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7 년도

2007. 1. 28 / 슬퍼하는 사람 / 마태복음 5:4

람보 2 2015. 4. 2. 16:40

슬퍼하는 사람


마태복음 5장 4절 / 2007년 1월 28일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소위 '8복' 가운데 세 번째 것부터 여덟 번째 복은 그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보이고, 그런대로 받아들일 만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지요.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평화를 이룩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들은 모두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보았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도 그랬거니와 두 번째에 해당되는 오늘의 본문은 그야말로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도대체 어떻게 해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슬픔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런 사람을 향해서 복되다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인가요?

  누가복음 6장에는 같은 내용이 좀 더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6장 21절)


  그렇다면 '지금 슬피 우는 사람' 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피 울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안고 있는 슬픔이 어떤 것이기에 그들을 향해서 복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인가요?


  요즘 티브이들마다 개그 프로그램이 아주 유행입니다. 방송국들마다 경쟁적으로 개그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지요. 우리 아이들은 그중에서도 마빡이라는 프로를 보느라고 야단입니다. 온 국민이 그것을 본다고 하고, 심지어는 마빡이를 따라 하는 대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 뒤의 민준이는 벌써 따라 하고 있는 것 보세요.) 그렇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사실 마빡이로 나오는 그 주인공은 참 어렵게 생겼습니다. 어렵게 생겼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고, 돈을 벌고 그래서 장가도 갔지요. 그는 일종의 자학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너희 지금 실컷 웃고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해야 말이 됩니다. 웃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이 우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들이 안고 있는 슬픔이 어떤 것이기에 주님을 그들을 향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인 산상수훈의 8복 바로 앞부분과 평지설교로 되어 있는 누가복음 6장 21절의 본문 바로 앞부분에는 이상하게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 5장 23-24절)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계셨다. 그러자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떼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 해안지방에서 모여든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어 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6장 17-19절)


  여러분!

  기가 막히게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모두 다 설교를 하시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들었다고 기록해 놓았는데 그들은 바로 온갖 종류의 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환자들과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이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물론 인간들이 겪는 슬픔이나 아픔이 종류도 많고, 사람들마다 다 자기가 겪는 슬픔이나 아픔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래도 병에 걸려 죽어 가는 데 고칠 돈도 없고, 고칠 방법도 없을 때 그 환자와 그의 가족이 겪는 슬픔이나 아픔이 가장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힘든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살아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고, 힘든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그 고통을 이겨내고 웃을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에 걸리든지 귀신에 사로잡혀서 도무지 고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죽은 날만 기다린다면 그 환자 자신만큼 큰 아픔이나 슬픔을 겪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가족들도 역시 그 누구도 달래줄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처럼 큰 슬픔이나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그런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을 아시고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당신과 마주친 환자들이나 귀신들린 자들을 모른 체 하고 지나가 버리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그 모든 환자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쓰다듬어 주셨으며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슬퍼하는 사람’은 바로 세상적으로 그 누구도 고쳐줄 수 없고 위로해 줄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갖가지 질병과 고통을 겪는 환자들, 귀신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면 암이라든지 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희귀병이라든지 특히 어린아이들이 갖고 있는 그 아픔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들, 바로 그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들을 위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기를 기억해 보십시오. 욥이 그 많던 재산과 자식들을 다 잃고, 온 몸에 악창이 생겨나서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찾아옵니다. 그 세 사람이 욥에게 한 말이 무엇이지요? 욥기에 보면 그들의 말이 아주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결국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욥을 죄인이라고 꾸짖는 것이지요. 엘리바스의 다음과 같은 말이 그 핵심을 드러냅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욥기 4장 7-8절)


  그러니까 네가 그 많던 재산 다 잃고, 자식들 다 잃고, 네 몸이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것은 네가 죄를 짓기 때문이라고 꾸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욥기는 철저한 인과응보 논리에 빠져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는 유대교를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바로 유대교를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어려움 당하는 이웃을 향해 죄 때문이라고, 나는 죄를 짓지 않았기에 병에도 걸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산다고 큰소리치는 유대인들을 나타냅니다. 욥기는 구약에 나온다는 613가지의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큰소리치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 율법의 정신 곧 사랑과 자비의 마음은 잃어버렸음을 꾸짖는 책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믿던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시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들은 믿고 가르쳤습니다. 자기네가 잘 사는 것은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이고 반대로 병에 걸리고 귀신에 사로잡히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눈먼 사람을 보셨을 때 유대인들이 물었던 것입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                         (요한복음 9장 2절)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온갖 질병으로 고통 받고, 귀신에 사로잡혀 고생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쫓아내시고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그야말로 무조건, 아니 사실은 바로 그들이 질병과 귀신들림으로 고통 받고 슬픔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제가 지난 주 동작지방 사경회에서 욥기를 강의했는데 그때 이런 말씀도 드렸습니다.

  “욥기에서 결국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교인들, 그러니까 나는 예수 잘 믿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남들에게 너무나도 쉽게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질병과 귀신들림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고 고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것뿐인가? 오늘의 본문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차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3절,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구절과 관계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이란 인생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결코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세상적인 욕망을 채운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결국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기초이자 목적이요,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채울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첫 번째 행복,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늘나라를 소유하고 살아간다면 그때 우리가 누리게 될 완전한 평화를 누리도록 현실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내버려두기는커녕 오히려 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 하고,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세상에서 끊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악의 세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가득 차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이유 없이 질병에 걸리게 하고, 귀신들리게 하고, 그 마음속에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주고, 그래서 고통 끝에 절망에 사로잡혀 죽게 만듭니다. 악의 세력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없는 사람들을 온갖 고문과 불법을 동원하여 사형에 처하는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로 얼마 전에 30여 년 만에 여덟 명의 사형수들이 무죄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권력자들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꿎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죽인 겁니다. 그 가족들은 지금도 그 아픔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자의 딸은 법대로 한 것인데 웬 시비냐고 더 흥분해서 날뛰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슬퍼하는 사람’은 바로 이 악의 세력이 가득 차 있는 현재의 잘못된 상태를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사탄이 세상을 지배한 것처럼 보이는 이 어두운 현실을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악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바르게 산다든지, 착하게 산다든지, 남들을 위해 베풀며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손가락질 받고 비웃음 사고 사는 것이 더 힘들어 지는 그런 현실을 슬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마저도 맘몬의 신, 숫자의 신, 크기의 신, 탐욕의 신, 증오의 신, 권력의 신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것을 슬퍼하는 사람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이사야서 61장 1-3절)


  그렇습니다.

  메시아는 슬퍼하는 이를 모두 위로하는 사명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바로 예수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선언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바로 이사야가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아임을 동시에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이신가?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입니다.


  여러분!

  슬퍼하는 이들에게 약속되는 위로는 하나님의 뜻이 온 인류와 우주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때인 하늘나라의 최종적인 도래입니다. 지금 슬퍼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로 임하실 때에 그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우리들이 희망하는 하늘나라의 완전한 평화가 세상의 악과 날카로운 대립을 이룰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왜 이리도 혼란스러운가요? 그것은 한국교회들이 세상의 악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고, 진정 슬퍼해야 하는 일을 슬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자기가 세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세상의 악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세상의 악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큰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우리가 슬픔과 고통을 겪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을 눌러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셨음을 믿기에 우리는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위로를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자 할 때 불가피하게 고통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승리의 확신이 있기에 우리는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길을 사도 바울도 갔기에 그도 이렇게 노래했던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 38-39절)

  이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을 갖고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