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2009. 10. 18)
본문) 마태복음 25:14-30
“또 하늘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라도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 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 (포준새번역 개정판)
여기 참으로 이상한 주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 같은데 그래도 그렇지 여행을 가면서 종들한테 그야말로 엄청난 돈을, 자기의 전 재산에 해당될 만 한 돈을 함부로 맡기고 떠날 만큼 이상한 사람입니다. 도대체 그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기에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난 것일까요?
제일 적게 받은 세 번째 종이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한 달란트라고 하니까 여러분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 달란트는 무려 6,000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입니다. 1데나리온이 당시 농촌 일꾼들의 하루 품삯이니까 6,000 데나리온은 무려 6,000일의 품삯이라는 말이고, 이는 대충 계산해도 17년 치 품삯이라는 말입니다. 요즘 단위로 환산해서 하루 품삯을 5만 원으로 친다면 3억 원이나 되는 돈입니다.
사실 있는 사람들에게는 3억 원이라는 돈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요즘도 엄청난 돈입니다. 그나마 정당하게 품삯을 받는 사람도 3억 원을 모으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은데 하물며 종이라면 일만 할뿐 품삯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종들에게 3억 원이란 돈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입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야 평생 구경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 그것이 한 달란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달란트는 6억 원이 되는 셈이고, 다섯 달란트는 무려 15억 원이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인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계산해 보면 한 달란트는 농촌 일꾼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또 한 푼도 쓰지 않고 17년을 모아야 되는 돈이고, 두 달란트는 34년, 다섯 달란트는 무려 85년을 모아야 되는 돈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종들이 받은 다섯, 둘, 한 달란트는 모두 다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액수의 돈인 것입니다.
즉 오늘의 비유는 바로 하늘나라는 완전히, 100%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결코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이 자격이 있다거나, 무슨 조건을 갖추어서 달란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인의 자비에 의해 베풀어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주인은 세 사람의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떠났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종들은 먼저 아주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주인이 왜 내게 이 엄청난 돈을 맡겼는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주인의 뜻일까? 주인의 뜻에 가장 합당하게 돈을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혹 장사라도 했다가 다 까먹으면 어떻게 하지? 원금이라도 남기는 것이 좋을까? 그러다 마침내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같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받은 돈의 액수는 달랐지만 그들이 한 행동은 같았습니다. 그들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를 밑천으로 해서 장사한 종은 다섯 달란트를 벌었고, 두 달란트를 밑천으로 해서 장사한 종은 두 달란트를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만은 달랐습니다. 그는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겼다고 성서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자, 이제 어찌 될 것인가?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종들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계산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더 갖고 와서, 그러니까 열 달란트를 갖고 와서 말했습니다.
“주인님,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의 주인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와서 자기가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하자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로 칭찬하였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액수의 차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보기에 다섯이나 둘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종들의 눈으로 보기에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이지만 주인이 보시기에는 “적은 일‘일 뿐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액수의 차이가 아니라 ”적은 일에 즉 맡겨진 일에 신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상급은 무엇입니까? 주인은 두 사람에게 똑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그렇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두 가지 상급을 베풀었으니 하나는 더 많은 일을 맡긴 것이요, 또 하나는 종의 신분을 넘어서 주인의 아들딸과 같이 주인의 식탁에 앉아 함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종이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 앉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 이 모든 광경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었습니다. 앞의 두 종이 주인으로부터 칭찬받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주인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나아왔고, 간신히 말을 꺼냈습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그는 주인을 한 마디로 무서운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주인이 탐욕이 많고 냉혹한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무서워하여”라고 했는데 이는 “두려운 나머지”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공연히 그 돈 갖고 무엇을 하다가 잃어버리면 큰일 날까 해서 “땅에 숨겨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만 달랑 갖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뭐라고 했던가요? 주인은 당연히 그를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라도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 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자,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가 무엇을 그리 크게 잘못했습니까? 그는 적어도 원금을 까먹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돈을 맡아둔 사람이 그것을 보자기에 쌓아 보관했다가 잃어버리면 물어줄 책임이 있지만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종처럼 땅 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잃어버리면 그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그는 최소한 안전하게는 보관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어설프게 그것으로 사업을 벌였다가 망했다면 주인께 한 푼도 돌려드리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래도 원금이라도 돌려드렸으니 그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또 그가 분명히 그 돈을 가지고 어떤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허랑방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잘 보십시오.
세 번째 종, 즉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죄는 바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는 분명히 악당도 아니고, 누가복음 19장 20절에 나오는 종처럼 부주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주인이 오랫동안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또 주인이 곧 오리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인의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몸을 아끼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을 내걸어 모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의 주인을 위하여 자기의 편안함을 내놓고 모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인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고, 그것이 바로 그의 죄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엄청난 액수의 돈과 사업을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단순히 선한 감정을 갖고 있고, 자비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고,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적어도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행동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에 이어서 곧바로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세 번째 종이 지은 죄, 그것은 바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주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지난 목요일에 교도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원래 그날 강릉으로 신학교 동기들 만나러 가기로 했었습니다. 거기 가면 맛있는 회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설교하러 오라는데, 그리고 강사료도 없다는데 그래도 말씀을 전하는 일이니까 기꺼이 간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이니 순종한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의 비유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이것은 성서연구에 기호론을 도입한 장 들로르므 교수의 해석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이 맡긴 한 달란트를 활용하여 돈을 벌어들일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생산적인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는 주인의 됨됨이를 따져서, 자기 주인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탈취하는, 모진 부자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를 들로르므 교수는 그 종이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고, 비생산적인 신론만 따졌다고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론적으로 따지느라고 제 할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 평생 오직 신학에만 전념하는 신학자들이나 오로지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는 수도사들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은 존재들이고, 따라서 그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겨 울고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바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을 주셨는데 우리가 내 일신의 편안함만을 위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는 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를 짓는 자들은 쓸모없는 종이 되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 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내게 맡겨진 것을 갖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행함으로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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