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강해(06.9.17-10.4.18)/2007 년도

2007. 4. 29 / 폭력을 넘어서 / 마태복음 5:38-42

람보 2 2015. 4. 2. 17:54

폭력을 넘어서


마태복음 5장 38-42절/2007년 4월 29일



  20세기 후반 러시아를 대표하는 소설가를 꼽는다면 아마 솔제니친이라는 사람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솔제니친은 1918년에 태어나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던 1941년에는 24살의 걺은이였습니다. 그는 전쟁에 참가하여 포병대 대령까지 진급했으나 1945년 당시 소련 지도자 스탈린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8년간을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보낸 뒤, 3년간을 더 강제추방당해야 했습니다.

  1956년 복권되어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1968년에 발표한 소설 ‘암병동’으로 1970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음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후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책이 나왔으니 그것이 바로 1973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된 ‘수용소군도’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스탈린 시대 동안의 소련 감옥을 소설로 쓴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세 권으로 된 이 작품의 제 5부에서 작가는 1949년 이래로 감옥에서 있었던 저항에 관하여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이 처음에는 당하기만 하다가 1949년이 지나가면서 무언가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이 저항 사실은 무엇보다도, 이때부터 점점 더 많이 감방 밀정들, 즉 감방 내에 숨어들어와 있던 스파이들이 동료 수감자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스탈린 치하의 감옥에서 가장 암담한 노릇의 하나가 바로 처음부터 자유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숨통을 조이는, 아주 면밀하게 계획된 밀정체계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소련 형무소들의 사정이 그나마 비로소 조금이라도 사람다워지게 된 것은, 수감자들이 밀정들을, 바로 자기네 가운데서 생겨난 그들을 밤을 틈타서 스스로 만든 단검으로 찔러 죽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였다고 솔제니친은 고백합니다.

  솔제니친은 이 이른 바 밀정 암살을 소상하게 묘사하고, 이때부터 비로소 감방들에 다시 움직이고 말할 자유가 상대적으로나마 존재하게 되었다고 단언합니다. 감옥과 수용소 교도관들의 지배체계가 결정적인 시점에서 구멍이 뚫려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다른 것이 아닌 대응폭력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해서 솔제니친은 또, 그 자신이 8년간 소련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밀정들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라! 칼을 별러 밀정 사냥을 나가라! - 바로 그거다! 바야흐로, 내가 이 대목을 쓰고 있는 지금, 내 머리맡 책꽂이에 겹겹이 쌓인 묵직한 인도주의 서적들이 나를 굽어보며 빛바랜 낡은 반론들을 내세워 책망에 찬 눈길을 껌뻑인다 - 뿌연 구름 사이로 내미는 별빛처럼 : 세상의 어떤 일도 폭력으로 달성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칼을, 비수를, 무기를 쥐는 자는 자기를 처형하고 억압하는 그자들과 너무나 성급히 닮고 말리라고. 그리고 폭력은 끝이 없으리라고 ...... 끝이 없으리라고 ....... 여기 책상머리에서는, 따뜻하고 깨끗한 이 서재에서는 나도 완전히 동의한다.

  그런데도 까닭 없이 25년 징역을 선고받는 사람, 제 이름은 잃어버리고 네 자리 숫자 딱지를 얻는 사람, 두 손은 언제나 뒷짐을 지고 있어야 하고, 아침마다 저녁마다 구박을 받고, 나날이 지쳐 빠지도록 부역을 하고, 심문받으러 BUR(관주 - 감옥 내 영창)로 질질 끌려가고, 영영 이 땅에서는 짓밟히기만 하는 사람 - 그 사람에게는 대단한 인간 애호의 변설들도 죄다 배부른 속물의 요설처럼 들린다.

  끝이 없으리라고! - 우리에게는 시작이 있을 것이냐가 문제였다! 우리의 삶에 한 가닥 빛이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가. 민중이 오랜 억압에서 교훈을 끌어낸 것은 헛일이 아니다. 선으로는 악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솔제니친의 이 글보다 더 냉혹하게 예수의 폭력 단념 요청을 반박하는 주장은,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반박하는 주장은 좀처럼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들이 감방 속에서 머리를 숙여 자기 운명에 굴복하고 있는 한, 스탈린의 테러는 더 활개를 치더라고, 그것도 갈수록 더 오래, 갈수록 더 크게 이어진다고 솔제니친은 고발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항을 조직화하고 폭력을 대응폭력으로 맞받아치게 되자 곧, 숨통이 트이고 희망이 번득이며 처음으로 죄수들이 스스로 인간임을 느끼게 되더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이로써 이미 예수의 요청들이란 끝장난 것이 아니냐고 솔제니친은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질서가 잡힌 관계 속에서는 그런 원칙들이 옳다는 것을 나도 시인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형무소들에서는 그런 것들이 환상이라는 것이, 요설이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솔제니친의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독일의 유대계 종교철학자였던 마르틴 부버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사건 이후 자기도 수많은 신앙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탈무드의 원칙을 믿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너를 죽이려고 꾀하거든, 네가 먼저 해치워라.”



  여러분!

  사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라는 율법 규정은 하나의 법규이며, 구약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모든 법의 기초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자를 다치게 하였는데, 낙태만 하고 달리 더 다친 데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금을 내되, 배상금액은 재판관의 판결을 따른다. 그러나 그 여자가 다쳤으면, 가해자에게는,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출애굽기 21장 22-25절)

  “자기 이웃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입힌 만큼 그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혀라. 부러뜨린 것은 부러뜨린 것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상처를 입힌 사람은, 자기도 그만큼 상처를 받아야 한다.”                   (레위기 24장 19-20절)

  “너희가 이런 일에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라.”                   (신명기 19장 21절)


  이름하여 동태복수법, 즉 가해자가 저지른 것과 똑같은 벌을 주라고 하는 이 법은 원래 살인자에 대한 무제한적인 복수를 제한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라멕, 첫 번째 살인자였던 카인의 5대손인 라멕이 남긴 말이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잘 나타내기에 그것을 제한하기 위해서 제정된 법이라는 말입니다. 라멕은 자기 아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라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창세기 4장 23-24절)


  여러분!

  이러한 사건이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지요. 그 유명한 한화그룹의 회장님이 아들이 셋이 있는데 그 아들들을 평소에 굉장히 자랑했다지요. 공부를 잘 한다고. 그런데 그중에 둘째아들이 한국에 왔다가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술 먹으러 갔다가 그만 술집 계단에서 사람들과 부딪혔다지요.. 그래서 싸움이 일어났는데 주로 그 아들이 눈 주위를 얻어맞았나 봅니다.

  그 아들이 얻어맞고 들어온 것을 본 회장이신 아버님, 분이 나서 아들과 경호원들을 대동해서 찾아갔다는 것이지요. 범인을 지목해서 찾아내서는 아들에게 ‘네가 눈을 얻어맞았으니 너도 눈을 때리라’고 했다지요? 그리고 산에 끌고 가서 폭행하고요.

  그러니까 그 양반은 철저하게 성서에 바탕을 두고 행동한 것이지요. ‘네가 눈을 맞았으니 너도 눈을 때려라.’ 저는 그분이 그렇게 신앙이 독실하신 분인지 몰랐습니다. 어쨌든 웬만하면 아들이 밖에 나가서 싸움하고 들어왔으면 자기 아들을 야단치는 것이 상식일 것 같은데 아들과 함께 찾아가서 자기도 때리고, 데리고 간 사람들에게 때리게 하고 그리고는 술집 사장님에게 돈 일천 만원을 죽 갔다지요. 그러니까 돈이면 뭐든지 해결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참으로 한국재벌들 어떻게 보아야 할지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이고,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라고 고백한 라멕의 말이 인간의 본성임을 기억하다면, 그 재벌회장님은 인간의 본성을 충실히 따른 분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행동과 비교해 보았을 때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만 복수하라는 율법의 가르침은 너무나 타당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솔제니친이 말한 바, 인간이 최소한으로나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최소한의 수단마저 뒤집어엎으셨습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지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것인가요?


  자,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네 마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시면서 네 가지 사례를 드셨는데 그 악이 본문의 끝에서부터 처음 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고약해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역점층법(Antiklimax)이라고 부릅니다. 뒤에서부터 보면 염치없는 간청에서 억지스런 강요를 거쳐 재판을 벌이겠다는 공갈로, 또 거기서 노골적인 폭행으로까지 점차 높아지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맨 처음에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말해놓고 갈수록 그 강도를 낮추는 방법이지요.

  

  우선 네 마디 그 자체를 살펴봅시다. 맨 끝에는 돈 문제가 나옵니다. 돈을 꾸려는 사람과 달라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지요. 먼저 누군가가 와서 돈을 꾸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이 그 자체로 무슨 불의한 일은 아닙니다마는 그러나 언짢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은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율법에 나와 있었고, 따라서 돈을 꾸어달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문맥상으로 보면 꾸어달라는 쪽에서 압력도 행사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이 말씀 바로 앞에 돈을 달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더 소상한 상황 설명은 없지만 아마 거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또 거지들이 순순히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끈질기게 요구하니까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주 성가신 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문맥상으로 보아 구걸하는 쪽에서 어떤 압력을 가한다는 것을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돈을 달라고 자꾸자꾸 졸라대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어라.”


  그 앞에서는 강요가 시작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억지로’ 라고 번역된 ‘angaruein'(강요하다)란 단어는 점령군이 권력을 행사하여 강제로 사람들을 동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전문용어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5장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마가복음 15장 21절)

  어떻든 여기서는, 로마인들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의 상황이 깔려 있습니다. 즉 당시에 로마 보병대는 유대인을 징발하여 삯도 주지 않고 길잡이나 짐꾼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로마 군인이 유대인 누군가에게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요구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그 앞에 나오는 경우는 더욱 난처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진 것이라고는 한 벌밖에 없는 옷을 빼앗길 처지에 몰렸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나와 있지 않지만, 어쩌면 무슨 담보로 맡겼던 것이든지 혹시 어떤 피해 보상을 해 주어야 하는 상황인지 모릅니다. 어쨌든 속옷 한 벌과 겉옷 한 벌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물론 이 사람은 겉옷을 빼앗길 염려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출애굽기 22장에서 법적으로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 너희가 정녕 너희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데,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자애로운 나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기 22장 25-27절)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추운 밤에 겉옷을 이불로 삼아야 했기 때문에 겉옷을 담보로 잡은 사람은, 해가 지기 전에 그것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유대 지역이 낮에는 따뜻하지만 밤에는 급격히 온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불을 덮고 자지 않으면 얼어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겉옷은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40절에 나오는 고소인은 재판을 걸어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옷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 만큼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속옷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속옷 하나를 빼앗기 위해 재판까지 걸었습니다. 참으로 지독하고 악랄하고 야비한 채권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가운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이제 역점층법의 맨 첫 머리에 최악의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하는 사람들의 처지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고, 또 가해지는 위협도 강해지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난폭한 폭력의 행사가 나타납니다. 힘이 세다고 해서 약한 사람의 뺨을 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뺨을 얻어맞는다는 것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지독한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먹으로 한 대 맞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요즘이든 옛날이든 누군가의 뺨을 때린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하는 말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누군가의 뺨을 때리고자 한다면 두 사람이 마주 서야 합니다. 그리고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이니까 상대방의 뺨을 때린다면 그것은 대부분 왼쪽 뺨을 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것은 바로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손등으로 뺨을 친다는 것은 동방에서 단순히 뺨을 때린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하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상대방을 심하게 모욕하기 위해 때린 것입니다. 제가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마는 상대방을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두 사람의 신분의 차이가 두렷하게 드러날 때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상대방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겠다고 할 때 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상대방에게 그 누구도 참기 어려운 모욕을 주기 위해 때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자, 여러분!

  이것이 과연 실천가능한 일들입니까? 혹 꾸려는 사람에게 꾸어주고, 거지에게 돈 한 푼  주는 것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오 리를 가지고 하는데 시간이 있으니까 십 리를 가 줄 수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속옷까지 빼앗겠다고 재판을 건 사람에게 겉옷도 벗어주고,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도저히 가능한 일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솔제니친이 말한바 책상머리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입니다. 더구나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권력을 남용하는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을 향해 위선자들이라고, 뱀이라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장 3-36절). 제사장들이 성전을 더럽힌 데 대한 분노의 표현으로 채찍을 들어 내리치셨으며(마태복음 21장 12절 이하,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 당신의 인격이 모욕당할 때 거세게 항의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경비병 하나가 곁에 서 있다가 손바닥으로 치고서 말하기를 ‘대제사장에게 그게 무슨 대답이냐?’ 하였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내가 한 말에 잘못이 있다면, 잘못 되었다는 증거를 대어라. 그러나 내가 한 말이 옳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8장 22-23절)


  그렇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결코 절대적 평화주의, 즉 어떤 상황에서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힘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평화주의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불의를 무조건 참아내기만 하는, 즉 당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그 너머의 것, 흔히 말하는 바, 비폭력과 무저항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 관계상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는 폭력 사용을 절대적으로 금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폭력저항과 보복행위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교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를 이루는 길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뒤를 따라 살아감으로 하늘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