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하고 즐거워하라
신 26:1-11 / 1983. 11. 23
우선 오늘의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 하나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 잡게 되거든 너희 하나님 야훼께 받은 그 땅에서 너희가 거둔 각종 햇곡식을 떠내어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으로 가거라. 너희는 당직 사제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나님 야훼께 아룁니다.’
사제가 그 광주리를 네 손에서 받아 너희 하나님 야훼의 제단 앞에 놓으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아래와 같이 아뢰어야 한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 즉 야훼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햇곡식을 이제 제가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놓고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엎드려 예배드리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
기원전 785년에서 744년에 이르는 약 40년에 걸친 시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지 150년 후 남쪽 유다에는 웃시야 왕이, 북쪽 이스라엘에는 여로보암 2세가 각각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두 임금 다 40년이 넘은 오랜 기간 동안 왕위에 앉아 있었으며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강대국 앗수르가 잠잠해지고, 남쪽의 애굽이 쇠퇴한 덕으로 남북 왕국이 각기 경제적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는 다윗 왕 이후 가장 현명한 임금으로서 이스라엘의 국위를 사방에 떨친 왕이었습니다. 그는 강대국들이 쇠약해진 틈을 타 군사력을 강화시켰고 동쪽과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외국과의 무역도 성공하여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정치적 안정에 따라 나라의 재정도 튼튼해졌고 일반 국민의 생활도 부유해졌습니다. 문자 그대로 국력은 팽창되고, GNP는 올라가고 생활은 안정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2세는 분명히 유능한 임금이었으며 겉으로 보기에 당시 사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고, 이제 배 두드리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 같은 그 시대에 잘못되었다고, 회개하라고 하는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침은 첫 번째로 당시의 사회가 불의에 가득 차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신한켤레”의 값으로 사고팔았으며, 부유한 지주들은 가난한 소작인들의 소유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부자들의 탐심이 극에 달해서 "가난한 자 머리위에 있는 먼지까지도 탐낼“ 정도였으며,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과부들의 권리는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부자들은 상아로 된 침대에 누워 헛된 노래를 지절대고 대접으로 술을 마시고 향유를 몸에 바르는 극도의 사치를 부렸습니다. 한마디로 물질만능이며 인간의 값어치가 물질 이하로 떨어진 시대라는 고발이었습니다.
그 외침은 두 번째로 그 당시 종교의 타락을 고발했습니다. 일찍이 야훼 신만을 섬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을 하면서 농사를 짓게 된 후 가나안 원주민들의 바알 신 숭배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알 신은 인간의 희생제물을 받고는 농사가 잘 되게 해준다는 신이었습니다. 인간이 적절한 종교의식만 잘 행하면 바알신이 인간의 가정과 가축과 땅을 보다 더 윤택하게 해 준다고 믿는 일종의 마술종교였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사회는 우상 숭배에 젖어 있다는 고발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 외침은 정치적 분야에 나타났습니다. 당시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둔 남북의 왕국은 그들의 위신을 세계에 과시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국가의 정책은 군사적 정복을 통해서 국경을 넓히며, 외국과의 군사적 동맹을 통해서 그들의 정치적 위치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네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거나 혹은 다른 나라의 군사력에 의존하여 안전을 지켜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힘, 그것도 군사력만 있으면 나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시대, 그것은 한 마디로 인간의 오만이 가득 차 있는 시대라는 고발이었습니다.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으며, 종교는 인간에게 물질을 가져다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었고, 그러한 인간의 모든 행복은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 그것이 바로 여로보암 2세 때라는 고발입니다. 이러한 고발을 홀로, 외로이 해야 했던 사람, 그는 바로 아모스였으며 그는 이러한 모든 잘못들의 밑바닥에는 오직 한 가지, 바로 불신앙이 깔려 있음을 지적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 물질이 있음을 잊어버린 채, 야훼 하나님과 바알신을 자기들 마음대로 뒤섞어 놓고 하나님을 요술방망이로 만들어 놓은 채, 군인의 수효가 늘고, 무기를 발달시키고, 외국과 방위 조약만 맺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두의 밑바닥에는 바로 아브라함, 야곱, 이삭과 함께 하신 하나님, 애굽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불신앙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모스로부터 그 이후 약 100여 년 동안 남북 왕국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끝내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했으며, 남왕국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으로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혼란 속에서 자기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신앙을 새롭게 정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신명기학파라고 부르며, 바로 그들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수와서에서 열왕기까지 이르는 거대한 역사서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대해 새롭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야훼 하나님께서 이전에 조상들에게 함께 해 주었던 것처럼 이제 자기들과도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이 짧게 압축되어 정리된 부분,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민족의 위기 속에서 그들은 자기네의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 붙여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떠돌이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양떼를 몰고 이리저리 풀을 찾아 헤매어야 했으며, 우물을 차지하기 위해 번번이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방랑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집트같이 언제나 물이 흐르고 풀이 자라는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은 에집트에 내려가서 더부살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숫자가,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하자 에집트인들은 그들을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사정없이 때리고, 굶기며 일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로 그의 민족이 억압당하고 부르짖을 때 그냥 내버려 두는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아우성을 들으시고 고통을 굽어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역사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신명기를 편찬한 사람들의 신앙 한가운데에는 바로 출애굽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고 이제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들과 수없이 싸워야 했고, 싸움에 지고 도망치기도 해야 했던, 그래서 사랑하는 동족들의 시체를 묻어야 했던 피에 젖은 땅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농사를 짓고 수확을 거둬들이게 되자 메소포타미아족, 모압족, 블레셋족, 가나안족, 미디안족, 암몬족, 등이 번갈아 쳐들어와서 곡식과 과일을 빼앗아 갔습니다. 도대체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도 잠깐, 다시 이스라엘은 고난의 역사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이 쓰여졌습니다. 결국 오늘의 본문은 세상 아무 걱정 없이, 농사가 잘 되었으니까 이제 마음 편하게 잘 먹고 지내자 하면서 써진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농사도 잘 되고, 아무 염려 없으니까 마음 놓고 하나님을 경배하자 하면서 써진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지는 민족의 위기 한 복판에서, 동족이 세운 한 나라는 이미 망했고, 반쪽 남은 나라는 속국의 처지에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그런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즐거워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을 애써 생산하면 남이 와서 몽땅 빼앗아 가버리는 그런 현실 속에서, 도저히 기쁨이 있을 수 없고 웃음이 나올 수 없는 그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는 커녕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저주해도 시원찮을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즐거워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저는 이 물음의 답을 하기 전에 우리 민족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역사가 오늘의 본문과 너무나 흡사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한 때는 강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3국통일 이후 중국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믿고 사는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 때 당한 고통은 새삼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기도를 들으셨고 마침내 우리 민족을 구출해 내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서 마음 놓고 살리라고 믿었습니다. 전쟁도 있었고, 남북도 갈라져 있지만 우리는 경제 성장을 통해 선진국가가 된다는 꿈에 젖어 있었고, 복지국가가 이 땅에 건설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일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아닌가 하고 놀랐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그것은 지난 가을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올해는 단군 이래 최대의 풍년이라는 말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습니다. 신문과 TV에는 곡식단을 가득 움켜 쥔 농부의 환하게 웃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쌀이 모두 얼마나 생산되는지 통계 숫자가 나열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신문과 방송은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었고, 농기계를 보급하고, 농약을 뿌리고, 이제 흉년은 없다. 우리의 노력으로, 인간의 힘만으로 앞으로는 매년 풍년이 온다.” 그리고는 거기에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이제 하늘의 도움은 필요없다.”
이제 하늘의 도움은 필요없다 라고 함부로 말해 버리는 이 말에는 바로 하나님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이 민족의 말할 수 없는 오만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요?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도 아직도 하나님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민족의 불신앙의 표현이 아닌가요?
두 번째로, 신도 수 800만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에서,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하나의 교회 안에 30만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같은 교회 안에서 TV를 통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받겠다고 몰려드는 무리를 향해 소위 3박자 구원을 외치면서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건강해진다. 좋은 말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남이야 어떻게 되던지 나만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나만 축복하셔서 영혼도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건강해진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단순논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한국 교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마치 축복의 요술 방망이로 만들어 버리는, 그리고 “나는 잘된다, 나는 잘 된다.”라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그러한 일부 한국 교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가난한 것은 무언가 죄가 있기 때문이며, 신앙이 있고 성경을 체험하면 잘 살게 되어있다 라는 그 무지한 생각, 그것은 바로 한국판 바알 종교입니다.
세 번째로, 군사력에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한 사람의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150만의 인파가 모여들고, 양국 국기 두 개를 만드는데 700만원이 들고, 이 땅에 위험이 보이면 언제라도 군사력을 증강하고, 원자탄을 이 땅에 배치하고 마치 이 나라의 운명은 완전히 외국의 힘과 무기에 달려있다고 믿는 것 같은 이러한 현실. 이것은 한마디로 이 민족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추석을 막 지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동족이 세운 한 나라는 망했고, 반쪽 남은 나라는 속국의 처지에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즐거워하라는 이야기를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었던가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심을 보는데 있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역사의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옛날 떠돌아다니던 조상들과 함께 하셨고, 에집트에서 함께 하셨고 자기들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고생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것이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먹을 것이 많이 있고, 풍족해서가 아니라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기에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을 수 있고, 그렇기에 경배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경배와 즐거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의 조상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민족을 일제의 억압 속에서, 공산주의의 침략 밑에서 구원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까?
이 민족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단순히 올해의 농사가 풍년이기에, 혹은 나의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에 혹은 군사적으로 강력해지고, 안전해졌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계시며,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가 넘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국가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믿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추석은 우리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온갖 좋은 것으로 먹으며 즐기는 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추석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즐거워하고자 애쓰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모든 이웃들과 함께 나를 경배하고 즐거워하라.”
신 26:1-11 / 1983. 11. 23
우선 오늘의 본문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 하나님 야훼께 유산으로 받은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 잡게 되거든 너희 하나님 야훼께 받은 그 땅에서 너희가 거둔 각종 햇곡식을 떠내어 광주리에 담아가지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으로 가거라. 너희는 당직 사제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나님 야훼께 아룁니다.’
사제가 그 광주리를 네 손에서 받아 너희 하나님 야훼의 제단 앞에 놓으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아래와 같이 아뢰어야 한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불어나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집트인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우리를 사정없이 부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 즉 야훼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햇곡식을 이제 제가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놓고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엎드려 예배드리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
기원전 785년에서 744년에 이르는 약 40년에 걸친 시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지 150년 후 남쪽 유다에는 웃시야 왕이, 북쪽 이스라엘에는 여로보암 2세가 각각 지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두 임금 다 40년이 넘은 오랜 기간 동안 왕위에 앉아 있었으며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강대국 앗수르가 잠잠해지고, 남쪽의 애굽이 쇠퇴한 덕으로 남북 왕국이 각기 경제적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는 다윗 왕 이후 가장 현명한 임금으로서 이스라엘의 국위를 사방에 떨친 왕이었습니다. 그는 강대국들이 쇠약해진 틈을 타 군사력을 강화시켰고 동쪽과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외국과의 무역도 성공하여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정치적 안정에 따라 나라의 재정도 튼튼해졌고 일반 국민의 생활도 부유해졌습니다. 문자 그대로 국력은 팽창되고, GNP는 올라가고 생활은 안정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 2세는 분명히 유능한 임금이었으며 겉으로 보기에 당시 사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고,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고, 이제 배 두드리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 같은 그 시대에 잘못되었다고, 회개하라고 하는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침은 첫 번째로 당시의 사회가 불의에 가득 차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신한켤레”의 값으로 사고팔았으며, 부유한 지주들은 가난한 소작인들의 소유를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부자들의 탐심이 극에 달해서 "가난한 자 머리위에 있는 먼지까지도 탐낼“ 정도였으며, 의지할 데 없는 고아와 과부들의 권리는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부자들은 상아로 된 침대에 누워 헛된 노래를 지절대고 대접으로 술을 마시고 향유를 몸에 바르는 극도의 사치를 부렸습니다. 한마디로 물질만능이며 인간의 값어치가 물질 이하로 떨어진 시대라는 고발이었습니다.
그 외침은 두 번째로 그 당시 종교의 타락을 고발했습니다. 일찍이 야훼 신만을 섬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을 하면서 농사를 짓게 된 후 가나안 원주민들의 바알 신 숭배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알 신은 인간의 희생제물을 받고는 농사가 잘 되게 해준다는 신이었습니다. 인간이 적절한 종교의식만 잘 행하면 바알신이 인간의 가정과 가축과 땅을 보다 더 윤택하게 해 준다고 믿는 일종의 마술종교였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사회는 우상 숭배에 젖어 있다는 고발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 외침은 정치적 분야에 나타났습니다. 당시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둔 남북의 왕국은 그들의 위신을 세계에 과시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국가의 정책은 군사적 정복을 통해서 국경을 넓히며, 외국과의 군사적 동맹을 통해서 그들의 정치적 위치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네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거나 혹은 다른 나라의 군사력에 의존하여 안전을 지켜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힘, 그것도 군사력만 있으면 나라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시대, 그것은 한 마디로 인간의 오만이 가득 차 있는 시대라는 고발이었습니다.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으며, 종교는 인간에게 물질을 가져다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었고, 그러한 인간의 모든 행복은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 그것이 바로 여로보암 2세 때라는 고발입니다. 이러한 고발을 홀로, 외로이 해야 했던 사람, 그는 바로 아모스였으며 그는 이러한 모든 잘못들의 밑바닥에는 오직 한 가지, 바로 불신앙이 깔려 있음을 지적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 물질이 있음을 잊어버린 채, 야훼 하나님과 바알신을 자기들 마음대로 뒤섞어 놓고 하나님을 요술방망이로 만들어 놓은 채, 군인의 수효가 늘고, 무기를 발달시키고, 외국과 방위 조약만 맺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두의 밑바닥에는 바로 아브라함, 야곱, 이삭과 함께 하신 하나님, 애굽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불신앙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모스로부터 그 이후 약 100여 년 동안 남북 왕국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끝내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했으며, 남왕국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으로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혼란 속에서 자기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신앙을 새롭게 정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신명기학파라고 부르며, 바로 그들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수와서에서 열왕기까지 이르는 거대한 역사서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대해 새롭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야훼 하나님께서 이전에 조상들에게 함께 해 주었던 것처럼 이제 자기들과도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이 짧게 압축되어 정리된 부분,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민족의 위기 속에서 그들은 자기네의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에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 몸 붙여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떠돌이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양떼를 몰고 이리저리 풀을 찾아 헤매어야 했으며, 우물을 차지하기 위해 번번이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방랑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집트같이 언제나 물이 흐르고 풀이 자라는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조상들은 에집트에 내려가서 더부살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숫자가, 인구가 불어나기 시작하자 에집트인들은 그들을 억누르고 괴롭혔습니다. 사정없이 때리고, 굶기며 일을 시켰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억센 손으로 치시며 팔을 뻗으시어 온갖 표적과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두 두려워 떨게 하시고는 우리를 에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로 그의 민족이 억압당하고 부르짖을 때 그냥 내버려 두는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아우성을 들으시고 고통을 굽어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역사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신명기를 편찬한 사람들의 신앙 한가운데에는 바로 출애굽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고 이제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들과 수없이 싸워야 했고, 싸움에 지고 도망치기도 해야 했던, 그래서 사랑하는 동족들의 시체를 묻어야 했던 피에 젖은 땅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농사를 짓고 수확을 거둬들이게 되자 메소포타미아족, 모압족, 블레셋족, 가나안족, 미디안족, 암몬족, 등이 번갈아 쳐들어와서 곡식과 과일을 빼앗아 갔습니다. 도대체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도 잠깐, 다시 이스라엘은 고난의 역사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이 쓰여졌습니다. 결국 오늘의 본문은 세상 아무 걱정 없이, 농사가 잘 되었으니까 이제 마음 편하게 잘 먹고 지내자 하면서 써진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농사도 잘 되고, 아무 염려 없으니까 마음 놓고 하나님을 경배하자 하면서 써진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지는 민족의 위기 한 복판에서, 동족이 세운 한 나라는 이미 망했고, 반쪽 남은 나라는 속국의 처지에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그런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즐거워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을 애써 생산하면 남이 와서 몽땅 빼앗아 가버리는 그런 현실 속에서, 도저히 기쁨이 있을 수 없고 웃음이 나올 수 없는 그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는 커녕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저주해도 시원찮을 그러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즐거워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저는 이 물음의 답을 하기 전에 우리 민족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역사가 오늘의 본문과 너무나 흡사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한 때는 강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3국통일 이후 중국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믿고 사는 민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 때 당한 고통은 새삼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기도를 들으셨고 마침내 우리 민족을 구출해 내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서 마음 놓고 살리라고 믿었습니다. 전쟁도 있었고, 남북도 갈라져 있지만 우리는 경제 성장을 통해 선진국가가 된다는 꿈에 젖어 있었고, 복지국가가 이 땅에 건설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일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아닌가 하고 놀랐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그것은 지난 가을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올해는 단군 이래 최대의 풍년이라는 말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습니다. 신문과 TV에는 곡식단을 가득 움켜 쥔 농부의 환하게 웃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쌀이 모두 얼마나 생산되는지 통계 숫자가 나열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신문과 방송은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었고, 농기계를 보급하고, 농약을 뿌리고, 이제 흉년은 없다. 우리의 노력으로, 인간의 힘만으로 앞으로는 매년 풍년이 온다.” 그리고는 거기에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이제 하늘의 도움은 필요없다.”
이제 하늘의 도움은 필요없다 라고 함부로 말해 버리는 이 말에는 바로 하나님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이 민족의 말할 수 없는 오만이 담겨져 있지 않은가요?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도 아직도 하나님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민족의 불신앙의 표현이 아닌가요?
두 번째로, 신도 수 800만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에서,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하나의 교회 안에 30만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같은 교회 안에서 TV를 통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받겠다고 몰려드는 무리를 향해 소위 3박자 구원을 외치면서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건강해진다. 좋은 말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남이야 어떻게 되던지 나만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나만 축복하셔서 영혼도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건강해진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단순논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한국 교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마치 축복의 요술 방망이로 만들어 버리는, 그리고 “나는 잘된다, 나는 잘 된다.”라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그러한 일부 한국 교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가난한 것은 무언가 죄가 있기 때문이며, 신앙이 있고 성경을 체험하면 잘 살게 되어있다 라는 그 무지한 생각, 그것은 바로 한국판 바알 종교입니다.
세 번째로, 군사력에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한 사람의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150만의 인파가 모여들고, 양국 국기 두 개를 만드는데 700만원이 들고, 이 땅에 위험이 보이면 언제라도 군사력을 증강하고, 원자탄을 이 땅에 배치하고 마치 이 나라의 운명은 완전히 외국의 힘과 무기에 달려있다고 믿는 것 같은 이러한 현실. 이것은 한마디로 이 민족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추석을 막 지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동족이 세운 한 나라는 망했고, 반쪽 남은 나라는 속국의 처지에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경배하고 즐거워하라는 이야기를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었던가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심을 보는데 있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역사의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옛날 떠돌아다니던 조상들과 함께 하셨고, 에집트에서 함께 하셨고 자기들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고생을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것이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먹을 것이 많이 있고, 풍족해서가 아니라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기에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을 수 있고, 그렇기에 경배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경배와 즐거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우리의 조상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민족을 일제의 억압 속에서, 공산주의의 침략 밑에서 구원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까?
이 민족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단순히 올해의 농사가 풍년이기에, 혹은 나의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에 혹은 군사적으로 강력해지고, 안전해졌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계시며,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가 넘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국가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믿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추석은 우리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온갖 좋은 것으로 먹으며 즐기는 날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추석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즐거워하고자 애쓰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모든 이웃들과 함께 나를 경배하고 즐거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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