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6 년도

2006. 11. 5 / 나사렛 사람 / 마태복음 2:19-23

람보 2 2015. 4. 2. 15:55

나사렛 사람


마태복음 2장 19-23절 / 2006년 11월 5일



  그야말로 잔인무도하기로 소문난 헤롯 대왕은 부인도 많이 두었으니 이름이 알려진 부인만 여덟 명이고, 그밖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인은 도대체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여러 부인에게서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 중에서 위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왕위를 노린다는 누명을 쓰고 아버지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헤롯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 대왕의 아들들 중에서 세 아들에게 아버지의 영토를 나누어 주고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헤롯 대왕이 누리던 왕의 칭호는 받지 못했습니다.


  먼저 아켈라오라는 아들은 분봉왕 혹은 ‘국가의 지배자’가 되어 유대의 중심지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해안 평야지대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보다도 더 잔인한 군주로 알려졌고, 자신이 거느리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로마황제로부터 가망없는 무능한 자로 판명되어 기원후 6년에 로마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아켈라오는 분봉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당시 고울 지방이라고 불리던 유럽의 비엔나로 유배되었고, 거기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음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되어 베뢰아 지역까지 다스렸는데 아켈라오가 무능하면서도 잔인한 군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능하면서도 비교적 온건한 군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전 생애를 포함하는 40년 이상, 그러니까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맡은 지역을 다스렸는데 세례 요한을 처형한 사건과 예수의 죽음에 관여한 것으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세 번째가 빌립인데 그는 아버지 헤롯의 영토 중에서 갈릴리 바다 북동쪽편, 그러니까 골란고원과 바산 지역으로 알려진 오늘날의 시리아 일대를 다스렸는데 그의 이복동생인 헤롯 안티파스가 바로 이 사람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어쨌든 헤롯 대왕이 죽고 그의 아들들이 뒤를 이어 분봉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이집트에 가 있는 요셉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헤롯이 죽은 뒤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습니다.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그래서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연히 고향이고 살던 곳이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본문에 의하면 요셉은, 아켈라오가 그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서 유대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물러가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태복음 기자는 이런 가사를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여러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딘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 잔인무도한 헤롯 대왕이 죽고 난 후 세 아들이 왕이 되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테고 또 아켈라오가 이제 막 왕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가 잔인한 군주가 될지를 요셉이 알았을까요? 또 베들레헴이라는 지역이 위험하다면 나사렛은 안전한 지역이라고 누가 보장하나요?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나사렛은 베들레헴과 달리 갈릴리 지역에 속한 촌동네라는 사실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마을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마을들 중에서도 작은 편인데 중심도시인 세포리스로부터 남동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세포리스는 헤롯 대왕이 세운 군사요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헤롯 대왕의 거점 중의 하나인 곳이지요.

  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이 죽자 갈릴리의 민중지도자였던 헤제키야의 아들 유다가 민중과 더불어 이 도시를 점령하여 봉기의 거점으로 삼았던 도시였습니다. 물론 이 봉기는 로마에 의해서 곧 진압되었는데, 이때 세포리스는 초토화되었고, 그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가는 비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나사렛은 바로 이 세포리스와 가까운 마을이었기에 나사렛의 젊은이들도 유다의 봉기에 휩쓸렸고,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거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은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찍혔고, 그래서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으며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한이 많은 고장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나다나엘같이 점잖고 신실한 사람이 친구인 빌립에게 이런 말까지 했겠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복음 1:46)

  그런데 요셉이 하필이면 아기를 데리고 그 문제의 도시 나사렛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보다 더 큰 문제는 마태복음 기자가 인용한 구절, 즉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는 예언의 말씀이 구약성경이나 구약외경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마태복음 기자는 구약 예언자들의 말이라고 인용했는데 실상은 구약 그 어디에도 이 구절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건을 통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천사가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 했다는 말, 곧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너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그래서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 등에 태우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갔다.“ 

                                                               (출애굽기 4:19-20)

  이 두 본문은 너무나 흡사합니다. 마치 마태복음 기자가 출애굽기의 본문을 그대로 베낀듯 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태복음 기자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선구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 즉 자기 백성의 구원자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모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즉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바로 제 2의 모세로서 자기 백성의 구원자요, 새로운 율법을 받은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유명한 설교말씀을 산상에서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아기 예수는 고향인 유다 지방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멀고도 험한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간 것으로 마태는 기록했던가요? 그것은 바로 마태에 의하면 당시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유다는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방이요 이방인의 땅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갈릴리는 메시아를 영접했다는 표현입니다. 바로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신 후 맨 처음 사역을 시작하시던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 4:12-17)


  그렇습니다.

  이제 이집트로 갔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가 유대 땅으로 가지 않고 굳이 갈릴리, 나사렛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그 유대와 갈릴리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나 마가와 달리 유독 마태복음에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또 열 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서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헤롯과 같은 권력자들과 대제사장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있는 유다 지방은 예수를, 메시아를 거부했습니다. 아니 단순히 거부한 정도가 아니라 잡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땅이라고 멸시받고, 반역의 땅이라고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은 예수를, 메시아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니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가실 곳은 유다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리 나사렛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 맨 끝에 나오는 인용구, 즉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되어 있는 이 구절은 사실은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희랍어 원문은 ‘Ναζωραίος’(Nazoraios)인데 이는 정확히 표현한다면 ‘나조라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문맥상으로 보아 ‘나사렛 사람들'(Nazarenos)이라고 번역된 것인데 학자들 중에는 여기서 조금 다른 뜻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 유명한 나지르인(nazireen), 곧 나실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사사기에 나오는 대로 단 지파의 가족 가운데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임신을 할 수 없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보아라, 네가 지금까지는 임신할 수 없어서 아이를 낳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조심하여,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말아라. 부정한 것은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사사기 13:3-5)


  여러분!

  이 아기가 누구인지 아시지요? 바로 천하장사 삼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방시킨 사람, 삼손. 그러니까 예수는 삼손처럼 어릴 적부터 하나님께 ‘봉헌된 자’요,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나지르인’이라는 단어는 ‘박해를 받는 이들’을 뜻하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언자 아모스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의 자손 가운데서

  예언자가 나오게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 가운데서

  나실 사람이 나오게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아,

  사실이 그러하지 아니하냐?


  그러나 너희는

  나실 사람에게 포도주를 먹이고,

  예언자에게는

  예언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아모스서 2:11-12)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주를 먹어서는 안 되는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강제로 먹임으로써 핍박을 가하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도 박해를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신다는 뜻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미리 보여준다는 해석이지요.


  또한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유대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벨릭스 총독에게 내려와서 사도 바울을 고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사도행전 24:5)


  여기 나오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라는 표현을 개역성경에서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는데 희랍어로는 ‘Ναζωραίων’(Nazoraion)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례자’, ‘준수자’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대로 예수는 세례를 통해 당신의 사명을 부여받았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형제들과의 강한 유대성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장차 그리스도인들도 ‘나사렛 사람’이라는 호칭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리하자면 오늘의 본문은 결코 단순히 예수님과 그의 부모가 이집트에서 나사렛으로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를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영접한 것은 유대와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인 갈릴리라고 하는 것, 구원의 역사는 정치나 종교 중심지가 아닌 이방인들, 백성들의 땅에서 시작되고 또 완성된다는 것, 예수는 모세와 같이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해방자라는 것, 또한 예수는 나면서부터 봉헌된 자요, 당신을 믿는 자들과 언제나 함께 하시며 형제로서의 유대감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아주 짧은 부분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아주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도입부를 다 통과했습니다. 예수는 이미 박해를 받은 새로운 모세입니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요, 임마누엘이요, 자기 백성의 역사와 그들의 유배생활, 그리고 출애굽의 역사를 받아들인 형제입니다. 그러나 그의 유다인 형제들 중 일부는 예수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예수가 시작하려고 하는 새로운 출애굽 사건에 동참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역사 안으로 과감하게 들어가셔서 새로운 출애굽 사건의 예비단계를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시간부터 출애굽 사건의 예비단계를 하나하나 밟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다함께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예수와 함께 출애굽의 길을 걸어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줄 믿고 용기를 내어 고난을 이겨내고 전진합시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