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7 년도

2007. 2. 18 / 자비한 사람 / 마태복음 5:7

람보 2 2015. 4. 2. 16:53

자비한 사람


마태복음 5장 7절 / 2007. 2. 18



  기원전 743년, 무려 40년 동안이나 왕위에 앉아있었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국의 열아홉 명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북왕국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대 때 북왕국의 영토는 가장 넓었고, 경제적으로 제일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영토는 넓고, 경제는 번성했으나 사회는 병들었습니다. 그것도 가벼운 병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누린 적 없는 풍성한 부를 가지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린 부자가 있는 반면에, 너무나 궁핍해져서 낙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부자들은 탐욕과 허영에 사로잡혀 있고, 재산이 사람과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종교 역시 똑같이 병들었습니다. 산당들은 숭배자들로 들끓었으나 참된 신앙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아모스가 그들의 죄악을 꾸짖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 ‘너희는 베델로 몰려가서 죄를 지어라.

  길갈로 들어가서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 보아라.

  또 누룩 넣은 빵을

  감사 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큰소리로 알리면서

  자원예물을 드려보아라.

  이스라엘 자손아,

  바로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아모스서 4장 4-5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베델이나 길갈은 저들의 산당이 있는 곳이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넘어가지 말아라.

  길갈 주민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가고,

  베델은 폐허가 될 것이다.


  너희는 주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요셉의 집에 불같이 달려드시어

  베델을 살라버리실 것이니,

  그 때에는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아모스서 5장 4-6절)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 2세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땅을 넓고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으나 온갖 죄악이 가득차고 종교가 타락했던 시대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그 여로보암 2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모스 예언자의 말처럼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22년의 기간 동안 무려 여섯 명의 왕이 교체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스가랴가 왕이 되었으나 6개월 만에 살룸의 손에 죽고 살룸이 왕이 되었습니다. 살룸은 다시 1개월 만에 므나헴이 일으킨 반역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므나헴이 왕이 되었습니다. 

  므나헴은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셋 왕에게 매년 은 천 달란트를 바치고, 그 도움으로 5년 동안 왕노릇하다가 죽었고, 그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2년 만에 그의 부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50명의 군인을 데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베가 역시 6년 만에 호세아의 손에 죽고 호세아가 왕이 되었으니 그가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폭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혼란이 극에 달한 시대였습니다. 세계 제국 앗시리아의 위협은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나라는 곧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왕을 비롯한 지배계급들은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한 사람의 예언자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도 아모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가득 차 있는 불의와 사기와 폭력과 잔인성들을 그러나 호세아는 당시 백성들 가운데 결핍된 것은 단지 정의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의는 물론 사라지고 없었지만 호세아는 정의 그 이상의 것도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아,

  주의 말씀을 들어라.

  주께서 이 땅의 주민들과 변론하신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 “    (호세아서 4장 1-3절)


  그렇습니다.

  호세아에 의하면 물론 정의도 사라졌지만 동시에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 유명한 ‘헤세드’(hesed)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 이 단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상적인 결혼 상태 사이에 자유로이 맺어진 유대관계를 나타냅니다. 또한 우정이나 애정, 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헤세드’는 상호신뢰와 애정깊은 사랑과 부드러운 존경 안에서 성숙되는 충실성을 나타냅니다. 특히 야훼와 백성 사이에서 ‘헤세드’는 부드럽고 따뜻한 존경과 충실하고 애정깊은 사랑을 가져야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결국 ‘헤세드’는 자비, 사랑, 충실한 사랑, 친절, 부드러운 마음, 성실한 사랑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렇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에 관해 사용될 때는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고, 동시에 인간에게 사용될 때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충성과 그분의 뜻에 대한 진실한 순종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세아서 6장 6절)


  그로부터 약 100년 후, 남왕국 유다가 멸망해 가던 무렵, 남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 예레미야도 역시 이 단어 ‘헤세드’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성경에서 ‘긍휼’로 번역되었습니다.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기 9장 23-24절)


  여러분!

  여기에 나오는 ‘긍휼’이 바로 히브리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백성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서 곳곳에서 자비를 강조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시비를 걸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장 13절)


  사도 베드로가 주님께 죄 지은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해야 한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나라를 나타내는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만 달란트를 빚진 종과 백 데나리온 빚진 종의 비유였습니다. 거기에서 예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 18장 32-33절)


  또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분명히 강조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복음 23장 23-24절)


  당연히 말씀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불상한 사람들이 당신께 나아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 간청하면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들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예수를 뒤따라왔다.”

  그리고 그 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어 주시고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9장 27-31절)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으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 . . . .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복음 15장 21-28절)


  “그들이 무리에게 오니,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 . . . .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                 (마태복음 17장 14-18절)


  “그들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그런데 눈먼 사람 둘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무리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 소원이 무엇이냐’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엽게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 20장 29-34절)


  그렇습니다.

  예수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자비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그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를 통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들,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헐벗고 병들었고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면 마지막 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요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어려움 중에 있는 곤궁한 사람들에게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사랑입니다. 인간이 겪는 어려움은 참으로 종류가 많지만 그 어느 것이든 다 자비를 필요로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요,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의 필요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최고의 자비의 행위는 곧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바로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죄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이런 내용을 포함시켰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    (마태복음 6장 12절)


  여러분!

  인간이 행해야 하는 자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형제들 사이에서의 용서요,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누릴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한 마디로 표현하셨습니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자비하게 여기실 것이다.“

  또한 주님의 동생으로 알려진 야고보 장로는 자비의 위대함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야고보서 2장 12-13절)


  끝으로 누군가의 시 한 부분을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주여, 이상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사전상의 뜻 그대로의

  이러한 무상의 기쁨 외에는 그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 오직 당신만을 위해 남겨진 말이기 때문이지요.

  자비란 당신의 이름입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왜 그것이 우리의 것, 우리의 수단이 되면 안 되나요?

  그리고 왜 나의 것이 되면 안 되나요?


  우리는 계산합니다. 판단합니다. 단죄합니다.

  우리는 항상 강력한 말을 고집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피해의 숫자를 기록하고

  복수를 준비합니다.

  반면에 주여, 당신은 용서하십니다.

  당신은 신뢰하십니다.

  당신은 지상의 보복을 알지 못하십니다.

  당신은 사랑과 자유에 모든 것을 걸고 계십니다.


  기꺼이 방탕아를 환대하시는 당신,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시는 당신,

  놀라운 신앙, 희망, 자선으로

  늦게야 당신께 돌아온 자를 돌보아 주시는 당신,    

  미소와 무상의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당신 자비의 빛을 전해 주소서.“

    (질베르 세스브롱, ‘참된 행복을 따라 살도록 가르치소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