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6 년도

2006. 11. 12 / 광야에서 / 마태복음 3:1-6

람보 2 2015. 4. 2. 15:58

광야에서


마태복음 3:1-6/2006. 11. 12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이었던 다윗 왕은 그야말로 원하는 것은 다 이룬 왕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을 다 정복했고, 그렇게도 못살게 굴었던 블레셋 족속을 굴복시켰습니다. 유프라테스에서 이집트까지 영토는 넓었고, 주변에 위협하는 강대국도 없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졌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 왕이 하지 못한 일이 딱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기하 7장에 의하면 이제 모든 땅을 다 정복하고 자기 왕궁에서 안전하게 살게 된 다윗 왕이 하루는 예언자 나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것이겠지요. 자기는 화려한 왕궁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에 들어있어야 하니 하나님 앞에 송구스럽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물론 다윗 왕이 끝내 성전을 짓지 못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지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나서 연설을 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 다윗께서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으려고 생각하셨으나,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으려고 마음을 품은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집을 지을 사람은 네가 아니다. 네 몸에서 태어날 네 아들이 내 이름을 기릴 성전을 지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이렇게 내가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었으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기릴 이 성전을 지었으니, 주님께서는 이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는데, 나는 주님의 언약이 들어있는 궤를 놓아둘 장소를, 이렇게 마련하였습니다.“                (열왕기상 8:17-21)


  여러분,

  솔로몬 왕의 자부심과 긍지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요? 자기가 마침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솔로몬 자신을 선택하셔서 성전을 짓게 하셨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 솔로몬은 이것을 자랑할 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다고 그렇게도 큰소리쳤던 솔로몬 왕이 나중에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암몬 사람의 우상 밀곰을 따라가서, 주님 앞에서 악행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 다윗은 주님께 충성을 다하였으나, 솔로몬은 그렇지 못하였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산에 모압의 혐오스러운 우상 그모스를 섬기는 산당을 짓고, 암몬 자손의 혐오스러운 우상 몰렉을 섬기는 산당도 지었는데, 그는 그의 외국인 아내들이 하자는 대로, 그들의 신들에게 향을 피우며, 제사를 지냈다.”     (열왕기상 11:5-8)


  여러분!

  여기 나오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말로 ‘아세라’라고 불리는 여신으로서 그 유명한 바알 신의 부인이지요.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 그 둘이 부부신인 셈입니다.

  바알 신과 아세라 신, 이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폭풍과 번개, 천둥과 비의 신이었습니다. 폭풍이 비를 몰고 오고 농사짓는 일은 비에 달려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풍요의 신이었고, 따라서 번영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위한 제사, 곧 예배는 성적 다산 의식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신전에는 남창과 여창들이 있었으며, 적어도 그 신을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거기에는 도덕적인 순결함도 없었고, 사회적 정의감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고, 번영을 누리는 것이 신앙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성전 건축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몇 해 전인가 분당에서 800억 원짜리 교회건축을 하더니 얼마 전에는 1,200억 원짜리 건축공사를 한다고 해서 인터넷이 떠들썩했지요. 그러나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인지, 아니면 바알 신의 신전을 짓는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성전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그러한 성전에 들락거리는 교인들의 신앙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들도 모르게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타락한 성전종교, 제사종교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선 예언자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절들은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 왕(=아하시야 왕)에게 되돌아갔다. 왕이 그들에게 왜 그냥 돌아왔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왕에게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길을 가다가 웬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우리를 보내신 임금님에게 돌아가서, 주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으려 하다니,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는, 네가 올라가 누운 그 병상에서 일어나 내려오지 못하고, 분명히 죽고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을 만나서 그러한 말을 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는 분명히 디셉 사람 엘리야이다”

  하고 외쳤다.」                  (열왕기하 1:5-8)


  엘리야, 갈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 사백 쉰 명과 아세라 예언자 사백 명, 그러니까 팔백 쉰 명 대 일로 맞붙어서 싸워 이겼던 예언자 엘리야, 그가 타락한 성전종교, 부패한 제사종교를 없애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엘리야가 그 모든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열왕기상 18:21)


  그렇게 바알 신과 아세라 신에 대한 신앙을 깨뜨리고 하나님 신앙을 회복시키려 했던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올라갔다.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열왕기하 2:11-12)


  엘리야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기에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다시 이 땅에 나타나리라 믿었습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   (말라기서 4:5-6)


  자, 그렇다면 우상을 섬긴 죄의 값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북왕국과 남왕국의 멸망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고, 남왕국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북왕국은 앗시리아의 혼혈정책에 의해 민족성을 잃어갔고, 사마리아로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남왕국은 바빌론에 의해 대규모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그들이 당한 그 모든 고난이 바로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남왕국 유다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자 그렇게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벌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사랑하셔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언자를 우리는 제2 이사야라고 부르는데 그의 말씀이 이사야서 40-5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2 이사야는 포로로 잡혀와 낙심하고 절망한 유다 백성들을 향해 새롭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    (이사야서 40:1-5)


  그렇습니다.

  한 소리가 나타나서 외쳤습니다. 광야에 나타나서 외쳤습니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라.“


  그렇습니다.

  제2 이사야의 이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바알 신과 아세라 신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나님 신앙을 지켜냈던 엘리야가 다시 유대 광야에 나와서 외쳤습니다. 이름하여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바로 이 세례 요한이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했던 그 예언의 성취라고 증거합니다.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



  자, 그렇다면 도대체 왜 광야입니까? 이사야는 왜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라고 선포했으며, 세례 요한은 왜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을까요?

  광야, 정확히 말해서 바람이 갈대와 관목을 휘몰아치는 요르단 초원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광야는 도대체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요?


  광야, 그곳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태초의 창조가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세기 1: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곳, 바로 광야에서 그 위대한 창조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광야, 그곳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는 히브리인들을 탈출시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셨던 곳입니다.  

  “그 뒤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바로는 대답하였다.

  ‘그 주가 누구인데, 나더러 그의 말을 듣고서,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도 않겠다.’

  그들이 말하였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무서운 질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 것입니다.’ “    (출애굽기 5:1-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랑이 신부를 유인하듯이 그 백성을 광야로 유혹하셨다고 예언자 호세아는 선포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하나의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며 그 평화 가운데 인간과 동물, 하늘과 땅이 만납니다. 그리고 우주의 새로운 질서의 중심은 주께서 그 백성과 더불어 ‘정의와 공평, 사랑과 자비, 신실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혼인의 언약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새로운 민족으로 새로이 선택된 것인데, 광야에서의 재생은 심판을 거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그를 꾀어서,

  빈들로, 광야로 데리고 가겠다.

  거기에서 내가 그를

  다정한 말로 달래 주겠다.

  그런 다음에, 내가 거기에서

  포도원을 그에게 되돌려 주고,

  아골 평원이

  희망의 문이 되게 하면,

  그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거기에서 나를 기쁘게 대할 것이다.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호세아서 2:14-20)


  그렇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시작된 곳입니다.

  광야는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주시는 땅입니다.

  광야는 정의와 공평, 사랑과 자비, 신실함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수 백 억 원씩 들여 건축한 건물들을 자랑하지만 그 안에 계신 분이 과연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바알 신입니까?

  수 만, 수십 만 명씩 모이는 그 거룩한 교인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도 과연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바알 신입니까?

  오늘 한국교회가 크고 화려한 건물들을 자랑하고, 거기에 모이는 교인들의 숫자를 자랑하고, 거기에서 드려지는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자랑할 때 세례 요한은 다시 광야에서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어디입니까? 기도원입니까? 강원도 산골짜기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곳, 우리가 모인 이 자리가 광야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곳, 이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바로 이곳, 여기에서 지금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 이곳, 여기에서 지금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님을 만나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