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8 년도

2008. 1. 20 / 운명공동체 / 마태복음 10:24-25

람보 2 2015. 4. 2. 23:43

운명공동체 /2008년 1월 20일


본문 : 마태복음 10:24-25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제 주인만큼 되면, 충분하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    (표준새번역 개정판)



  오늘의 본문은 사실은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16-23절까지의 말씀과 하나로 묶어서 볼만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에 16-25절까지가 하나의 단락으로 묶여져 있고, 거기에 합해서 ‘박해를 받을 것이다’ 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간 전도자들이 박해를 받고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힘을 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세 가지 위로의 약속으로 풀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합하면 네 가지 약속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따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둘로 나누어서 설교를 준비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절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말씀입니다마는 그 짧은 구절 안에 두 개의 독립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 둘은 이렇게 나누어집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제 주인만큼 되면, 충분하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

  

  여러분!

  이렇게 나누어놓고 보니까 이 두 구절의 말씀이 서로 연결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요? 두 구절이 별로 이어질 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구절은 제각기 독립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구절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말씀인가요?


  우리가 성경말씀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면 분명히 10장 16-25절까지가 하나의 단락으로 묶여 있고, 거기에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에 해당되는 순회선교사들이 겪는 박해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목 바로 아래에 이 말씀이 나오는 다른 복음서가 표시되어 있는데 마가복음 13장 9-13절과 누가복음 21장 12-17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부분에 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온다는 뜻이고, 이것을 우리는 ‘병행구’라고 부릅니다. 이 병행구 구절들을 찾아보면 틀림없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직접 찾아서 읽어보시면 금방 발견하게 될 것인데 이상하게도 24-25절의 말씀은 위 두 부분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은 같은 말씀이 전혀 엉뚱한 곳에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앞부분, 즉 24-25a절까지를 봅시다. 이 구절과 같은 내용은 복음서에 세 군데 나오는데 누가복음 6:40, 요한복음 13:16, 15:20에 나옵니다. 그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 6:40)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요한복음 13:16)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요한복음 15:20)


  그렇다면 이 구절들은 대체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각 구절들이 놓여져 있는 문맥을 알아야 하고, 또 그 문맥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우선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구절은 그 뜻이 아주 분명합니다. 그 전후문장을 읽어보면 그 의미가 금방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비유 하나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 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9-42절)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스승과 제자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저기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남의 눈 속의 티를 빼주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결국 자기도 소경이면서 다른 눈먼 사람을 인도하겠다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배워도 그런 스승이 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오늘의 본문과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은 그 유명한 사건의 한 부분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사건 중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지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겨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12-15절)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 같이,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겨 줌으로써 낮아지고, 상대방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렇게 덧붙이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요한복음 13장 16-17절)

  이렇게 보면 위 두 개의 구절, 즉 누가복음 6장 40절과 요한복음 13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은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말씀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장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똑같은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 똑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어느 책을 본문으로 택했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복음 15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은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말씀과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고 해서, 이런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20-21)


  여기서 종이 제자들이고, 주인은 예수님인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높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박해했으면 제자들도 박해할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당연한가? 요한복음 15장 1절부터 나오는 그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가 그것을 밝혀줍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곧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요, 사실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입니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열매도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라비틀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버려지든지, 땔감이 되든지 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박해했기에 그 가지인 제자들도 박해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에서 가지를 쳐냄으로써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듯이 제자들을 박해함으로써 복음전도 사역을 막고 하늘나라 선포를 막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로부터 다시 뻗어 나온 우리들도 역시 예수님과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주인만큼 되면,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자인 우리들이 스승인 예수보다 높지 않고, 종인 우리들이 주인인 예수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본받아 예수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종인 우리는 예수를 단지 아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데 까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적대자들이 예수를 향해 뭐라고 비난하고, 박해를 가했던가요? 바로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역사한다고, 그러니까 예수는 바알세불의 부하라고 비난하고 박해했습니다. 이미 9장 34절에서부터 시작해서 복음서 여러 군데에서 그런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이 떠나간 뒤에,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한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귀신이 쫓겨나니, 말 못하는 그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무리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는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 9장 32-34절)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 (마태복음 12장 24절)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그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마가복음 3장 22절)

  “그들 가운데 더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가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  (누가복음 11장 15절)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도 하고, 귀신이 들렸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옳지 않소?’ ”  (요한복음 8장 48절)


  그렇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번의 기사를 비롯해서 네 복음서 모두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바알세불 곧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려 능력을 행한다고 비난하고, 아니면 적어도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을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얼마나 심하게 비난받았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결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절들을 보고 다시 오늘의 본문을 보면 무슨 뜻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귀신의 두목이라고 불렀다면 당연히 그 제자들도 귀신들렸다고, 바알세불의 부하들이라고 비난하고 욕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런 비난받을 것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이자 스승이신 예수께서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면 종이자 제자인 그리스도인들과 선교사들도 마땅히 고난과 박해를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은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바알세불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예수를 바알세불과 관련시켜가며 비난을 퍼부었던 것일까요?

  ‘바알세불’이라는 이름은 원래 구약 열왕기하 1장에 나오는데 블레셋 인들의 도시인 에그론의 신이었습니다.

  “아하시야 왕이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방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래서 그는 사절단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보내어,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를 물어 보게 하였다.”  (열왕기하 1장 2절)

  그리고는 그 밑의 관주를 보면 바알세붑은 ‘파리들의 주’라는 뜻이고, ‘바알 왕자’를 뜻하는 ‘바알세불’에 대칭되는 모욕적인 이름이라고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알세불은 가나안에 살던 토착민들의 주신인 바일 신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모욕하기 위해 ‘파리 대왕’이라는 뜻인 ‘바알세붑’으로 바꿔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가나안 토착민들이 섬기던 우상이었는데 그것이 후에 사탄의 두목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 바알세불과 같은 것으로, 또는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 존재로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귀신 또는 귀신의 종으로 비난하고 비방하고 모욕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치열한 싸움인 것입니다.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면 귀신의 심부름꾼이냐를 놓고 싸울 때 복음서 기자들이 철저하게 막아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마다 이 이야기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바알세불을 섬기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교회라고 이름은 붙어있는데 그 안에서 믿는 믿음의 대상은 바알 신과 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요?


  바알은 본래 농사짓는 사람들이 신이고 그래서 풍년신입니다. 가나안과 페니키아에서 많이 숭배하던 우상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특히 바알이 비를 지배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비가 오지 않을 때 특별히 제사를 많이 지내고, 바알 신을 위해 마술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알을 섬기는 방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바알을 섬기는 성녀들이 밤에는 창녀로 변하여 신전에서 참배자들과 음행을 하면 바알 신이 성적으로 흥분하여 그의 아내 신과 성관계를 갖게 되고, 바로 그때 비가 내린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신 신앙은 한 마디로 농사를 위해,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인간이 신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알 신을 믿는 이유는 순전히 풍요, 오늘날로 말하면 성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알 신 숭배는 곧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수단방법은 따지지 말고 성공을 이루기 원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어쨌든 돈만 많이 벌면 되고, 출세만 하면 된다. 다른 사람 희생시켜서라도 내 배만 부르면 되고, 나만 출세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도덕적, 영적 차원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성공만 이룰 수 있다면 그 어떤 수단, 그 어떤 방법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격히 바알 신 숭배로 빠져들었고, 그들은 바알을 섬기면서도 결코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언자 엘리야는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열왕기상 18장 21절)


  여러분!

  오늘날 일부 한국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신앙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공철학입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 많이 벌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성공철학, 즉 바알 신 숭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그 옛날 유대인들은 우리 주님을 향해 바알세불이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사도들은 그런 세력들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바알세불을 물리치고 끝내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과 사도들이 물리쳤던 그 신앙, 바알 신 숭배를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우리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스승이신 예수만큼 되고, 우리가 주인이신 예수만큼 된다면, 충분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이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실 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하늘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은혜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