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사람
마태복음 5장 5절/2007년 2월 4일
오늘 저는 한겨레신문의 한승동 기자가 쓴 글을 먼저 소개하려고 합니다. 혹 오늘의 설교 내용과 맞지 않을지 모른다는 염려도 있지만 그래도 오늘 소개하지 않으면 소개할 기회를 영영 놓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많아서 소개하겠습니다.
“난생처음 행상과 외판원을 하며 전전했고, 밤새 옷을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다. 하지만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려울 만큼의 가난’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주변의 냉대와 핍박이었다. 갑자기 친척 왕래가 뚝 끊겼다. . . . . 동네 아이들마저 일곱 살짜리 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묶고 ‘빨갱이 자식‘이라며 총살 놀이를 할 정도로 이웃들의 반응은 무서웠다.”
1975년 4월 9일 남편 하재완(당시 42살) 씨를 면회하러 서대문 형무소에 갔던 5남매의 어머니 이영교 씨는 하 씨 등 8명이 사형선고 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그날 새벽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됐다는 얘길 듣고 쓰러졌다. 그들을 죽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고문으로 날조한 범죄였다. 그들은 32년이나 지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역시 1975년, 선거에서 진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 다음 해 2월,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차타만갈람 공대생 라잔은 청소년 축제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연행되었고, 잔인한 고문 끝에 맞아 죽었다.
경찰은 라잔을 자루 속에 담아 숲 속으로 옮긴 뒤 설탕과 함께 뼈도 남기지 않고 태워서 없애버렸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 애차라 배리얼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아들 실종 뒤 처음 40일 동안은 집에 그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아들을 찾아 헤맸으나 비열한 경찰과 관리들, 심지어 증인들로부터도 수없이 기만당하고 협박받고 배신당했다.
라잔의 동생들은 날마다 울부짖었고, 절망한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라잔의 아버지 배리얼은 그의 아픔을 이렇게 남겨 놓았다.
“빛은 사라졌다. . . . . . 두 손을 모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애의 어린 얼굴이 떠오른다. ‘오, 아들아, 이 무력한 아버지를 용서해 다오.’ 나는 그렇게 울부짖는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 속상하고 억울하며 견디기 힘든 일은 바로 악한 자들이 잘 되고 바르고 선하게, 또는 특별히 잘못한 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일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오히려 돈도 잘 벌고, 권력도 누리면서 큰소리치며 살고, 반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하루하루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권력자들에 의해서 무고한 희생을 당할 때 그것은 우리를 참으로 답답하게 합니다.
그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독재자의 딸은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 떵떵거리고 살면서 30년이 지난 지금 대통령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왜 이제 와서 다 지난 일을 들추느냐고 되레 역정을 냅니다. 그리고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 길은 없고, 그 유가족들이 겪은 아픔 역시 위로해 줄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묻게 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 되어야 하는가?
왜 악한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선한 자는 보응을 받지 않는가?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악한 자가 잘 되고 선한 자가 어려움을 겪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여기서 시편 기자의 말을 기억합니다. ‘다윗의 시’라고 제목이 붙어있는 시편 37편입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아라.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말아라.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조금만 더 참아라.
악인은 멸망하고야 만다.
아무리 그 있던 자취를 찾아보아도
그는 이미 없을 것이다.“ (시편 37편 1-10절)
그렇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지금은 번성하고 잘 사는 것 같지만 곧 멸망할 것이고, 아무리 그 있던 자취를 찾아보아도 그는 이미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조급해 하거나 안달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미쁘심을 간직하고,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고,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11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
여러분, 바로 이 시편 37편 11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게 하시고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시편 기자의 말일 뿐이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가 그냥 노래한 것 아닙니까? 우리의 현실에서도 이것이 가능한가요?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않으면 저절로 그런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야말로 악한 자들이 언제나 가는 길이 평탄하다고 자랑하고,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이 우리 눈앞에서 자기들이 누리는 재산이나 권력을 잃어버리고 심판받는 일이 일어납니까? 오히려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그것 가지고 대를 이어 잘 살고, 올바른 일을 하려고 애쓰던 사람들을 결국 자식들까지 고생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니던가요?
겸손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한다고요? 사실은 아주 악랄하게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기 성경말씀이 틀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은 아브라함을 통해 겸손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모두 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
(창세기 17장1-8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과연 이루어졌는가요? 물론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기 21장 43-45절입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여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주께서는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사방에 평화를 주셨다. 또한 주께서는 그들의 모든 원수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므로, 그들의 원수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였다. 주께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약속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 (여호수아기 21장 43-45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약속의 땅을 다 차지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온유한 사람들, 겸손한 사람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이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린 결과 그들은 그 약속의 땅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나라는 망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의 땅은 이제 이방인들이 들어와 사는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땅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요? 이것으로 다 끝나버린 것인가요?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것 같아 보이는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깨어진 것처럼 보이는 때에 한 사람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그를 제 3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제 3 이사야를 통해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서 65장 17-22절)
그렇습니다.
참으로 유명한 예언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라고 노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제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면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를 내지 않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집을 지은 사람은 거기서 살고,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 열매를 먹으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늘나라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땅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물론 요한계시록 21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통해서 일찍이 제 3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것을 자기가 보았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있기 전, 이 예언은 먼저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여러분!
여기에 나오는 ‘온유한’이란 단어는 ‘겸손한’, ‘가난한’, ‘비천한’, ‘힘없는’ 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여기에 해당되는 분이 누구입니까? 단 한 분이 거기에 해당되는데 바로 예수 자신이십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그렇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에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마태복음 21장 5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곧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십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
(마태복음 28장 19-20절)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마태 공동체는 이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6장 10절)
이제 이야기를 정리합시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사람’은 스스로 잘났다고,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큰소리치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경멸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겸손과 자비를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지하면서 남을 공격하거나 복수를 꾀하거나 지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행복이 바로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된 땅을 선물로 받았듯이 온유한 사람들도 땅을, 곧 하늘나라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온유한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참으로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마는 수 만 개나 되는 그 많은 교회들 중에 하늘나라의 지부처럼 되어 있는 교회가 얼마나 있을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았을 때의 크기에 상관없이 그 안에 참으로 온유한 사람들이 거한다면 그 교회는 바로 하늘나라의 지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교회로 자라나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7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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