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빌 3:12-16 / 1983. 1. 9
(앞에 앉아 있는 중학생. 특히 신입생들에게 이야기가 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진급예배입니다.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대로 하면 졸업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졸업이 없기에 진급 예배라고 부릅니다. 물론 하나의 부서를 마치고 새로운 부서로 올라가므로 졸업 증서를 드리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유·초등부를 마치고 이제 당당하게 중등부로 올라와 앉아있는 우리의 꼬마 친구들도 있고 중등부에서 고등부로, 고등부에서 대학부로, 또는 대학부에서 청년부로 한 계단씩 올라가신 분들이 함께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태까지 지내왔던 익숙하고 정든 세계를 떠나 무언가 기대에 차 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모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줄 압니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중고등부 언니 오빠들이 뒤에서 웅성 웅성대고, 사무실에서는 전화 벨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예배드리던 꼬마친구들이 3층에서 어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중학교에 가서 어떤 친구들을 마나고, 어떤 선생님들을 만날까 하는 기대에 가득 차 있을 줄 압니다.
고1이 되시는 여러분은 아직 연합고사 발표가 나지 않았지만 다 붙은 것으로 생각하고 고등학교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를 미리 상상하고 무언가의 기대에 차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변화와 기대는 아마도 고3 여러분에게 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학교로 가든, 직접사회로 뛰어들든 엄청나게 큰 변화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러나 어쨌든 여러분 모두는 조금 두렵기는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앞날의 화려한 설계로 지금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과연 무엇을 말씀드릴 수 있는가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영화가 한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MY WAY" 라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본 것이 벌써 10년은 다 된 것 같아서 도무지 그 영화의 스토리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그 영화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게 잘 설명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줄거리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 잊어버린 그 영화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제 인상에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영화에 나오는 아들이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마라톤에 출전하여 지친 모습으로 거의 꼴지로 골인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저는 오늘의 설교제목을 ”나의 길“ 곧 ”MY WAY“ 라고 잡았습니다.
1960년대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최희준은 그의 노래 “하숙생”을 크게 히트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노래에서 그는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인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가야할 길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코 한 사람의 길을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에게는 누구나 MY WAY, ‘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탄탄한 아스팔트길일 수도 있고, 험한 산길일 수도 있습니다. 길은 골짜기의 자갈이 널린 길일 수도 있고, 메마른 사막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길옆에 꽃이 우거진 아름다운 길일 수도 있고 냄새나는 더러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고,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의 길이든지 거기에는 갈림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른쪽 길을 선택하면 왼쪽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졸업은 바로 갈림길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바로 졸업이라는 말입니다.
졸업을 맞이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바로 인생의 한 갈림길에 와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또는 선배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은 여러분의 안내자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여러분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여러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제 문제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선택에 의하여 인생의 길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에 선택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앞길이 어떠할가를 우리는 조금도 내다 볼 수 없기에 선택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택을 하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택은 곧 도약이요, 하나의 창조입니다. 바로 이때 곧 한 인간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고자 할 때, 그리고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할 때 반드시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파괴의 아픔입니다. 깨어지는 아픔입니다. 하나의 세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없으며, 엄마가 아기 낳는 고통을 겪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일찍이 헤르만 헤세는 그의 유명한 소설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알은 곧 세계다.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가기 위하여 졸업을 준비하고 있는 졸업생 여러분,
졸업을 기다리는 이 기간은 바로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기 위하여 아픔을 겪는 시기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나의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서, 내 삶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동시에 나의 미래를 꿈꾸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선택의 갈림길에서 말할 수 없이 몸부림쳤던 사람,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기 위하여 한없이 아픔을 겪은 사람. MY WAY를 걷겠노라고 하면서 끝없이 번뇌하던 사람. 그러나 끝내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고, 이제 생명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주 기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 그는 원래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단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났으며, 베냐민지파에 속하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열심있기로도 바리새인이라” 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갈라디아서 1:4에서 자기가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전승들에 대해 특별히 열심있는 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빌립보서 3:6에서는 자기가 율법에 있어서는 흠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당시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의 하버드나 영국의 옥스퍼드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딴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장래는 보장되었고, 상류사회의 화려한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야할 길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행복을 약속한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길은 탄탄대로요,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길로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길을 가는데 아무런 아픔도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변했습니다. 자기가 그때까지 배워온 진리에 충실하기 위하여 바쁘게 돌아다닐 때 갑자기 그가 변한 것입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말할 수 없이 환한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사흘 동안 꼼짝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이 때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길이 완전히 방향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었던 바울, 그가 이 때 제일 먼저 갔던 곳, 그곳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고향도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7에 의하면 그곳은 바로 아라비아 사막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얼마동안 사막에 머물러 있었는지, 사막에서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가 40일간 사막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그가 무엇을 했을까요? 그 해답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바울의 변화 이후의 삶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장래가 보장되었던 사울. 율법학자로서, 로마시민으로서 아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던 사울, 그러나 변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변화 그것은 한마디로 그에게 주어졌던 하나의 길의 포기였습니다. 그 길은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선망의 길이었습니다. 화려한 금가루 뿌려진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바울이 선택한 길, 그 길이 어떤 길이었는가요?
바울의 길, 그것은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위험의 길이었습니다. 바울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는 동족 유대인들에게서 여덟 번이나 매 맞아 죽을 뻔 했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 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로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가요? 저는 바로 아라비아 사막에서 지냈을 때의 바울을 생각해 봅니다.
사막에서의 바울, 그는 틀림없이 지난 날의 자기 삶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자기의 길을 생각하면서 과연 나의 길은 어떤 길일까를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질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를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자기가 가고자 했던 길, 영광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바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주어진 여러 갈래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위치에 서 있는 학생여러분, 바로 지금이 여러분에게 사막에서 바울이 가졌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수 있게 한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바로 예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나신 분,
영광과 존귀를 세세무궁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
거세게 몰아쳐 오는 풍랑도 단 한마디 말로 잠재울 수 있었던 분.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일 수 있었던 분,
아니 심지어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시체까지도 도로 살려주실 수 있는 분.
그러나 30년 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때를 기다리신 분,
자기의 이웃들을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
때 묻고 거칠고 헐벗은 동족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신 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생명 그 자체라고 소리 높여 선포했던 분,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한 없이 맑은 목소리로 울려보내신 분.
바로 그 예수가 제일 먼저 겪으셨던 일, 그것 역시 광야, 사막에서의 시험이었습니다. 40일 동안 꼬박 굶으시면서 생각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40일 동안 예수가 무엇을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길”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때 예수가 얻은 대답. 그것은 바로 자기가 가야할 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에 이르는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와의 만남. 그것이 사울을 바울되게 한, 영광의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한 단 하나의 이유였음을 발견합니다. 졸업의 시기, 이 때는 바로 예수와의 만남을 이루는 계절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된 바울, 그가 이제 우리에게 오늘의 본문을 들려 줍니다.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푯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의 목표,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1983년도를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달려가야 할 오직 하나의 푯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몹시 험한 길입니다. 수난의 길입니다. 고통의 길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그 아들처럼 우리는 지쳐서, 힘들게 우리의 길을 갈지 모릅니다. 늙고 병든 바울처럼 어려운 길을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또렷하게 울려오는 소리가 있음을 기억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노라.”
우리 모두 나에게 주어진 길, 나의 길을 걸어갑시다. 나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너를 위한, 이웃을 위한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을 때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면서 걸어갑시다. 그리고 나의 길을 주님 가신 길로 만드십시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에게는 “주님 가신 길”이라는 복음송이 기억됩니다.
1.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도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길 거친 언덕 길
피곤하신 주님의 음성
2. 주님 머리에 가시 면류관
허리에는 굵은 창자욱
손과 발목에 못을 박히신
상처받은 주님의 얼굴
3. 마르는 눈물 타는 목마름
피로 찌든 십자가 위에
하늘을 향해 기도하시는
버림받은 주님의 영혼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빌 3:12-16 / 1983. 1. 9
(앞에 앉아 있는 중학생. 특히 신입생들에게 이야기가 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진급예배입니다.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대로 하면 졸업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졸업이 없기에 진급 예배라고 부릅니다. 물론 하나의 부서를 마치고 새로운 부서로 올라가므로 졸업 증서를 드리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유·초등부를 마치고 이제 당당하게 중등부로 올라와 앉아있는 우리의 꼬마 친구들도 있고 중등부에서 고등부로, 고등부에서 대학부로, 또는 대학부에서 청년부로 한 계단씩 올라가신 분들이 함께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태까지 지내왔던 익숙하고 정든 세계를 떠나 무언가 기대에 차 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모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줄 압니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중고등부 언니 오빠들이 뒤에서 웅성 웅성대고, 사무실에서는 전화 벨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예배드리던 꼬마친구들이 3층에서 어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어느 중학교에 가서 어떤 친구들을 마나고, 어떤 선생님들을 만날까 하는 기대에 가득 차 있을 줄 압니다.
고1이 되시는 여러분은 아직 연합고사 발표가 나지 않았지만 다 붙은 것으로 생각하고 고등학교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를 미리 상상하고 무언가의 기대에 차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변화와 기대는 아마도 고3 여러분에게 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학교로 가든, 직접사회로 뛰어들든 엄청나게 큰 변화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러나 어쨌든 여러분 모두는 조금 두렵기는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앞날의 화려한 설계로 지금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과연 무엇을 말씀드릴 수 있는가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영화가 한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MY WAY" 라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본 것이 벌써 10년은 다 된 것 같아서 도무지 그 영화의 스토리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그 영화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게 잘 설명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줄거리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 잊어버린 그 영화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제 인상에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영화에 나오는 아들이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마라톤에 출전하여 지친 모습으로 거의 꼴지로 골인하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저는 오늘의 설교제목을 ”나의 길“ 곧 ”MY WAY“ 라고 잡았습니다.
1960년대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최희준은 그의 노래 “하숙생”을 크게 히트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노래에서 그는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인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가야할 길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코 한 사람의 길을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에게는 누구나 MY WAY, ‘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탄탄한 아스팔트길일 수도 있고, 험한 산길일 수도 있습니다. 길은 골짜기의 자갈이 널린 길일 수도 있고, 메마른 사막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길옆에 꽃이 우거진 아름다운 길일 수도 있고 냄새나는 더러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고,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의 길이든지 거기에는 갈림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른쪽 길을 선택하면 왼쪽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졸업은 바로 갈림길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바로 졸업이라는 말입니다.
졸업을 맞이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바로 인생의 한 갈림길에 와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또는 선배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은 여러분의 안내자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여러분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여러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제 문제는 선택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선택에 의하여 인생의 길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에 선택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앞길이 어떠할가를 우리는 조금도 내다 볼 수 없기에 선택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택을 하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택은 곧 도약이요, 하나의 창조입니다. 바로 이때 곧 한 인간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고자 할 때, 그리고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할 때 반드시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파괴의 아픔입니다. 깨어지는 아픔입니다. 하나의 세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없으며, 엄마가 아기 낳는 고통을 겪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일찍이 헤르만 헤세는 그의 유명한 소설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알은 곧 세계다.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가기 위하여 졸업을 준비하고 있는 졸업생 여러분,
졸업을 기다리는 이 기간은 바로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기 위하여 아픔을 겪는 시기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나의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서, 내 삶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동시에 나의 미래를 꿈꾸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선택의 갈림길에서 말할 수 없이 몸부림쳤던 사람, 새로운 세계로 날아오르기 위하여 한없이 아픔을 겪은 사람. MY WAY를 걷겠노라고 하면서 끝없이 번뇌하던 사람. 그러나 끝내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고, 이제 생명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주 기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 그는 원래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단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났으며, 베냐민지파에 속하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열심있기로도 바리새인이라” 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갈라디아서 1:4에서 자기가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전승들에 대해 특별히 열심있는 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빌립보서 3:6에서는 자기가 율법에 있어서는 흠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당시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의 하버드나 영국의 옥스퍼드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딴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장래는 보장되었고, 상류사회의 화려한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야할 길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행복을 약속한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길은 탄탄대로요,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길로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길을 가는데 아무런 아픔도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변했습니다. 자기가 그때까지 배워온 진리에 충실하기 위하여 바쁘게 돌아다닐 때 갑자기 그가 변한 것입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말할 수 없이 환한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사흘 동안 꼼짝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이 때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의 길이 완전히 방향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었던 바울, 그가 이 때 제일 먼저 갔던 곳, 그곳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고향도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17에 의하면 그곳은 바로 아라비아 사막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얼마동안 사막에 머물러 있었는지, 사막에서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가 40일간 사막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그가 무엇을 했을까요? 그 해답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바울의 변화 이후의 삶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장래가 보장되었던 사울. 율법학자로서, 로마시민으로서 아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던 사울, 그러나 변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변화 그것은 한마디로 그에게 주어졌던 하나의 길의 포기였습니다. 그 길은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선망의 길이었습니다. 화려한 금가루 뿌려진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바울이 선택한 길, 그 길이 어떤 길이었는가요?
바울의 길, 그것은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위험의 길이었습니다. 바울 스스로 고백하듯이 그는 동족 유대인들에게서 여덟 번이나 매 맞아 죽을 뻔 했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 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로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가요? 저는 바로 아라비아 사막에서 지냈을 때의 바울을 생각해 봅니다.
사막에서의 바울, 그는 틀림없이 지난 날의 자기 삶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자기의 길을 생각하면서 과연 나의 길은 어떤 길일까를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질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를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자기가 가고자 했던 길, 영광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바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주어진 여러 갈래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위치에 서 있는 학생여러분, 바로 지금이 여러분에게 사막에서 바울이 가졌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꿀 수 있게 한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바로 예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어나신 분,
영광과 존귀를 세세무궁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
거세게 몰아쳐 오는 풍랑도 단 한마디 말로 잠재울 수 있었던 분.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일 수 있었던 분,
아니 심지어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는 시체까지도 도로 살려주실 수 있는 분.
그러나 30년 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때를 기다리신 분,
자기의 이웃들을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는 분,
때 묻고 거칠고 헐벗은 동족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신 분,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생명 그 자체라고 소리 높여 선포했던 분,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한 없이 맑은 목소리로 울려보내신 분.
바로 그 예수가 제일 먼저 겪으셨던 일, 그것 역시 광야, 사막에서의 시험이었습니다. 40일 동안 꼬박 굶으시면서 생각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40일 동안 예수가 무엇을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길”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때 예수가 얻은 대답. 그것은 바로 자기가 가야할 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에 이르는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와의 만남. 그것이 사울을 바울되게 한, 영광의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한 단 하나의 이유였음을 발견합니다. 졸업의 시기, 이 때는 바로 예수와의 만남을 이루는 계절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된 바울, 그가 이제 우리에게 오늘의 본문을 들려 줍니다.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푯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의 목표,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1983년도를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달려가야 할 오직 하나의 푯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몹시 험한 길입니다. 수난의 길입니다. 고통의 길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그 아들처럼 우리는 지쳐서, 힘들게 우리의 길을 갈지 모릅니다. 늙고 병든 바울처럼 어려운 길을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또렷하게 울려오는 소리가 있음을 기억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노라.”
우리 모두 나에게 주어진 길, 나의 길을 걸어갑시다. 나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너를 위한, 이웃을 위한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고 그 길을 걸을 때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면서 걸어갑시다. 그리고 나의 길을 주님 가신 길로 만드십시다. 이제 마지막으로 저에게는 “주님 가신 길”이라는 복음송이 기억됩니다.
1.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도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길 거친 언덕 길
피곤하신 주님의 음성
2. 주님 머리에 가시 면류관
허리에는 굵은 창자욱
손과 발목에 못을 박히신
상처받은 주님의 얼굴
3. 마르는 눈물 타는 목마름
피로 찌든 십자가 위에
하늘을 향해 기도하시는
버림받은 주님의 영혼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받으셨네
이 세상에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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