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7 년도

2007. 5. 6 / 제 3의 길 / 마태복음 5:38-42

람보 2 2015. 4. 2. 17:59

제 3의 길


마태복음 5장 38-42절/2007년 5월 6일


  기원전 4년, 그 악독한 헤롯 대왕이 죽고 나서,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그중 중심지였던 유다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을 차지한 아들은 아르켈라오였는데 그는 아버지보다 더 폭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10년 만인 기원후 6년에 로마황제에게 소환당하여 쫓겨납니다. 그리고 로마는 그 지역을 총독이 다스리는 직할령으로 바꾸었습니다.

  로마 총독이 부임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세금을 거두기 위해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모든 백성들의 재산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유다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세금 부과로 나타났습니다. 그 흔적이 누가복음에 남아있으니 바로 2장에 나오는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누가복음 2장 1-2절)


  결국 세금이 너무 무거워지니까 유대인들이 거기에 대해 당연히 불만을 갖게 되었고, 그 불만은 결국 기원후 6년 갈릴리 출신 유다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로마에 대한 폭동으로 나타났으니 사도행전 5장에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뒤에 인구 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다 흩어지고 말았소.”                               (사도행전 5장 37절)


  바로 여기에 나타난 유다의 무리들을 성경에서는 젤롯(zealot)당, 즉 열심당이나 혁명당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 땅에 실현되어야 하며,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어떤 통치자도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수 없다는 강한 결의로 로마에 항거했습니다. 로마는 즉시 젤롯당의 이 첫 번째 봉기를 진압한 다음,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젤롯당들은 이후 60년 동안 계속해서 줄기차게 로마에 항거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로마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니 그때가 기원후 66년이었고, 이를 역사는 제1차 유대독립전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로마는 4년 후인 70년에 대군을 파병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젤롯당의 마지막 무리가 그 유명한 맛사다 요새에서 결사 항전하다가 결국 집단자살로 끝을 맺은 것이 기원후 73년이었다고 당시의 유일한 생존자인 요세푸스가 그의 책 유대전쟁사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어쨌든 젤롯당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로마제국이었고, 그들을 대표하는 총독과 점령군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과 그의 군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사셨던 그 시대, 활동하시던 그 시대는 바로 젤롯당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대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해서 읽어야만 그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오늘의 본문이 비폭력과 무저항주의를 가르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불의를 끝장내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한 많은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는 이상주의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이 가르침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수동적이며, 겁쟁이로서 불의를 방조하도록, 내버려두도록 만들고, 악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꺾어버리고 굴종하도록 권고하는 말씀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인가요?


  우선 39절의 번역 문제를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에서 ‘맞서다’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안티스테나이(antistenai)인데 이것은 단순히 ‘맞서다’, ‘저항하다’란 뜻보다는 ‘폭력적으로 저항하다’, ‘폭동을 일으키다’, ‘반란을 일으키다’, ‘저항하여 봉기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마가복음 15장 7절입니다.

  “그런데 폭동 때에(=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인 폭도들과 함께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갇혀 있었다.”

  그러니까 39절의 적절한 번역은 ‘악에 대해(혹은, 너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맞받아치지 말아라’, 혹은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보복하지 말아라’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예수께서는 악에 대해 그 어떤 반(反)로마 투사들 못지않게 대항했습니다. 만일에 예수께서 젤롯당들의 활동을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배격했다면 예수께서 젤롯당 출신을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였을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적어도 세 명은 젤롯당이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도 젤롯당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가 마지막 순간에 단도를 휘둘렀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젤롯당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악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에 관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에 대해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하나는 젤롯당이 썼던 폭력적인 대항입니다. 그야말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맞붙어 싸우고, 더 나아가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로마 군인을 죽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당시 그 누구도 세계제국 로마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도피와 굴종입니다. 도망치고 무릎 꿇는 것입니다. 수동적으로 억지로라도 따르거나, 굴복하거나, 기껏해야 소극적인 공격으로서 명령에 복종하는 데 잘 따르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에 대한 대응방법으로서 폭력과 굴종하는 태도 모두를 몹시 싫어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는 세 번째 길, 제 3의 길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제 3의 길은 어떤 것인가요? 예수께서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간단한 사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오른손잡이가 주류인 세상에서 상대방을 오른손으로 때리면 왼쪽 뺨이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때리기 위해 왼손을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시 사회에서 왼손은 불결한 데에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소위 쿰란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해 주변에서 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공동체인데 세례 요한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로 그 쿰란 공동체에서 남겨 놓은 기록에 의하면 왼손을 사용해서 남들에게 무언가를 표현한다면 그는 10일 동안 공동체에서 쫓겨나서 참회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왼손을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때리는 방법은 손등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대방을 모욕하기 위해서 쓰는 방법입니다. 즉 상대방을 다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욕을 주기 위해서 쓰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네 꼬락서니를 알아라’ 라고 하면서 모욕을 주는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같은 신분의 사람을 손등으로 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만약 그랬다가는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미쉬나에 의하면 같은 신분의 사람을 주먹으로 치면 벌금이 4주즈(zuz, 1zuz가 하루 품삯)이었던 반면에, 손등으로 치면 무려 400zuz였습니다. 그러나 노예와 같은 하급자들을 손등으로 칠 경우에는 벌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상급자가 하급자를 훈계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종을,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자녀를, 남자가 여자를, 로마인이 유대인을 손등으로 때리고 그것으로 ‘너와 나는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 덤빈다는 것은 자살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의 독자들이 누구인가요? 바로 이와 같이 맞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군인들로부터, 또는 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늘 무시만 당했던 사람들, 그래서 손등으로 뺨을 얻어맞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네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왜 예수께서는 오른쪽 뺨을 맞았을 때 왼쪽 뺨마저 내놓으라고 말씀하셨던가요?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을 때리려면 결국 오른손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순간 두 사람의 신분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손등으로 때린 사람이 이제 다시 손바닥으로 한 대 더 치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내 하급자가 아니고 나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뺨을 돌려대는 것은 “나는 결코 너에게 뺨을 맞을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와 동등한 사람이다” 라는 인간선언인 것입니다. 이것은 비겁하게 또는 어쩔 수없이 맞는 것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도전하는, 나는 너와 같은 인간이라고 도전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속옷으로 인해 고소를 당했습니다. 채권자가 채무자를 향해 속옷을 내놓으라고 고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그야말로 너무너무 가난해서 한 벌밖에 없는 속옷과 겉옷을 담보로 바친 사람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이제 채권자가 유대의 율법에 의해서 겉옷은 빼앗을 수 없으니까 재판을 걸어서 속옷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값으로 쳐서 동전 한 푼도 안 될 만한 속옷을 빼앗기 위해서 재판까지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 내 속옷까지 빼앗기 위해서 재판까지 걸어? 그렇다면 이제 내 겉옷까지 너에게 넘겨주겠다. 가져가거라.”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이제 벌거숭이가 됩니다. 그리고 법정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사회에서 벌거벗는 것은 타부(taboo)에 속합니다. 금기사항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 수치는, 벌거벗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그 수치는 벌거벗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벌거벗게 만든 사람 혹은 그 벌거벗은 몸을 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그 유명한 사건을 여러분은 기억하시나요? 바로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었던 사건이지요.


  “노아는, 처음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 되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 한 번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가나안의 조상 함이 그만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서, 두 형들에게 알렸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가서,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창세기 9장 20-24절)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나가서 전했고, 셈과 야벳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덮어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함이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 아시지요. 25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창세기 9장 어디를 읽어 보아도 함이 왜 그렇게 저주를 받았는지 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벌거벗은 사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 사람이 부끄러운 것이고, 그 사람이 저주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세기 9장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이제 상황이 역전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속옷까지 빼앗길 지경에 처한 사람은 겉옷까지 벗어줌으로써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지독하게도 그 돈 몇 푼 빼앗기 위해서 속옷을 요구했던 사람은 상대방을 벌거벗게 만듦으로써, 그리고 그 벌거벗은 몸을 봄으로써 그 사람은 함과 같은 저주를 받는 위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채무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법정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보지 않으려 하면서도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왜 옷을 벗고 돌아다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말하겠지요. “바로 저 사람이 내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서 벗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의 비웃음을 사고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는 상황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

  

  옛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백인들에 의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절, 당국자들은 흑인들이 몰려 사는 어떤 한 빈민촌을 없애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일하러 나간 틈을 타서 빈민촌을 철거하기 위해 군인들이 도착했습니다. 군인들은 남아있던 몇몇 여자들에게 5분 이내로 물건을 챙겨 떠나면 불도저가 작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5분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군인들이 철거를 하기 위해 불도저를 밀고 들이닥치는 순간 그 여자들이 일제히 옷을 벗었답니다. 그리고 결국 군인들을 허물지 못하고 철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여러분, 이것 역시 로마 군인들과 관계되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는 자기네가 지배하던 모든 땅에 아주 정교한 도로망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도로에는 정기적으로 도로표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오 리에 한 번씩 표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은 백성들에게 자기의 짐을 지고 오 리를 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 이상을 가게 할 경우에는 군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배낭이 40kg 정도 된다니까 꽤 무거운 것이지요. 그것을 한없이 지고 가게 했다가는 백성들이 군인들에게 불만을 품고 항거를 할지 모르니까 그 이상을 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쨌든 군인이 시키면 지고 갈 수밖에 없고, 지고 가지 않으면 혼이 나고 그래서 이것은 자기들이 로마의 식민지라고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이 로마 군인들을 만났을 때 취할 수 있는 방법, 젤롯당이라면 돕는 척 하다가 슬쩍 칼로 찌르고 도망가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칼로 맞서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칼을 사용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 리를 가자고 하는 군인에게 십 리를 가 주라고 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군인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로마 군인 하나가 유대인 하나를 붙잡아 짐을 지우고 길을 가다가 오 리를 나타내는 표가 나오면 짐을 돌려달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유대인을 붙잡아서 이제는 네가 지고 가라고 하면서 데리고 갈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아니오, 내가 오 리를 더 지고 가겠소”라고 말한다면 그 군인이 얼마나 놀라게 될 것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아니, 왜 그러느냐? 무슨 이유 때문에, 내가 망신당하고 벌 받는 것을 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냐? 누구 약을 올리겠다는 것이냐?” 하면서 난리를 피울 것입니다.

  이제 처음에 일을 시킨 것은 로마 군인이지만 오 리를 더 가겠다고 말하는 순간 주도권은 유대인에게 넘어 왔습니다. 만일에 그렇다고 해서 오 리를 더 가게 한다면 그 군인은 황제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는 벌을 받습니다. 벌을 받지 않으려면 배낭을 내 놓으라고 야단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지켜보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어떨 것인가요? 그렇게 늘 무지막지하게 칼을 휘두르고, 억압만 하던 로마 군인이 배낭을 돌려달라고 사정하면서 쩔쩔 매는 모습을 보면서 통쾌했을 것이고, 크게 웃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오늘의 본문은 평생을 로마제국의 권력 앞에서 평생 노예처럼 살고, 노예정신에 붙잡혀 살던 그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기에서 해방되도록 새로운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옛 질서가 바뀌지 않은 상황 아래서도 지금 당장 인간성을 되찾고 존엄성을 갖고 행동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일찍이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던 바로 그 나라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그 나라는 위에서부터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룩이 빵 덩어리를 부풀게 하듯이 그렇게 옵니다. 결국 비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구체적인 예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은 물리치지 말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억압자인 로마 병사들, 로마 관리들, 제사장들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제 3의 길로써 맞서고, 당당하게 인간임을 선언하고 그리고 자기들보다 더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같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달라고 하고, 꾸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물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 돕고, 서로 베풀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진 때가 있었으니 곧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현실적인 힘에 굴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제 3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참으로 지혜롭게 거기에 맞서서 나는 인간임을 선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보듬어주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베풀며 서로 인간으로서 대접해주고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를 이루는 길이라고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길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 길을 찾고 따르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불행하게도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것 밖에는 다른 예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다른 예들은 우리가 삶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정신을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틀림없이 주님께서 그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늘 기억하며 주님을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