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년도

1995. 8. 6 / 무엇을 보는가? / 마가복음 4:1-9

람보 2 2015. 3. 19. 21:33

무엇을 보는가? (1995.8.6)

무엇을 보는가?

마가복음4:1-9/ 1995. 8. 6.

한 농부가 씨를 뿌리러 밭에 나갔습니다. 씨를 뿌리는 일이야말로 농사의 시작 이니까 그는 신이 났습니다. 씨를 뿌리면 가을에 많은 것을 거둘 터이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잠시 후 밭에 도착했고 밭을 한 바퀴 둘러 본 농부는 곧 씨를 뿌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씨를 아무렇게나 막 뿌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뿌린 씨앗 중에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졌고 어떤 것은 돌짝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덜어졌고 그가 뿌린 씨앗 중의 극히 적은 일부분만이 옥토에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 농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그냥 씨만 뿌려댈 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멍청한 농부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 그 귀한 씨앗을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과 같은 곳에 마구 뿌리다니 참으로 바보 같은 농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스라엘의 파종법, 소위 씨뿌리는 방법은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 농부들은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이랑을 만듭니다. 곧 밭을 먼저 가는 것입니다. 이랑을 만들고 이랑과 이랑 사이의 골에 파종하는 것을 견종법이라 하고 이랑에 씨를 뿌리는 것을 농종법이라고 합니다. 전혀 이랑을 짓지 않고 밭을 갈고 평평하게 고른 다음 그 위에 흩어뿌림하는 것을 만종법이라 합니다. 이 방법들은 모두 밭을 먼저 갈고 씨를 뿌리는 방법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씨를 뿌린 다음에 밭을 갑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도 아직 갈지 않은 밭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가 왜 길 위에 씨를 뿌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매년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만큼 땅이 비옥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게 두 번 거푸 농사를 지으면 한 번은 땅을 쉬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사람들이 쉬는 밭 위를 걸어 다녔기 때문에 밭에 길이 났고 이 길 위에 씨를 의도적으로 뿌려집니다. 왜냐하면 씨가 뿌려진 후에 갈아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말라 있는 휴경지의 가시덤불에도 의도적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또한 씨들이 돌짝밭에 떨어지는 것도 이스라엘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석회암 암반이 흙으로 얇게 덮여 있기 때문에 그곳이 옥토인지 돌밭인지 구분하기가 힘듭니다. 밭을 갈 때에야 비로소 보습날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밑에 돌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씨뿌리는 사람은 아무 주저함 없이 길 위에, 돌짝밭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옥토가 좁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길 위에 뿌린다고?” 돌짝밭 가시덤불 위에도 뿌린다고? 그 사람 넓은 밭을 일궈 내려는 욕심을 가졌구만!“

자, 이제 씨뿌리는 일은 끝났습니다. 남은 일은 하나 땅을 갈아엎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만 농부는 헛수고를 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농부가 밭을 갈기 전에 이미 새들이 와서 길 위에 떨어진 씨앗을 먹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는 조금 이상 합니다. 밭에 씨앗을 뿌린 농부가 반드시 밭을 갈아엎었다면 적어도 돌짝밭의 가시덤불은 뒤집어엎어졌을 터인데, 그러면 돌짝밭의 돌맹이들과 가시덤불은 없어졌을 것이고 그곳에 떨어진 씨앗들은 잘 자랐을 터인데 이야기는 엉뚱하게 전개됩니다.
길 위에 떨어진 씨앗들은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고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들은 흙이 깊지 않으니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고 그래서 곧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들은 곡식보다 으레 빨리 자라는 잡초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며느리 밑씻개”라는 이름의 잡초를 아십니까? 시골 집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잡초인데 가시가 너무나 많아서 도저히 손을 대기 힘든 풀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이름이 며느리밑씻개라니, 그 사연이 많을 듯 합니다. 그런데 그 풀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그야말로 정신없이 자랍니다. 비료를 주지 않고 물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잘 자랍니다.

어쨌든 곡식이 자라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적들이 있습니다. 가시떨기, 잡초, 가뭄,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 메뚜기떼, 또는 해층 등 참으로 많은 적들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곡식이 자라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참으로 바보 같은 농부입니다. 길에다 씨를 뿌렸으면 곧바로 땅을 갈아엎어서 새가 먹지 못하게 해야 했고 돌맹이나 가시덤불은 치워 버려서 곡식이 자라도록 했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있다가 다 잃어 버리고 그만 옥토에 떨어진 것 조금만 거두다니. 참으로 바보같은 농부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농부는 농사를 망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은 그 농부를 생각하며 딱했고 혀를 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이 비유를 왜 말씀하신 걸까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비유에 나오는 농부는 과연 누구인가요? 한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이 비유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분께서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한 분이시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또 믿고 있습니다. 그분이 비록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그러나 부활 하셨고 이후 그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셔서 오늘 우리까지도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그분은 틀림없이 성공한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에도 당연히 하시는 일 마다 잘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아주 수월하게 이루어 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의 본문이 속해 있는 마가복음을 정확히 읽어 보십시오. 마가복음은 16장까지로 되어 있는 그래서 네 복음서 중에서는 가장 짧은 책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인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4장에 나오니까 이 이야기는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는 거의 초기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마태나 누가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나 족보 이야기는 다 생략한 채 곧바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는 곧이어 예수의 공생에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1장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과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장면을 기록해 놓은 마가는 2장에서 곧 예수를 비판하는 서기관들의 모습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뜯고 내려 보내자 예수께서는 그 병자를 향해“네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이 예수를 비판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이어서 예수께서 세리였던 레위를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어 왔고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 잘라먹은 사건을 거쳐 또다시 안식일에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을 때 에는 상황이 극도로 나빠졌으니 이때의 상황을 마가복음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더라”
거의 복음사역 초기에 이미 바리새인 헤롯당들이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3장 21절에 의하면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라고 되어 있고, 31절에는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라고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마저도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고자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과 정치지도자 그룹인 헤롯당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고 또 예수를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할 입장인 가족이나 친척들마저도 예수를 이해하거나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예수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려는, 그래서 활동을 못하게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분의 입장은 한마디로 사면초가였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예수, 당신의 노력은 헛된 것이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것이 아닌가?
예수,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 있는가?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 등장하면서 맨 처음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 당신이 꿈꾸는 나라, 그것은 헛된 꿈일 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나라다

마가복음 6:5-6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예수의 설교는 성과가 없어 보이고 적대자들은 늘어나고 요한복음 6:60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도 떠나가는 상황 속에서
예수, 당신은 이제 실패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맞습니다. 겉만 보면 맞습니다. 마치 밭에 나가 곡식을 뿌린 농부의 수고가 길가밭, 돌짝밭, 가시덤불에 덜어진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했기에 헛수고가 된 것처럼 예수의 노력도, 예수의 말씀 선포도 헛수고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고가 헛된 것이라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길가밭, 돌짝밭, 가시덤불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정적으로 한 가지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분은 좋은 땅에 떨어진 곡식들이 자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세상은 그저 되는대로 살면 그뿐이라고 말해버리지만 그래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에 빠져 살아 가지만 그래서 결국 사탄에게 넘어 가지만 예수, 그분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꿈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분은 끝내 꿈을 포기하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일부만이 옥토에 떨어졌기에 별 기대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지극히 보잘 것 없고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십자가 위에서 결국은 죽은 나사렛의 목수와 열 두 명의 겁 많고 단순한 갈릴리 노동자들로 시작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시작이었지만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었습니다.

시작은 지극히 미약하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 어느 세력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왕국을 예수는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세상의 민족들을 포용할 그의 권세와 왕국을 건설할 것을 예수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 겨자씨비유, 누룩비유, 자라나는 씨의 비유들을 통해 지극히 작은 씨앗과 크게 자라는 나무를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바로 “무엇을 보는가” 입니다.
우리가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일만 보면서, 당장 내게 이익이 될 것만 보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조건만 따지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사탄이 즉시 와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당장 내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참 생명을 마음에 간직하고 이 땅위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예수를 따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며칠 전 신문 한 쪽 구석에서 참으로 서글픈 기사를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관심도 갖지 않을 기사였지만 그러나 저에게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인즉,
독립기념관 측에 의하면 3. 1. 만세 운동의 주역으로 알려 졌던 33인 가운데 박희도, 정춘수 두 사람이 후에 친일파였던 것이 밝혀졌으므로 그들의 기록에 그 내용을 싣고 알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두 사람 중 정춘수라는 분은 바로 우리교회의 15대와 17대 담임목사를 역임하고 후에 감리교 감독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 교회 역사책에도 그 분의 친일행적을 취급하였지만 그런 분들이 과연 역사를 조금만 제대로 보았다면 그렇게까지 변절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결국은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보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진정 믿었다면.
아니 사실은 정춘수 감독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바라보았던,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세상인가요?
돈보다 사람이 소중한 세상.
법률조항보다 인권이 우선되는 세상
힘이 정의가 아니라 정의가 힘인 세상.
부자는 교만하지 않고 가난한 자는 비굴하지 않은 세상,
생각과 사상, 고향과 직업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싸우지 않은 세상
직위나 학벌에 의해서 보다 삶의 가치관이 옳은가 그른가로 사람이 평가 받는 세상.
내가 먹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보기 전에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내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아니라 속이 깨끗한 사람이 우대받는 세상
자기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들이 심판받는 세상
낮선 나그네에게 물 한 그릇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멸시받지 않는 세상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즉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믿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
그리고 끝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실 것이라고 믿는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축복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의 한국 교회에 소망이 있습니까? 민족해방 50년인 올해를 벌써 몇 년 전에 희년으로 선포해 놓고 통일의 기원으로 살겠다고 말해 놓고도 희년 예배를 누가 주관하느냐의 문제로 또다시 둘로 갈라진 한국교회에 과연 소망이 있는가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마음속에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예수의 꿈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가요?
아니 한국교회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 오늘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우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과연 하나님의 날에 대한 꿈이 있는가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예수의 꿈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가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 우리의 자손들이 살아갈 이 나라가 진정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노력 하며 살아 왔는가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우리를 향해 묻고 있습니다.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 너희들은 꿈꾸고 있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너희들은 얼마나 애썼는가?
하나님의 나라,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헛수고 하지 마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잃지 말고 나 하나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는 알곡이 되어 하나님나라 건설의 크나큰 일꾼이 되고 우리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초석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