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7 년도

2007. 6. 3 / 참된 기도 / 마태복음 6:5-8

람보 2 2015. 4. 2. 18:12

참된 기도


마태복음 6장 5-8절/2007년 6월 3일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유대교에서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무로서의 선행 세 가지는 자선, 기도, 금식입니다. 지난주에 자선에 대해 말씀을 드렸고, 이제 오늘 예수께서는 참된 기도는 대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세 가지 중에서 자선과 금식에 대한 가르침이 비교적 짤막한 데 비해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제법 긴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세 시간 정도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가르침 안에 그 유명한 주기도문이 들어있는데 사실 주기도문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본론에 해당이 되고 오늘의 본문은 서론적으로 참된 기도는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선 유대교에서의 전통적인 기도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크게 네 종류의 기도가 있으니 성전이나 회당에서의 공동기도, 개인기도, 제의적으로 고정된 기도, 순간적인 상황에서 자유롭게 생겨난 기도 등이 그것입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나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헤롯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이 모여 살게 된 마을마다 회당이 세워졌고, 이제 회당이 유대인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는 정기적인 예배가 드려졌으니 하루 세 번 즉 아침, 점심, 저녁예배와 주1회 안식일예배 그리고 종교적 절기마다 특별의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공동기도를 드렸습니다.

  개인기도는 물론 혼자서 드리는 기도요, 제의적으로 고정된 기도는 미리 정해져 있는 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상황에서 자유롭게 생겨난 기도는 물론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당신도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선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고 마태복음 기자는 증거합니다.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마태복음 14장 22-23절)

  또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참으로 간절한 청원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                         (마태복음 26장 36-39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청원기도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7장 7-8절)


  자,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요? 열심히 기도한다고 했는데, 남들보다 더 열심히 기도한다고 했는데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요?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두 가지를 지적하셨으니 하나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방 사람들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선 위선자들처럼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요,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보란 듯이 하는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기가 막힌 예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                                    (누가복음 18장 9-12절)


  그렇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그야말로 자기가 의롭다고,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나는 결단코 저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니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시간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가복음 18장 14절)


  그렇습니다.

  위선자들처럼 하는 기도는 남들 보란 듯이, 내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잘 했노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요?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여러분, 우리나라 집들은 문단속을 아주 철저하게 하지요? 아파트들을 보면 분명히 만들어져 있는 자물쇠가 있는데 그것 가지고는 불안해서 거기다가 하나 더 만들지요. 또 요즘 굉장히 많은 종류의 자물쇠들이 만들어지고 있다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어떤 자물쇠든지 도둑놈들은 다 열수 있다는 것이지요.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나라의 시골집들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집들도 대부분은 자물쇠로 잠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골방에 들어가서” 라고 말할 때의 ‘골방’은 창고로 사용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집에서는 유일하게 잠글 수 있는 방인 작은 방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농사짓는 도구 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거기는 보통 때 사람들이 들어가서 앉아있거나 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누가 기도를 하는지 짐작할 수도 없고, 들여다보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서, 즉 문을 잠그고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골방은 꼭 골방이라고 불리는 그 장소에서만 기도하고 다른 장소에서는 일체 기도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는 예수께서 혼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마태복음 14장 23절)

  또한 18장에서는 꼭 혼자서 골방에 들어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태복음 18장 19-20절)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만 다른 사람을 곁눈질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또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온 마음으로’ 온전히 전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전념이 물론 기도하는 장소를 어디에 선택했느냐를 통해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골방이든지 산이든지 어느 곳이나 온전한 기도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성전이나 회당의 한 모퉁이를 지정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골방이라고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방을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늘 들락거리게 되는, 그래서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필요한 도구를 찾기 위해 늘 들어가야 했던 방, 거기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굳이 골방을 예로 드셨을까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의 신앙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전이나 회당이나 큰길 모퉁이에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으로 대표되는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나오는 골방은 단순한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 대화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까 권사님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권사님을 통해 그 아들 오 선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오 선생이 교수로 있는 학교가 유명한 기독교 대학이지요. 아마 기독교 계통의 일반대학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대학 재단에는 그 대학교뿐만 아니라 예술대학도 있고, 신학교도 있고 해서 그 규모도 엄청나고, 등록금으로 들어오는 돈도 엄청나지요. 그런데 오 선생은 열심히 강의는 하면서도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사례비를 받고, 그 중의 일부는 학교에 낸다지요. 그러니까 순전히 학생들 등록금 긁어모아서 학교 덩치는 키웠는데 교수들 처우는 제대로 하지 않고 고생만 시킨다면, 그리고는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 해야 교수로 인정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학교가 교수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철저하게 요구하고 학생들을 신앙으로 지도한다고 큰소리는 치는데, 그래서 명색은 기독교 학교인데 그 재단은 세상 학교 재단들보다 더 탐욕스럽다면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경계하신 두 번째는, 기도할 때 이방사람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네팔이라는 나라 이름을 들어보셨지요? 인도와 중국 중간지대인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불교국가이지요. 거기에 왕이 있고, 그 왕이 독재정치를 해서 지금 나라가 정치적인 혼란에 빠져있는 나라랍니다. 그 나라에 가면 절들이 아주 많은데 그 절간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담긴 원통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답니다. 그것을 ‘기도물레’라고 부른답니다. 그리고 불교신도들이 예불을 하러 와서는 그 기도물레를 빙빙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들어있는 기도문들도 안에서 같이 돌겠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기도물레를 한 번 돌릴 때마다 원통들 속에 적혀 있는 무수한 기도를 다 바친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입으로 일일이 기도할 것 없이 원통 한 번 돌리는 것으로 수많은 기도를 한 것이 되고, 그러면 자기들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말을 많이 해야만 신이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네팔이라는 나라에서의 불교만의 이야기입니까? 그 옛날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 신의 제사장들과 싸울 때 바로 그 제사장들이 바친 기도가 말을 많이 하는 기도였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제사장들이 자기의 신에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이렇게 한껏 조롱합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수가 많으니, 먼저 시작하시오. 소 한 마리를 골라놓고, 당신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지피지 마시오.’ 그들은 가져온 소 한 마리를 골라서 준비하여 놓은 뒤에, 아침부터 한 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요’ 하면서 부르짖었다. 그러나 응답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한낮이 되니, 엘리야기 그들을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더 큰소리로 불러보시오. 바알은 신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용변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멀리 여행을 떠났을지, 그것도 아니면 자고 있으므로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그들은 더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예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다. 한낮이 지나서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런 대답도 없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열왕기상 18장 25-29절)


  하루 종일 소리소리 지르면서 수백 명의 제사장들이 온갖 기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는가요? 왜냐하면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러니까 신을 성가시게 해서라도 내 뜻을 이루겠다는 욕심으로 하기 때문이며, 또 혹 신이 우리의 소원을 모르고 계실까 하여 그분께 가르쳐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네팔 사람들만의 기도이고, 엘리야 당시 바알 제사장들의 기도만인가요? 오늘날 한국교인들의 기도 가운데는 이런 기도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끊임없이 말을 많이 하면서 몇 시간씩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말하지요. 어떤 목사님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적어도 하루에 열 시간은 해야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다고요. 하나님이 열 시간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아홉 시간 기도하면 들어주지 않으시나요?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렇게 자신이 없는 것인가요?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방사람들처럼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그렇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를 저버리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기도를 되풀이하고, 말을 많이 하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미 알고 계시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청원기도를 드리도록 명하셨고, 그분 친히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5-26절)

  또한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청원기도를 드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              (마태복음 26장 39절)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 (마태복음 26장 42절)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가서, 또 다시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마태복음 26장 44절)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물론, 길고 끈질긴 기도라고 해서 덮어놓고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 간절하고 열정적인 기도를 배격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배격하는 것은, 인간이 기도를 바치고 기도의 공적을 쌓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결정적인 요건인 것으로 보는 그런 식의 기도입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다, 내가 기도를 많이 했으니까 이것이 공적이 되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배격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원인은 오로지, 기도자에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호의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청원기도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그러한 기도의 바탕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호의에 대한 한없는 신뢰에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뢰는 빈말들을 지어내거나 끝없는 되풀이를 낳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기도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열 시간을 연속으로 하고, 며칠 동안 금식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순전히 내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고, 내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라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의 현장 속에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골방은 우리 집에도 있고, 우리 회사에도 있고, 우리 학교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고,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말마다 이러한 참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