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2011.5.1)
본문) 요한복음 20:19-23
“그 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제가 사는 아파트 편지꽂이에는 참으로 많은 전도지들이 들어옵니다. 저희 동네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겠지요.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의 전도지가 꽂혀 있을 때도 있지만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교회의 전도지가 꽂혀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제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큰 교회에서 보내는 전도지들이 시도 때도 없이 꽂혀 있습니다. 물론 저는 그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꼼꼼히 다 읽어봅니다마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참 궁금합니다.
그렇게 들어오는 전도지들 중에 매주 빠짐없이, 참으로 열심히 들어오는 교회신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신문은 우리나라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다음으로 큰,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크고 따라서 세계적으로 보아도 두 번째로 큰 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입니다.
1면에 교인들의 간증과 담임목사님의 신앙칼럼이 실려 있고 2면에는 일주일치 가정예배문이 나옵니다. 3면에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나오고 4면은 교회소식입니다. 한 마디로 그 교회 담임목사님에 대한 끔찍한 존경과 경외감이 느껴지는데 심지어 어떤 행사에 대한 소식을 기록하면서도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조 ㅇㅇ 목사님께서’ 하고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거기에 나오는 설교문을 매번 빼놓지 않고 읽는 편인데 그 목사님은 철저하게 첫째, 둘째, 셋째 하고 논지를 풀어갑니다. 결론도 첫째, 둘째, 셋째 하고 마무리짓는 것이 저하고는 영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교회는 엄청 크고, 저는 너무나 작은 교회를 한다는 점에서 별로 시비를 걸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난주에 온 설교제목이 바로 “부활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지난주가 부활주일이었으니까 당연히 그에 걸맞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분은 거기에서 먼저 부활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는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계절의 변화와 생명의 활동은 부활이 아니다.
둘째, 회복은 부활이 아니다.
셋째, 소생은 부활이 아니다.
넷째, 환생은 부활이 아니다.
맞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히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부활에 관계되는 성경구절들을 다 인용하여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으로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저는 그 설교를 읽으면서 부활에 대한 교리적 설명은 잘 보았지만 무언가 마음이 허전하고, 헛헛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제 설교를 이메일이나 홈페이지에서 읽는 분들이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라는 질문을 새삼 던지게 되었습니다. 제 설교도 역시 공허하고,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제 설교를 읽으시는 분들 중에 간혹 은혜받았다고 답장해 주는 분들이 계십니다마는 과연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읽는 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자, 부활절후 둘째주일입니다. 조 ㅇㅇ 목사님이 설교제목으로 삼은 것처럼 부활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저는 이 시간 예수께서 붙잡히고 십자가에 달리신 당시 제자들에게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던가요? 그 긴박했던 순간에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요?
한 마디로 그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도망갔습니다. 마태복음 26:56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마가복음 14장에 가면 참으로 기가 막힌 장면까지 나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낫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마가복음 14:50-52)
여기 나오는 젊은이가 누구인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재판받으시는 곳에 몰래 들어가 있었던 것처럼 이 젊은이도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는 홑이불을 걸치고 있었는데 여기 나오는 홑이불이란 큰 수건 같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속옷을 입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홑이불 하나 두르고 있다가 낮에는 옷으로 사용하고, 밤에는 이불로 덮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겁이 났으면 낮에는 겉옷으로 입고 밤에는 이불로 사용하는 그 겉옷을 벗어 던져버리고, 알몸으로 도망갔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당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겁먹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도망가는 제자들.
그렇다면 도망간 제자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아주 흩어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망을 하기는 했지만 어딘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숨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 사도행전에 그 증거가 나와 있습니다.
우선 마가복음 16장을 보십시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를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
(마가복음 16:9-11)
그렇습니다.
그들은 도망은 갔지만 흩어지지 않고 어딘가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딘가에 모여 있었다는 것은 요한복음 20:10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렇다면 그곳은 어디인가? 그곳이 예루살렘인 것은 분명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복음 24:33)
그러니까 그들이 모여 있던 곳은 예루살렘이었고, 우리가 흔히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서, 안식일에도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사도행전 1:12-13)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붙잡히신 후에 도망갔지만 흩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 다락방, 아마도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자주 모였을 그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성 안에 있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어떤 상태였던가요? 두 가지 기록이 남아 있으니 하나는 슬퍼하며 울고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마가 16:10)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고, 그저 모여서 슬퍼하며 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도 붙잡혀 가서 죽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둠의 권세가 판을 치는 때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제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런 상황의 한복판으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놀라운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날, 곧 주간의 첫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 참으로 결정적인 단어들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로 ‘샬롬’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자 그것을 확인한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두려움과 슬픔은 사라지고 평화와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걸어 잠글 일도 없고, 슬픔에 사로잡혀 눈물 흘릴 일도 없어졌습니다. 주님이 살아나셨고, 함께 계시기에 제자들은 참된 평화를 누리며,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부활이란 예수와 함께 누리는 평화요, 기쁨입니다. 그것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요,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교리적으로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또 아무리 부활에 관한 성경구절을 안다 하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부활인지 아닌지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교리적으로 깨우쳐 주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선포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평화와 기쁨은 외부의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 분명히 나오는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감옥에 집어넣고 협박했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의 지지자들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모두 시기심에 가득 차서 들고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사도행전 5:17)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주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5:40-42)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이나 부활하시고 난 후에나 박해가 있고, 죽음의 위협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환경이나 상황만 보면 제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에 그들은 두려움과 슬픔을 떨쳐버리고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담대하게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어떠힌 박해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셨고, 제자들이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리고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여러분!
사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우시지요? 앞날이 어떻게 될지 문득문득 두렵기도 하고,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 슬픔에 사로잡힐 때가 있지요? 바로 그때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음성 들으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고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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