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요 1:35-42 / 청년부 헌신예배
여러분!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어떤 제목을 정할까 하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대개의 경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도 오늘 무슨 내용이겠다 하고 생각나게 되는데 저는 공연히 그럴듯한 말을 붙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저기 성가대에 앉아 있는 제 짝이 제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하는 말이 “제목은 그럴 듯하다”입니다.
제가 수표교 교회에 와서 맨 처음에 한 설교의 제목이 “꿈나무”였고, 눈동자, 침묵, 환성, 아기와 십자가, 그 다음은? 마주침, 메아리, 모험, 누가 피리를 부는가? 시작은 힘들지라도, 옥합은 깨어져야, 가건물은 헐어버리고, 두 가지 두려움 등 대개 제목은 그럴 듯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목을 “타는 목마름으로”라고 정하려 한다고 그랬더니 대뜸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한 마디로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제목이 나가면 내용을 볼 것도 없이 누군가 조사할 것이고 그러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70년대 일이지 지금 같은 80년대는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여러분! 특히 나이가 드신 성도 여러분!
왜 이렇게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제목을 내거는 것부터 조심스러워지고 두려워지는지 아시나요? 설교 제목부터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정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임을 보고 계신가요? 오늘의 제목 “타는 목마름으로”는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한없는 고민과 갈등과 좌절을 겪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제목입니다. 거의 매일 최루탄가스에 눈물 흘려야 하고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제복을 입은 , 혹은 머리를 짧게 깍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검문당하고 가방을 조사받아야 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애절한 소망이 담겨있는 노래의 제목입니다. 제가 가사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1.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2. 오늘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나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넓은 땅은 겉으로 보기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스러운 듯 했습니다. 로마라는 강대국이 이태리 반도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점령하고 하나의 제국을 형성했습니다. 도로는 발달했고, 건축술이 뛰어나 곳곳에 도시들이 세워졌습니다. 물자는 풍부했고, 귀족들의 생활은 부유하고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로마 한 구석에 박혀 있으면서 끝내 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특하게 살아가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유대인들입니다.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여 뽐내는 사람들, 하나님이 자기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아브라함을 통해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들, 일찍이 애굽에서 고생할 때 자기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셨다고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는 역사상 그 어느 나라보다도 축복받은 나라였다고 믿는 사람들, 이름하여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그것이 각각 망한 후 그들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샤, 알렉산더대왕, 이집트, 시리아, 로마의 지배를 차례차례 받아왔습니다. 그러기를 수백 년. 수많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으면서도 그들이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은 오직 하나, 선민사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은 어렵게, 힘들게, 고생스럽게 살아가지만 틀림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다“ 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가,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 예언자들의 음성도 그쳤습니다. 독립의 희망은 사라졌고, 로마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져 갔습니다. 로마의 앞잡이 헤롯의 통치는 점점 더 교활해지고 숨을 조여 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차츰 차츰 지치기 시작했고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좌절했고 꿈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셨다.
약속은 사라졌다.
독립의 꿈은 사라졌다.
메시아는 안 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갈증으로 시달렸습니다. 하늘에서는 아무 징조도 보이지 않았고, 예언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속은 답답했고 목은 탔습니다. 할아버지들은 자기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메시아 이야기를 손자들에게 해 주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젠 다 끝났다.”
바로 이런 시대에 오늘의 주인공 안드레는 등장합니다. 그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부모님은 안 계셨지만 형은 하나 있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형은 성질이 급하고 우락부락하기는 했지만 고기 잡는 데는 도사였습니다. 형은 결혼해서 가정을 가졌고 이제 안드레가 가정을 이루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고기 잡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은 왜 이렇게 불행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선민이라고 하는데 과연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아니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잊어버리고 계신 것은 아닌가?
메시아는 언제 올 것인가?
결국 메시아는 안 오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뜨리실 리가 없습니다. 약속하신 메시아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안드레, 그는 그 당시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마음속에 메시아는 틀림없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이 타게 기다린 젊은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광야에서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자 곧 광야로 나아가 그의 제자기 되었고, 또 스승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하자 곧 예수를 따라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렇게도 애타게 부르는 노래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 민주주의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 존엄성을 누리면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제도가 아니던가요?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가득 찬 꿈은 우리와 더불어 이 땅에서 한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누리면서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확신 있게 해 주는 것,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출세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 부당하게 희생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요?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높은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 메워지고 굽은 길이 곧아지는 사회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민주주의여 만세”를 소리쳐 부르는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위대한 꿈을,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젊은이들이 절규하는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외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끊을 수 없는 믿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노래를 통해 나만의 출세나 부귀영화나 일신의 안일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진정한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드레는 그야말로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고통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목마르게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세례 요한을 만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목마름을 해결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의 대부분이 유초등부 때는 숫자가 많다가 중등부에 가면 좀 줄고 고등부에 가면 좀 더 줄고 대학부와 청년부에 가면 대폭 줄어듭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중고등부 때 보고 듣고 배운 이야기와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듣고 보고 배우는 현실이 너무 다르고, 또 이 때 우리 어른들이 보여주는 삶이 너무 말과 다른 것을 그들이 깨닫게 되기 때문은 아닌가요?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있는 고뇌와 꿈과 미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잘 먹어서 공부하게 해 주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하면서 얌전히 따라오라고만 하다가 결국은 젊은이들을 놓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몇 명 안 되는 젊은이들이 앉아있지만 저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안드레가 간직했던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을 봅니다. 이들의 눈동자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을 봅니다. 안드레와 같이 진리에 목말라 하고 진리이신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열심을 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비신앙적이거나 버릇이 없거나 생각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열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 앉아서 헌신예배를 드리는 젊은 친구들은 너무나 귀한 우리의 보배들이고 우리 교회의 기둥들이고 우리 교회의 신앙을 물려받을 후계자들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갈 역군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 분들에게 우리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헌신예배를 드리시는 청년부 여러분!
우리 모두 언제나 안드레를 생각합시다. 안드레가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늘 생각합시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보였던 삶의 모습을 늘 생각합시다. 그것은 바로 희생과 봉사의 삶입니다.
안드레! 그는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중의 하나였습니다.
안드레! 그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최초의 그리스도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요 6:5-9에서 어린 아이를 예수께로 인도할 때나 요 12:20-22에서 헬라인들을 예수께로 인도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영광스러운 자리에는 앉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늘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안드레 행전이라는 외경에 의하면 아가야 지방에서 복음을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꿈과 희망을 찾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꼭 기억할 것은 그 목마름을 채우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애쓰는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노력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것입니다. 또 하나님 없이, 희생과 봉사 없이 인간들만의 힘으로 이상천국을 만들겠다는 잘못된 꿈을 꾸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아득히 멀어 보이고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하더라도 희생과 봉사의 길만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해 불행한 이웃들의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가야합니다. 우리가 간직한 꿈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젊은이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 1:35-42 / 청년부 헌신예배
여러분!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어떤 제목을 정할까 하고 많은 생각을 합니다. 대개의 경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도 오늘 무슨 내용이겠다 하고 생각나게 되는데 저는 공연히 그럴듯한 말을 붙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저기 성가대에 앉아 있는 제 짝이 제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하는 말이 “제목은 그럴 듯하다”입니다.
제가 수표교 교회에 와서 맨 처음에 한 설교의 제목이 “꿈나무”였고, 눈동자, 침묵, 환성, 아기와 십자가, 그 다음은? 마주침, 메아리, 모험, 누가 피리를 부는가? 시작은 힘들지라도, 옥합은 깨어져야, 가건물은 헐어버리고, 두 가지 두려움 등 대개 제목은 그럴 듯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목을 “타는 목마름으로”라고 정하려 한다고 그랬더니 대뜸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한 마디로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제목이 나가면 내용을 볼 것도 없이 누군가 조사할 것이고 그러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70년대 일이지 지금 같은 80년대는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여러분! 특히 나이가 드신 성도 여러분!
왜 이렇게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제목을 내거는 것부터 조심스러워지고 두려워지는지 아시나요? 설교 제목부터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정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임을 보고 계신가요? 오늘의 제목 “타는 목마름으로”는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한없는 고민과 갈등과 좌절을 겪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제목입니다. 거의 매일 최루탄가스에 눈물 흘려야 하고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제복을 입은 , 혹은 머리를 짧게 깍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검문당하고 가방을 조사받아야 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애절한 소망이 담겨있는 노래의 제목입니다. 제가 가사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1.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2. 오늘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나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넓은 땅은 겉으로 보기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스러운 듯 했습니다. 로마라는 강대국이 이태리 반도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점령하고 하나의 제국을 형성했습니다. 도로는 발달했고, 건축술이 뛰어나 곳곳에 도시들이 세워졌습니다. 물자는 풍부했고, 귀족들의 생활은 부유하고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로마 한 구석에 박혀 있으면서 끝내 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특하게 살아가려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유대인들입니다.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여 뽐내는 사람들, 하나님이 자기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아브라함을 통해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들, 일찍이 애굽에서 고생할 때 자기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셨다고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는 역사상 그 어느 나라보다도 축복받은 나라였다고 믿는 사람들, 이름하여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그것이 각각 망한 후 그들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샤, 알렉산더대왕, 이집트, 시리아, 로마의 지배를 차례차례 받아왔습니다. 그러기를 수백 년. 수많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으면서도 그들이 버텨올 수 있었던 힘은 오직 하나, 선민사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은 어렵게, 힘들게, 고생스럽게 살아가지만 틀림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다“ 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가,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 예언자들의 음성도 그쳤습니다. 독립의 희망은 사라졌고, 로마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져 갔습니다. 로마의 앞잡이 헤롯의 통치는 점점 더 교활해지고 숨을 조여 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차츰 차츰 지치기 시작했고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좌절했고 꿈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셨다.
약속은 사라졌다.
독립의 꿈은 사라졌다.
메시아는 안 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갈증으로 시달렸습니다. 하늘에서는 아무 징조도 보이지 않았고, 예언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속은 답답했고 목은 탔습니다. 할아버지들은 자기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메시아 이야기를 손자들에게 해 주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젠 다 끝났다.”
바로 이런 시대에 오늘의 주인공 안드레는 등장합니다. 그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부모님은 안 계셨지만 형은 하나 있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형은 성질이 급하고 우락부락하기는 했지만 고기 잡는 데는 도사였습니다. 형은 결혼해서 가정을 가졌고 이제 안드레가 가정을 이루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고기 잡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와 더불어 사는 이웃들은 왜 이렇게 불행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선민이라고 하는데 과연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아니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잊어버리고 계신 것은 아닌가?
메시아는 언제 올 것인가?
결국 메시아는 안 오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뜨리실 리가 없습니다. 약속하신 메시아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안드레, 그는 그 당시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마음속에 메시아는 틀림없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이 타게 기다린 젊은이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광야에서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자 곧 광야로 나아가 그의 제자기 되었고, 또 스승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하자 곧 예수를 따라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통해 희망을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렇게도 애타게 부르는 노래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 민주주의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 존엄성을 누리면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제도가 아니던가요?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가득 찬 꿈은 우리와 더불어 이 땅에서 한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누리면서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확신 있게 해 주는 것,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출세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서 부당하게 희생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요?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높은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 메워지고 굽은 길이 곧아지는 사회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민주주의여 만세”를 소리쳐 부르는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위대한 꿈을,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젊은이들이 절규하는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외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끊을 수 없는 믿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노래를 통해 나만의 출세나 부귀영화나 일신의 안일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진정한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드레는 그야말로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고통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목마르게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세례 요한을 만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목마름을 해결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의 대부분이 유초등부 때는 숫자가 많다가 중등부에 가면 좀 줄고 고등부에 가면 좀 더 줄고 대학부와 청년부에 가면 대폭 줄어듭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중고등부 때 보고 듣고 배운 이야기와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듣고 보고 배우는 현실이 너무 다르고, 또 이 때 우리 어른들이 보여주는 삶이 너무 말과 다른 것을 그들이 깨닫게 되기 때문은 아닌가요?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있는 고뇌와 꿈과 미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잘 먹어서 공부하게 해 주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하면서 얌전히 따라오라고만 하다가 결국은 젊은이들을 놓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몇 명 안 되는 젊은이들이 앉아있지만 저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안드레가 간직했던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을 봅니다. 이들의 눈동자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을 봅니다. 안드레와 같이 진리에 목말라 하고 진리이신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열심을 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비신앙적이거나 버릇이 없거나 생각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열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 앉아서 헌신예배를 드리는 젊은 친구들은 너무나 귀한 우리의 보배들이고 우리 교회의 기둥들이고 우리 교회의 신앙을 물려받을 후계자들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갈 역군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 분들에게 우리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헌신예배를 드리시는 청년부 여러분!
우리 모두 언제나 안드레를 생각합시다. 안드레가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늘 생각합시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보였던 삶의 모습을 늘 생각합시다. 그것은 바로 희생과 봉사의 삶입니다.
안드레! 그는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중의 하나였습니다.
안드레! 그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최초의 그리스도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요 6:5-9에서 어린 아이를 예수께로 인도할 때나 요 12:20-22에서 헬라인들을 예수께로 인도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영광스러운 자리에는 앉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늘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안드레 행전이라는 외경에 의하면 아가야 지방에서 복음을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꿈과 희망을 찾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꼭 기억할 것은 그 목마름을 채우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애쓰는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노력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것입니다. 또 하나님 없이, 희생과 봉사 없이 인간들만의 힘으로 이상천국을 만들겠다는 잘못된 꿈을 꾸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아득히 멀어 보이고 도저히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하더라도 희생과 봉사의 길만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해 불행한 이웃들의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가야합니다. 우리가 간직한 꿈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젊은이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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