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빛이고, 누가 등불입니까?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이 곧 빛이요, 등불이시며, 내 등불을 밝혀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 주님, 진실로 주님은

  내 등불을 밝히십니다.

  주 나의 하나님은 어둠을 밝히십니다.“    (시편 18편 28절)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이사야서 60장 1-3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하나님이 등불이십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서는 위의 세 가지를 합하여 16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주님께서는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빛’은 무엇입니까? 그 ‘빛’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마태복음 4장 15-16절)


  그렇습니다.

  주님이 빛이십니다. 주님이 등불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란 바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착한 행실로 자기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과 다른 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장 15절)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마태가 그렇게도 경멸하는 바, ‘지리적인 정복’의 야망에 젖어 있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금이나 빛 그리고 등불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봉사하고 불태움으로써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바로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오로지 숫자에만 관심이 있어서 수 천 명 모이는 교회는 수 만 명, 수 만 명 모이는 교회는 수십 만 명 긁어모으고,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땅 사고 건물 짓는 것만이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하나가 생기면, 자기들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그 어떤 기관들보다 더 썩었다는 소리를 듣고,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욕심이 많고 죄를 많이 짓는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에서는 2년 마다 한 번 씩 감독선거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래도 감독이 취임하고 1년 정도가 지나면 새로운 감독후보자들이 선거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감독이 취임하기도 전에 이미 다음 감독에 나설 분들이 선거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2년 동안이나 선거운동을 하려면 과열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지 제 입으로 차마 옮길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요즘 대형 교회들은 직분을 받게 될 때 내야 되는 돈의 액수가 정해져 있다지요. 그러니 돈이 없으면 교회에서 직분을 받지도 못하게 생겼습니다. 이것은 진짜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일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금 한 줌이나 조그마한 등불은 사실상 보잘 것 없는 것들입니다. 소금 한 줌 누가 내다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밀가루나 다른 원료들과 견주어 볼 때 너무나 값어치가 떨어진다고 보여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소금이나 등불은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것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소금이나 등불과 같이 값어치가 떨어지고 보잘 것 없다고 보여지는 주님의 제자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자비하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이루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기에 그 숫자도 보잘 것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산꼭대기에 있는 도시에서 비쳐 나오는 빛이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 집으로 인도해 주는 것처럼 그렇게 바깥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 아직 제 집으로 갈 길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역할을 해 낼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 한 줌이나 조그마한 등불처럼 우리가 보잘 것 없다고 무시당할 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와 같은 작은 교회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믿음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땅에 하늘나라를 이루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