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6 년도

2006. 10. 22 / 이집트로 가는 길 / 마태복음 2:13-15

람보 2 2015. 4. 2. 00:00

이집트로 가는 길


마태복음 2장 13-15절 / 2006년 10월 22일



  그 옛날 구약성서의 배경이 되던 시대에서 이집트는 가나안 땅에서 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달아나야 했던 가나안 사람들의 전통적인 피난처였습니다. 특히 가나안의 권력자들에게 쫓겨 달아나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집트는 가장 가깝기도 하고, 또 숨어들기도 좋은 곳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전성기라고 일컬어지는 때는 솔로몬 왕 때였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영토는 가장 넓어졌습니다. 위로는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아래로는 이집트 국경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넓은 영토를 점령했으니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주시마 약속하셨던 땅을 차지한 것이 바로 이때였습니다. 더구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방 그 어디에도 강대국이 없었기에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아주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짓고, 그것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궁전도 지었습니다. 조공으로 들어오는 재물들로 인해 먹고 마시는 것이 넘쳐났습니다. 당시 얼마나 재물이 넘쳐났는지를 나타내는 성경구절이 있을 정도입니다.

  “솔로몬 왕이 마시는 데 쓰는 모든 그릇은 금으로 되어 있었고, ‘레바논 수풀 궁’에 있는 그릇도 모두 순금이며, 은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은 귀금속 축에 들지도 못하였다.”   (열왕기상 10:21


  그러나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고, 전제군주로서 폭정을 행하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있는 용사라고 알려진 여로보암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다스릴 왕으로 삼으시겠다고 예언자 아히야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히야는 새 옷을 입고 있었는데 들에서 여로보암을 만나자 그가 입고 있던 새 옷을 찢어서, 열 두 조각을 내고, 여로보암에게 말하였습니다.

  “열 조각은 그대가 가지십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내가 솔로몬의 왕국을 찢어서, 열 지파를 너에게 준다. 그리고 한 지파는 내 종 다윗을 생각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내가 선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생각해서, 솔로몬이 다스리도록 그대로 남겨 둔다.’ “    (열왕기상 11:31-32)


  솔로몬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었을까요? 물론, 당연히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니, 여로보암은 일어나서 이집트 왕 시삭에게로 도망하여,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다.”    (열왕기상 11:40)


  그렇습니다. 이집트는 피난처였습니다. 특히 독재자들에 의해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로 도망가던 곳이 바로 이집트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사건이 오늘의 본문에서도 일어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꿈에 헤롯 왕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헤롯 왕은 동방박사들이 돌아와서 왕으로 태어난 아기가 어디 있는지 들으려고 했습니다. 말로는 자기도 가서 경배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죽이려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요. 박사들이 오지 않자 해롯은 펄쩍 뛰며 아기를 찾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다시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습니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와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그래서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였고, 헤롯 왕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고 성경 저자는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도 역시 헤롯 왕으로부터 가해지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을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집트는,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는 단순히 피난처 구실만 하던 장소입니까? 아닙니다. 이집트는 피난처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보다는 억압의 상징이자 탈출해야 하는 악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출애굽 사건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왕이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수가 더욱 불어날 것이고, 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들과 합세하여 우리를 치고, 이 땅에서 떠나갈 것이다.’ “     (출애굽기 1:8-10)


  그래서 이집트의 왕이, 파라오가 취한 정책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우선은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게 하고,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잠시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자 두 번째로 쓴 정책이 산파들을 시켜 히브리인의 산모들이 아기를 낳을 때에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이집트의 왕이 내린 명령, 그것이 바로 히브리인들의 사내아이들을 강물에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 두어라.’ “

                                                            (출애굽기 1:22)


  그로부터 8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켜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     (출애굽기 3:7-10)


  그런데 여러분!

  여기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단순히 많은 민족 중의 하나로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 그것도 당신의 맏아들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바로에게 말하여라.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내가 너에게 나의 아들을 놓아 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하였건만, 너는 그를 놓아 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게 하겠다.’ ”    (출애굽기 4:22-2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아들, 그것도 맏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아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것을 보시기에 참고 견디기 어려우셔서 마침내 손을 들어 바로를 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와 고통으로부터 건져내셨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합니까? 물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신실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며,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갔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일찍이 예언자 호세아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

  짐승을 잡아서

  바알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며,

  온갖 신상들에게

  향을 피워서 바쳤지만,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휩쓸고 지나갈 때에,

  성문 빗장이 부서질 것이다.

  그들이 헛된 계획을 세웠으니

  칼이 그들을 모조리 삼킬 것이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나를 배반하고,

  바알을 불러 호소하지만,

  그가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못할 것이다.“     (호세아서 11:1-7)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맏아들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했고, 하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아들, 예수를 이집트로 보내십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새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이집트로 데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헤롯 왕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불러내기 위해서 행하신 일이고, 이를 통해 일찍이 예언자 호세아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행하신 일이라고 복음서 저자는 증거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2:15)


  그렇습니다.

  이제 아기 예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요셉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곳,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매맞고, 굶주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바로 그이집트로 내려갑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부르시면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가 이집트로 가는 길, 그것은 바로 예수의 일생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앞으로 예수가 걸어가실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가 걸아가고 있는 그 길을, 이집트로 내려가는 그 길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내려가는데 있어서 가장 빠른 길은 지중해 바닷가를 끼고 가는 길입니다. 보통 알려져 있기로는 대상들이 그 길을 다닐 때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물론 대상들은 낙타를 타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일행이 낙타를 타고 갔을 리는 없습니다. 도저히 그럴 형편이 되지 못하지요. 유대의 전설에 의하면 모세가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 등에 태우고 이집트로 돌아갔던 것처럼(출애굽기 4:20 참조) 요셉도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나귀에 태우고 갔을 거라고 합니다마는 성경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요셉 일행은 아마도 걸어갔을 것이고, 그것도 사막과 같은 광야 길을 걸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급하게 떠나야 했으니 빵이나 물이 제대로 준비되었을 리 없고, 입을 옷이 제대로 준비되었을 리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이제 막 아기를 출산한 산모의 몸이고, 예수는 갓 태어난 아기니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에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지만 그야말로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길이었겠는지 쉽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가 고난의 땅 이집트를 향해 내려간 것처럼 앞으로 다가올 예수의 일생은 바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태복음 8:20)고 친히 말씀하실 만큼 예수는 배고프고 피곤한 삶을 사셨습니다. 끊임없이 박해받고, 비난당하고, 무시당하다가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삶이 바로 예수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일생은 이집트에 있던 히브리인들의 삶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일생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집트로 가는 길은 바로 예수께서 “고난을 통한 구원의 길”을 걸어가시는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의 일생은 이집트로 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희생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예수를 고난과 십자가에서 부활과 생명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세주가 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이 이집트로 가는 길처럼 힘들고 어려운 길인지 모릅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부활과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이 믿음 가지고 마지막까지 주님과 함께 걷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