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을 다 팔아서/2008. 8. 17
본문) 마태복음 13:44-46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 (표준새번역 개정판)
44절부터 49절까지에는 짤막짤막한 비유 세 개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세 개의 비유가 똑같이 전형적인 비유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44절)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45절)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47절)
그러니까 이 세 편의 비유는 하늘나라는 무엇과 같은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개의 비유를 나란히 모아놓은 것으로 보아 세 개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조금 주의 깊게 읽어보면 세 번째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 다르게 읽혀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학자들은 앞의 두 비유 즉 보물 비유와 진주 비유를 쌍둥이 비유라고 부릅니다. 저도 오늘 그 두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두 비유의 내용 자체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선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그 밭에서 누군가가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보물을 숨겨놓은 사람은 없어졌고, 그 밭의 주인은 자기 밭에 그런 보물이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아는 사람은 오직 그 밭을 갈던 사람뿐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주인에게 보물이 발견되었으니 가져가라고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대로 묻어두었다가 밤에 몰래 와서 캐내가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둑질이나 마찬가지이고, 밭주인과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겠지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제 자리에 숨겨 두었습니다. 몹시 흥분되고, 기분이 좋은 상태이지만 드러내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또 여기 진주를 사고파는 상인이 있습니다. 그는 늘 좋은 진주를 구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어느 날 너무너무 값진 진주를 만났습니다. 너무너무 비싼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귀하고 비싼 것이어서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야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재산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가 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도둑이나 강도라도 당하면? 그러나 상인은 선택했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하늘나라는 보물과 같고, 진주와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두 비유는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이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들은 가라지 비유나 누룩 비유보다 훨씬 더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나 누룩은 도무지 하늘나라를 나타내기에 적당하지 않지만 보물이나 진주는 귀한 것이니까 “하늘나라는 그렇게 귀한 것이고, 그러니 기뻐해라”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보여 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인가?
분명히 첫 번째 비유에 의하면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옛날 우리 부모님들은 가난하지만 그래도 돈이 생기면 장롱에 돈을 집어넣던 것을 모두들 기억하시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사시던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너무나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물 등을 어디에 보관할지를 늘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방법, 그것은 바로 땅에 묻어 두는 것이었습니다. 땅도 어디에 보관해야 하는지를 잘 결정해야 하는데 그들은 주로 농사짓는 땅에 묻어두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러니까 밭 한가운데 보물을 묻어두고 농사를 지으면 그 누구도 눈치 채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숨겨놓은 사람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숨겨놓고 전쟁이 나서 도망갔다가 전쟁이 끝나면 돌아와서 다시 캐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숨겨놓고는 주인이 전쟁 중에 죽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다면 결국 아무도 그 보물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지역 곳곳에서 보물이 발견된다는 것을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의 책 ‘유대전쟁사’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도시(=예루살렘)의 폐허 - 거의 다 로마인들이 파헤쳐 놓았지만 - 가운데서 발견되는 재물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가장 큰 부분은 사로잡았던 자들이 발견했고, 그들은 그것을 갖고 달아났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전쟁의 확실한 귀추를 알 수 없었기에 그 유대인 주인들이 땅에 묻어 놓았던 금과 은 등등, 가장 값비싼 보물들을 말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대의 박물관에 있는 많은 유물들 중에는 그렇게 땅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발견되는 보물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쨌든 오늘의 본문인 ‘보물 비유’에 나오는 그 사람은, 보물을 발견한 그 사람은 그야말로 횡재를 한 것입니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은 횡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도 “기뻐하며 집을 돌아가서는”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그렇게 우연히 발견하게 된 보물과 같고, 그래서 누리는 기쁨과 같은 것인가요? 그것이 과연 오늘의 본문이 진정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래도 과연 이 비유를 ‘보물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요?
두 번째 비유는 내용상으로 보면 ‘보물의 비유’와 거의 같아 보이지만 표현이 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앞에 나오는 보물의 비유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가난한 소작인이거나 날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데 비해서 여기 나오는 진주 장사꾼은 희랍어로 보면 ‘부유한 상인’을 뜻합니다. 적어도 진주를 사고팔려면 일정한 정도의 밑천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그가 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부자 상인이라는 말이지요.
구약성경에는 진주가 나타나지 않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진주는 부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진주는 아주 사치스런 장식품으로 쓰였고, 특히 목걸이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요즘은 진주가 양식이 되니까 싼 것들도 많이 있지만 옛날에는 양식이 되자 않고 전부 다 바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진주는 다 아주 비싸고 귀했습니다. 유명한 미녀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로마 은화로 1억 세스터스, 지금 돈으로 바꾸면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진주목걸이를 지님으로써 자기의 부귀영화를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진주는 너무나 진귀한 것이었기에 상인들은 홍해로, 페르시아 만으로 심지어는 인도까지 진주를 찾으러 위험한 여행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귀중한 진주라면 상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것,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어쨌든 여기서도 초점은 “진주‘인가요?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고 했으니 첫 번째 비유의 보물과 같은 역할은 여기서는 진주가 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두 번째 비유의 제목은 ’좋은 진주의 비유‘라고 붙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붙이려면 오늘의 본문을 이렇게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상인이 열심히 찾아다니던 좋은 진주와 같다.”
그래야 44절에 나오는 비밀의 비유와 같아집니다. 그러니까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두 개의 비유는 결코 보물과 진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개의 비유에 제각기 결론처럼 나와 있는 부분, 그리고 두 비유에서 유일하게 같은 내용이 바로 오늘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비유의 핵심은 바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그것을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왜 그렇게 볼 수 있는가?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결코 주님과 관계없는 무리들이나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적대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철저하게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앞의 36절에 분명히 “그 뒤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서, 집으로 들어가셨다.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51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예‘하고 대답하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비유는 분명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의 집, 직업, 부모, 형제자매, 처자식 등 모든 것을 당장 버리고 그를 따라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마태복음 기록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와 형제간인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거기에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깊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 4:18-22)
분명히 그들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나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9장에는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복음 9:9)
본문에는 생략이 되어 있지만 그가 세관에 앉아서 사무 보던 그곳에는 그가 받은 돈, 수입과 지출을 적던 장부 등등이 있었을 터인데 그는 그것들을 모두 버려두고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과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직접 맛보고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주시는 말씀 속에서 깨달음도 얻고, 기쁨을 누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는 마치 자기들이 행하는 것처럼 우쭐대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어 전도여행을 하게 하셨을 때 그들도 기적을 행했으니 아주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 현실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기 때문에 치른 희생이 너무나 크고,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이 너무나 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너무나 배가 고파서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음식을 제일 푸짐하게 먹는다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다가 바리새파 사람들한테 혼이 나기도 했던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또 예수 친히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실 정도로 사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우면 꿈도 잃고, 희망도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제자들도 사람인지라 때때로 자기들이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 회의에 빠지기도 했을 것이고, 낙심해서 떨어져 나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
“내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선택인가?” 끊임없이 물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들 가운데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 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발견하고서도 선뜻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낙심하지 말라고, 주저하지 말라고, 망설이지 말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발견한 하나님의 나라는 보물과 같은 것이다. 가장 귀한 진주와 같은 것이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 농사꾼이 모든 것을 다 팔아 밭을 산 것처럼, 장사꾼이 모든 것을 다 팔아 진주를 산 것처럼 너희들도 그것을 산 것이 아니냐?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어떻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고, 주저하지 않을 수 있고, 망설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길은 오직 하나,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그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연이든 성실한 노력의 결과이든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한없는 기쁨에 사로잡히며, 이제 예수가 그리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두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다는 것의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하늘의 보화를 눈앞에서 놓친 사람이 나오는 것을 아시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와서 그가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계명을 네가 다 지켰느냐?”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가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분명히 주님께서 그에게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22절에 이렇게 덧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부자 청년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보물을 차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목적과 수단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삶의 목적이 되고 나머지 모든 것은 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상대화되거나 혹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장애물로서 가치가 없는 것인데 그것을 뒤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사라지고, 그분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사라지고 삼박자 축복이니, 긍정적 사고방식이니, 교회의 대형화 등등이 목적이 되어 버리는 일, 예수를, 복음을 자기성취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리는 일들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나누어 주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쓸쓸히 주님의 곁을 떠나가는 한국교회가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보화이고 예수만이 진주인데 예수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쥐고 있는 한국교회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만이 보화이십니다. 예수만이 진주이십니다. 그분을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팔아” 헌신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은혜가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태복음강해(06.9.17-10.4.18) > 2008 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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