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7 년도

2007. 5. 27 / 쇼를 하지 말라 / 마태복음 6:1-4

람보 2 2015. 4. 2. 18:09

쇼를 하지 말라


마태복음 6장 1-4절/2007년 5월 27일



  오늘 설교 제목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사실 광고에 나오는 구절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교 다섯 편 가운데 첫 번째 설교인 산상수훈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 석 장에 걸쳐서 나오는 산상수훈은 한 마디로 “하늘나라의 정의”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설교인데 그 내용을 다시 5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산상설교 안에 다시 다섯 개의 설교 덩어리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중 1부는 5장 1-16절까지로 8복이 들어있는 부분이지요. 여기는 “참된 행복”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고, 2부는 17-48절까지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2부의 결론이 바로 지난주에 보았던 48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그렇다면 인간인 우리가 ‘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흠이 없게 된다든지, 율법 조항을 단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킨다든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구약성서가 말하고, 주님이 말씀하신바 “너희도 완전하라”는 것은 갈라짐 없이, 온전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의 마음을 눈에 보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하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결코 완전할 수 없지만 그렇게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완전하다고 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웨슬리 목사님은 ‘동기의 순수함’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의 마음을 나타내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앞으로 읽게 되는 6장 1-18절까지에 나오는 세 가지 전통적인 신앙행위 곧, 자선과 기도 그리고 금식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세 가지를 끄집어내어 말씀을 하시게 되고, 이 부분이 산상설교의 3부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께서는 올바른 자선 행위, 올바른 기도, 올바른 금식에 대해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너무나 쉽게 “남에게 보이려고” 자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일이기에 예수께서는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자, 보십시오.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1절이 서론에 해당되고, 2-4절까지가 자선에 대한 것, 5-15절까지가 기도에 대한 것, 16-18절까지가 금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예수께서는 ‘남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자선과 기도, 금식이 의로운 일임을 인정하셨습니다.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 가지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맨 처음에 “위선자들처럼”이라고 못박으심으로써 거짓된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아주 강력하게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아라.”                                     (2절)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5절)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말아라.”       (16절)


  여러분!

  마태복음에 나오는바, 위선자란 단어는 어떤 특정한 역을 하는 배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배우란 극중에 나오는 인물을 대신 맡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배우는 박수를 먹고 삽니다. 배우는 박수를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배우란 “갈채를 받기 위해” 구경꾼들에게 연기를 하는 사람인데, 중요한 것은 그 옛날 배우들은 마스크 즉 가면을 썼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희랍어로 persona이고, 이것이 심리학에 들어와서 인간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페르소나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에 들어왔고, 그래서 여기서 위선자란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선한 일,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 선하고 의로운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자,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유대인들이 높이 평가하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권장하던 세 가지 전통적인 신앙행위 중 첫 번째는 자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이고, 따라서 구제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자선을 베푸는 일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직접 명령하신 일입니다. 신명기 15장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매 칠 년 끝에 그 해의 끝에 빚을 면제하여 주어라. 면제 규례는 이러하다. 누구든지 이웃에게 돈을 꾸어 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하여 주어라. 주께서 면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웃이나 친족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 이방사람에게 준 빚은 갚으라고 할 수 있으나, 너희의 친족에게 준 빚은 면제해 주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너희가 참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 주 너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한 이 모든 명령을 다 지키면,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너희가 많은 민족에게 돈을 꾸어 주기는 하겠지만 꾸지는 않겠고, 또 너희가 많은 민족을 다스리기는 하겠지만 다스림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시는 땅의 어느 한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친족이 살고 있거든, 너희는 그를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말아라. 그 가난한 친족에게 베풀지 않으려고 너희의 손을 움켜쥐지 말아라. 반드시 너희의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어라. 너희는 삼가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아라. 빚을 면제하여 주는 해인 일곱째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해서, 인색한 마음으로 가난한 친족을 냉대하며, 아무것도 꾸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가 너희를 걸어 주께 호소하면, 너희가 죄인이 될 것이다. 너희는 반드시 그에게 꾸어주고, 줄 때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하는 모든 일과 너희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너희는 반드시 손을 뻗어, 너희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친족을 도와주어라. 그렇다고 하여, 너희가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신명기 15장 1-11절)


  그렇습니다.

  율법이 부과했고, 예수께서 다시 부과하신 가장 큰 의무들 중 하나는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는 의무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마음을 서 주며, 가능하다면 돈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가면 이제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이 성스러운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25장에만 나오는 “최후의 심판의 비유”의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돈밖에 모르는 잔인한 수전노로 그린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 하면 돈밖에 모르는 구두쇠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인색하고, 탐욕스럽고, 돈을 움켜쥘 줄만 아는 사람들이가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유대인들만큼 구제를 귀하게 여기는 민족이 사실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을 돕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고, 그래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구제에 쓰는 것이 보통 수준입니다. 만약 이십분의 일 이하를 구제에 쓰면 인색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십분의   오를 구제에 쓰면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습니다. 그 이상은 금지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너무 많이 구제를 하다가 자기 자신이 구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이라면 단 한 명도 예외없이 구제를 해야 했기에 부자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구제를 받는 사람도 구제받은 돈의 일부를 구제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참된 자선인가요?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구제의 방법에 따라 그 선행의 정도를 여덟 단계로 나누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무뚝뚝한 태도로 돕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돕는 것이지요.

  그 다음 단계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양보다 적은 양을 돕되 기쁜 마음으로 돕는 경우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계는, 어려운 사람의 요청을 받고 직접 돕는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소극적인 자선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 다음 네 번째 단계는, 도움을 요청받지 않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경우입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쉬운 소리를 하기 전에 도와줌으로써, 다른 사람 앞에서 직접 도움을 부탁하는 수치를 면하게 해주는 경우입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단계는,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돕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를 돕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옛날 유대인들 중에 여유 있는 사람들은 보자기에 돈이나 그 밖의 물건 등을 느슨하게 싸서 어깨에 메고 길을 걷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그의 뒤에 가서 필요한 대로 가져가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움 받는 사람이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자기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므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여섯 번째 단계는, 돕는 자는 누구를 돕는지 알지만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려움을 당한 가난한 사람의 집에 몰래 가서 돈이나 필요한 식량 등을 놓고 오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돕는지 모르므로 부끄러운 마음을 덜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일곱 번째 단계는, 구제하는 자나 구제받는 자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도움이 이루어지는 경우입니다. 구제를 받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돕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받을 일이 없고, 구제하는 자는 아무도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계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 유대인들은 성전의 방 하나를 지정하여 아무나 은밀하게 곡식이나 구제금을 갖다 놓을 수 있도록 하였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 가장 높은 단계의 자선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에 의하면 여덟 번째에 해당되는 가장 높은 단계의 자선은 바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어 사업을 일으키게 하거나, 동업을 하거나 혹은 직업을 구해주어서 상대방이 더 이상 구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와주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는 사람 모두 대등한 대인관계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지요. ‘빈민들을 위한 은행’을 만들어서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자선을 베푸는 일에 충실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랑을 베풀었는지 짐작할 만하지요? 그런데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선을 베풀면서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고, 많은 사람이 보는데서 자선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유대 신앙에 의하면 율법에 나타나 있는 것을 뛰어넘는 선행은 특별한 공로로 인정받고 따라서 율법을 위반한 죄를 속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뛰어난 선행은 마지막 심판 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랍비들은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에 의하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주렸을 때는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는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되었을 때는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는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는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찾아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삶’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선행을 실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에 보상을 기다리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아서는 안 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나타내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어떤 선한 일을 행했는지 아예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최후의 심판 비유에 나오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를 읽을 때나 설교할 때 대부분 46절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의인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고, 악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바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 가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라고만 해석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 37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의인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들이 선한 일을 행하고도 그것을 행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자들은 자기들이 알았으면 왜 선을 행하지 않았겠느냐고, 주님이 보시는 앞이라면 마땅히 했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스스로 위선자인 것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도 대답하여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는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5장 44절)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매일의 삶 속에서는 불쌍한 이웃들에게 빵 한 조각 주지 않고, 물 한 잔 주지 않고,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남들 보는 앞에서는 그런 척 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저주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선을 행하고, 자기의 선행에 만족한 나머지 선행 안에 들어있는 교만을 깨닫지 못한 채 선행을 베푼다면 그들은 결단코 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TV에 가장 많이 나오는 광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쇼를 하라’는 제목의 광고입니다. 저는 도대체 무슨 ‘쇼를 하라고 하는가’ 하면서 그 광고가 나올 때마다 채널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광고가 하도 많이 나오니까 그런 광고가 제 뇌리에 박혀 버렸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그 광고의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그 제목만 자꾸 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광고를 통해 끊임없이 ‘쇼를 하라, 쇼를 하라’라고 떠드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광고가 무슨 내용이냐고 딸아이에게 물었더니 KTF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영상통화이고, 그 제목이 ‘쇼’라더군요. 그러니까 자기네 회사에서 만든 ‘쇼’라는 상품에 가입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UCC와 같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들이 생겨나는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의 욕구를 참으로 교묘하게, 기가 막히게 이용하고 있는 광고인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교회들도 끊임없이 땅과 건물과 숫자로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고, 교인들도 교회를 자기 과시의 장으로 삼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도교인들이 큰 교회로 몰려드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유명한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내가 어느 유명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으로 신분의 표지를 삼고, 자기만족을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앙의 모든 일들을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쇼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왜 쇼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곧 “자선을 숨겨 두는” 일이요, 그러면 은밀한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같은 표현이 세 번 나오고 있으니 4절, 6절, 18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제자는 자기가 한 행동의 가치를 유일하게 평가하실 수 있는 분에게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녀로서 자기 과시를 포기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제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기에 선한 일을 행하고도 그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선함을 계산하는 기억까지 잊어야 합니다. 그러면 은밀한 일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니,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공동체가 되고,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