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마태복음 3장 13-17절/2006년 11월 26일
요즘 제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 두 번 씩이나 듣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으니 바로 예람이입니다. 설교시간에 듣고, 다시 제 설교를 블로그에 올리고 메일로 보내기 위해서 워드 작업을 하는데 그 일을 위해 다시 한 번 읽는 일을 예람이가 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예람이가 그러더군요. "마태복음이 요한복음보다 더 어렵다."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설교학 시간에 배울 때 설교의 수준을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라고 배웠는데 중3인 예람이가 어렵다고 하는 걸 보니까 좀 더 쉽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설교 한 편에 하나의 이야기만을 하려고 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 설교에서 첫째, 둘째, 셋째 하는 것들을 들어보신 적이 없으실 것입니다. 제 설교를 듣거나 읽는 분들이 하나의 흐름에 쭉 따라오다 보면 저절로 깨닫는 것이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제 설교를 어렵다고 하니까 역시 설교를 쉽게 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 세례요한을 분명히 그 나름대로의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으며 그래서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잠깐 동안 세력을 이루었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그 세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tu서, 거기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곳이 살렘 근처에 있는 에논 이라는 곳인데, 거기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에서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가까운 곳에서 제각각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그만 두 사람 사이에 경쟁관계가 생겨났던 것이지요.
"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 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가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모여 듭니다.' " (요한복음 3:25-26)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자기들한테 오던 사람들이 다 예수에게로 가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지요. 물론 요한복음 기자는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하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를 정리합니다마는 어쨌든 요한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난후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예수의 소문이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냈다는 기록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시켜서, 예수께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누가복음 11:2-6)
이후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의 칼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세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제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다닐 때 에베소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만났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바울은 소아시아의 북부지방을 지나, 에베소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그는 몇몇 제자를 만나서 '여러분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울이 다시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는데, 모두 열 두 사람쯤 되었다."
(사도행전 19:1-7)
여러분!
사도행전 19장은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에 해당되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이때는 기원후 50-52년경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적어도 20년은 지난 후입니다. 그런데 그때 까지도 세례 요한의 세례만을 아는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에베소에서까지 왔다는 이야기는, 그리고 그 숫자가 열둘이나 되었다는 것은 그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결국 예수님과 세례 요한 본인들은 전혀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제자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경쟁 심리가 남아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대로 세례 요한은 단순히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 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일 뿐이라면 도대체 예수께서 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셔야 했던가요? 또한 세례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의 표시로 받는 것이라면 예수께서도 죄인이시라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께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말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당신이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복음에 있어서 "의", "의로움"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평가하시는데 딱 들어맞는 것,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소명을 깨닫도록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의’는 단순히 율법을 잘 지켰다, 안 지켰다의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곧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순종이면서 동시에 모든 자만심을 없애버린 철저한 신뢰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 와서 "의로움의 길" 을 걸었고, 의로움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세리들과 창녀들은 그 가르침을 따랐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정의의 길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고, 거기에 한 가지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 (마태복음 21:31-32)
지금 요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예수의 세례는 "의로운 것", "하나님의 뜻" 에 들어맞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자 회개하는 사람들과 당신이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 자신을 죄인의 몸으로까지 낮추셨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당신을 낮추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는 것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함으로써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순종하셨기에 이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에 그에게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하늘이 열렸다’니요?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표현입니다.
그 유명한 예언자 에스겔이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때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오일이었다. 그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가에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 환상을 보았다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온 지 오 년째가 되는 그 달 오일에, 주님께서 바빌로니아 땅의 그발 강가에서 부시의 아들인 나 에스겔 제사장에게 말씀하셨으며, 거기에서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
(에스겔서 1:1-3)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7:55-56)
그렇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라는 표현은 이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하나님과 갈라져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더 이상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죄인이라고 내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가로막고 있는 죄의 장벽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난 다음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이신가요?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오,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기뻐하는’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을 통해 시편의 말씀과 이사야서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찍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권력을 깨뜨리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고한 적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공모하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나서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꾸며
주를 거역하고,
‘기름 부음 받은 분’을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동여맨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내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마침내 주께서 분을 내고,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호령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나 이제 주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네 아버지가 되었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네 것이 되게 하겠다.
네가 그들을 철퇴로 부술 때에,
질그릇 부수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시편 2:1-9)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바로 이 시편 2편의 말씀이 예수에게서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예수는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이사야서 42장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종”과 같은 삶을 사실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좋아하고’, ‘마음으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사야서 42:1-4)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온 땅을 정복할 메시아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병약한 사람들을 돌보시다가, 묵묵히 고난을 당하시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을 걸어가시는 고난의 종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과 똑같은 내용이 마가복음에도 나오고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분명히 같은 내용인데 그 두 복음서와 마태복음 사이에는 작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마가복음 1: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누가복음 3:22)
그런데 보십시오.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마태복음 3:17)
여러분!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마가나 누가에 의하면 하늘의 음성은 예수님 자신을 향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마태에 의하면 하늘의 음성이 예수보다는 예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는’ 이라는 표현과 ‘그를 좋아한다’는 표현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무엇인가요? 왜 이렇게 바뀌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세례는 예수 혼자만의 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 즉 예수의 뒤를 좇아 약속된 땅을 향해 새로운 출애굽을 시작하는 새로운 인간들의 우두머리 즉 대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시고,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걸어가게 될 것이며, 예수는 바로 그들이 대장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거쳐야 될 하나의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유혹사건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곧바로 유혹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고난의 종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따르도록 부름받고 그분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꾼으로 일하도록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명 잊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6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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