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중의 기적
눅 19:1-10 / 1995. 1. 8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 66권 안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천지 창조 이야기로부터 사도 요한이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복음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수많은 사건들이 참으로 생생한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읽어가면서 때로는 재미있기도 하고, 때로는 손에 땀을 쥘 만큼 아슬아슬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바로 오늘의 본문으로 택한 삭개오 이야기를 읽거나 이것으로 설교를 할 때가 제일 신이 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했거든요.
얼마 전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는데 보통 예람이- 예슬이 -엄마- 아빠 순서대로 기도를 하곤 했는데 그날따라 예슬이가 느닷없이 키 작은 순서대로 기도하자고 하면서 예람이- 예슬이- 아빠 -엄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나는 키 크게 해달라고 기도를 좀 해봤지만 그런 기적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도 않으셨거나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능력이 없으신가? 분명히 복음서에는 참으로 엄청난 기적들이 많이 나타나있는데 왜 내게는 키가 훌쩍 커지는 기적이 안 일어나는가? 바로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야할 기적은 무엇인가를 함께 찾아 가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전에 중학교 3학년 담임을 할 때,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가 되어서 원서를 쓰게 되었는데 한 학생이 성적이 워낙 처져서 도저히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워낙 강력하게, 모든 건 다 부모가 책임진다고 하면서 원서만 써 달라고 며칠을 졸라서 할 수 없이 써주었는데 그만 뜻밖에도 고등학교 연합고사에 붙어서 인문계를 갔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일을 두고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만약 원서를 끝내 안 써주었다면 큰 원망을 들을 뻔한 셈입니다.
또 지난 번 월드컵 예선 때 우리나라 대표팀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졸전 끝에 마지막 시합을 마치고 나오면서 예선 탈락 했다고 선수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오는 순간 다른 경기장에서 진행되던 일본 대 이라크 시합에서 마지막 휘슬이 울리기 직전 이라크 선수가 한 골을 넣어 동점이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 국민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1차 대전 때 영국의 로렌스 경이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독일의 전차군단과 싸우던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바로 그 로렌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라비아의 지도자들과 추장들을 영국으로 데리고 갔었습니다. 이 때 아라비아의 지도자들과 추장들은 졸지에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복잡한 서구 문명사회로 이송되었습니다. 말이나 타고 달리던 그들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나 철도 기관차, 빠른 자동차 같은 것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말할 수 없는 경이감으로 매료시켰던 것들은 비행기나 기차,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폭포수였다고 합니다. 물이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폭포. 그것은 물이 없는 사막지대에서 살던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사건들의 일반적 정의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일입니다. 기적(miracle)이라는 말은 ‘놀라다’ (to wonder)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형 mirari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은 우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어떤 사건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건은 모두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사건들은 그 원어로 볼 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희랍어 두나미스(dunamis)라는 말의 복수형 두나메이스(dunameis)인데 이것은 파워, 곧 힘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여기서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곧 기적은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갑자기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데 그 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세분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산 위에 초막 셋을 짓고 하나씩 머물러 사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구름이 산을 뒤덮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런 일이 있고 그 다음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 산 아래에서는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에 사로잡힌 아들을 데리고 와서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사정했지만 아무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려고 밤새 소동을 피웠을 것입니다.
귀신아 물러가라.
에이 쉿 물러가라.
그런데 눅 9:42 에 의하면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라는 말 한마디로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하지 못한 일을 예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해 내실 만큼 힘, 파워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43절에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은 예수께서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기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단지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 힘만을 말하는가요? 만일 그렇다면 소위 외경 중에 가장 유명한 '도마 가 전하는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요?
“어린 아이 예수가 다섯 살 되던 해, 어느 시내의 여울목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그는 그리로 흘러들어오는 물을 연못 안으로 모아들인 후 그 물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이 일은 오직 그의 말씀만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진흙을 개어 열 두 마리의 참새를 빚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고 또한 다른 어린 아이들이 그와 함께 그 곳에서 놀고 있었다. 예수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본 어떤 유대인이 즉시 그곳을 떠나 그의 아버지 요셉에게 가서 말했다. ‘이것 보시오. 당신의 자식이 지금 여울목에서 놀고 있는데, 진흙을 가지고 열 두 마리의 작은 새들을 빚었소. 안식일을 범했단 말이오.’ 그러자 요셉이 그곳으로 가서 보고는 그에게 외치며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 그건 안식일에 합당치 않아!’ 그러나 예수는 손뼉을 친 다음, 참새들을 향해 외쳤다. ‘가라!’ 그러자 새들이 날아올랐고 소리내어 노래하였다. ···· 그러나 서기관 안나(Annas)의 아들이 요셉과 함께 거기에 있었는데, 그가 버드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가 모아 놓은 물을 흩어 버렸다. 그러자 예수가 그것을 보고 분을 내어 그에게 말했다. ‘오, 악하고 죄 많고 어리석은 자여, 이 연못들과 물이 네게 무슨 해를 주었단 말이냐? 보라, 이제 너는 나무처럼 시들어 버릴 것이며, 잎도 뿌리도 열매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즉시 그 아이는 완전히 말라 버렸다. 하지만 예수는 그곳을 떠나 요셉의 집으로 갔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예수는 다시 그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한 어린아이가 뛰어가다가 그의 어깨를 부딪쳤다. 그러자 예수는 화가 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인생을 마치리라.’ 그러자 즉시 그가 넘어져 죽었다.····
그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의 늙은 어머니가 물을 길어 오라고 항아리를 주며 심부름을 보냈다. 그러나 도중에 어떤 사람과 부딪치는 바람에 항아리가 깨져버렸다. 그러나 예수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펼쳐서 물을 담아다가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그의 어머니가 그가 행한 것을 보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행한 신비로운 일들을 마음깊이 간직했다. ····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어느 날 쟁기와 멍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부자가 침대 하나를 주문했는데, 그는 그것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받침대 역할을 하는 나무 두 개 중 하나가 너무 짧아 요셉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어린 아이 예수가 그의 아버지 요셉에게 말했다. ‘두 나무를 나란히 놓고 당신 쪽의 끝을 맞추세요.’ 요셉이 그 어린아이의 말대로 했다. 그러자 예수는 맞은편에 서서 짧은 나무를 잡아 끌어당겨 다른 쪽과 똑같게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 요셉이 이 일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를 안고 입을 맞추며, ‘하나님께서 이 어린 아이를 내게 주셨으니 내가 복되도다’라고 말했다.“
조금만 더 추적해 보십시다. 브류어(E. Cobham Brewer) 목사가 쓴 ‘기적 사전’( A Dictionary of Miracles)이라는 놀라운 책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기록하느라고 530페이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중세의 성자들의 생애를 장식해 주는 기적들과 고대 교부들의 것으로 되어 있는 기적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전형적인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성 클라라 (St. Clara)는 어느 날 주님의 금식에 대해 명상하던 중 40일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금욕생활로 인해 그녀가 죽음의 고비에 다다랐을 때, 하늘의 음료로 가득 채워진 금잔이 하늘로부터 그녀에게 내려왔다. 그녀는 그것을 마시고 갈증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날 밤에 그녀의 남은 12년 동안의 삶을 충족시켜 줄 달콤한 음료를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그 후 12년 동안 그녀는 줄곧 성찬식 때 마시는 포도주 외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살았다.“
도마가 전하는 예수의 어린시절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나 초대 교부들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이런 이야기들은 꾸며낸 것입니다. 진실성이 없고 마치 요술과 같이 조작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갖는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 사건들은 놀라울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고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들은 영원한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문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조금씩이나마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두 번째 단어는 세메이아(semeia)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semeion(세메이온)의 복수형인데 그 뜻은 표시, sign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그 무엇, 곧 하나님의 성품이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것을 복음서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타나는 기적들 하나하나를 살려보면 예수께서는 그 중의 어느 것 하나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하고, 앉은뱅이가 걷게 하고 귀신들린 사람이 멀쩡해지고 하는 기적들 어느 것도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라는 유혹을 뿌리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로 떡이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권세를 주겠다. 그 세 가지 중에 하나만 행한다 해도 대단한 일이고 예수께서는 단번에 인기를 끌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떠받들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마지막까지 받았던 유혹 또한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라. 그러면 믿겠다” 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까지도 끝내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치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에만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작았던 키가 갑자기 커지는 일, 성적이 모자라는 사람이 입학시험에 붙은 일, 다 지는 줄 알았던 운동 시합에서 막판에 역전승하는 일, 모두 다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또 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제멋대로 살아가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목적을 깨닫고 삶의 가치관이 변하는 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게 되는 것, 그것 보다 더 큰 기적은 없는 것입니다.
1995년은 돼지띠의 해입니다. 그래서 돼지 저금통이 유난히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돼지 입이 왜 그렇게 우습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또 돼지비계가 왜 하얀 색인지, 또 왜 돼지는 꿀꿀거리는지 아십니까? 돼지는 원래 입이 길었답니다. 그런데 옛날부터 워낙 먹을 것을 밝히면서 거름더미든 쓰레기통이든 가리지 않고 입을 들이대고 먹을 것을 찾아먹는 바람에 옥황상제가 이를 불결하게 여겨서 긴 입을 잘라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 입이 지금처럼 뭉툭하고 콧구멍이 앞을 향해 뻥 뚫린 것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또 그 옛날 어느 산에 여우가 살았는데 길을 가다가 잘 익은 배나무를 발견하였답니다. 맛있게 생긴 배들이 가지마다 늘어졌는데 도저히 따먹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돼지한테 찾아가서 맛있는 배를 따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돼지는 여우를 따라가서 배나무를 들이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우루루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여우를 제쳐두고 혼자서 배를 다 주워 먹었습니다.
여우는 욕심쟁이 돼지가 괘씸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꿀이 많이 달린 커다란 벌집을 놔두었으니 꿀을 따먹으러 가자고 권했습니다. 돼지는 다시 여우를 따라 벌집이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과연 커다란 벌집이 보였습니다. 돼지는 맛있는 꿀만 생각하고 벌집에 입을 들이 밀었다가 그만 벌떼들이 벌떼같이 달려드는 바람에 꿀을 먹지도 못한 채 달아나다가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돼지를 잡아보니 배를 많이 먹어서 비계가 배처럼 허였고, 또 꿀물 때문에 죽은 돼지는 꿀이 원수라고 그 뒤부터는 ‘꿀꿀’거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재미있는 설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올 한 해 돼지의 해를 맞아 이런 돼지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돼지 꿈꾸고 복 받게 해달라고, 남들에게는 안 일어나는 기적이 내게는 일어나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리고 오늘의 본문의 주인공인 삭개오 역시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바로 돼지 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사람, 무슨 욕을 먹어도, 어떤 손가락질을 당해도 돈 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사람, 내 배 불리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사람이 아니라 돼지였고, 죄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기가 막히게도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짐승이 바로 돼지가 아니던가요? 그러나 바로 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했는가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거든,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은 것이 있거든 네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이전에 돈만을 삶의 목적으로 알았습니다. 돈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나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이었고, 또 죽을 때까지 손으로 움켜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난 후 변했습니다. 내 돈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돈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에 쓰여져야 하는 도구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고 내게 있는 돈은 결코 나만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의 목적이 바뀌었고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삭개오는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임원으로 선출되고 헌신을 다짐하며 예배를 드리는 임원여러분!
헌신은 결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헌신은 삶의 모습이 변하지 않은 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가 변한 것처럼 삶의 목적을 찾고 바른 가치관을 갖고 나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헌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헌신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기적인 것입니다. 바로 올 한 해, 제4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는 첫해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런 기적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삭개오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축복, 곧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는 놀라운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눅 19:1-10 / 1995. 1. 8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 66권 안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천지 창조 이야기로부터 사도 요한이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복음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수많은 사건들이 참으로 생생한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읽어가면서 때로는 재미있기도 하고, 때로는 손에 땀을 쥘 만큼 아슬아슬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바로 오늘의 본문으로 택한 삭개오 이야기를 읽거나 이것으로 설교를 할 때가 제일 신이 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가 키가 작다고 했거든요.
얼마 전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는데 보통 예람이- 예슬이 -엄마- 아빠 순서대로 기도를 하곤 했는데 그날따라 예슬이가 느닷없이 키 작은 순서대로 기도하자고 하면서 예람이- 예슬이- 아빠 -엄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나는 키 크게 해달라고 기도를 좀 해봤지만 그런 기적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도 않으셨거나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능력이 없으신가? 분명히 복음서에는 참으로 엄청난 기적들이 많이 나타나있는데 왜 내게는 키가 훌쩍 커지는 기적이 안 일어나는가? 바로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야할 기적은 무엇인가를 함께 찾아 가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전에 중학교 3학년 담임을 할 때,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가 되어서 원서를 쓰게 되었는데 한 학생이 성적이 워낙 처져서 도저히 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워낙 강력하게, 모든 건 다 부모가 책임진다고 하면서 원서만 써 달라고 며칠을 졸라서 할 수 없이 써주었는데 그만 뜻밖에도 고등학교 연합고사에 붙어서 인문계를 갔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일을 두고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만약 원서를 끝내 안 써주었다면 큰 원망을 들을 뻔한 셈입니다.
또 지난 번 월드컵 예선 때 우리나라 대표팀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졸전 끝에 마지막 시합을 마치고 나오면서 예선 탈락 했다고 선수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오는 순간 다른 경기장에서 진행되던 일본 대 이라크 시합에서 마지막 휘슬이 울리기 직전 이라크 선수가 한 골을 넣어 동점이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 국민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1차 대전 때 영국의 로렌스 경이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독일의 전차군단과 싸우던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바로 그 로렌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라비아의 지도자들과 추장들을 영국으로 데리고 갔었습니다. 이 때 아라비아의 지도자들과 추장들은 졸지에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복잡한 서구 문명사회로 이송되었습니다. 말이나 타고 달리던 그들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나 철도 기관차, 빠른 자동차 같은 것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말할 수 없는 경이감으로 매료시켰던 것들은 비행기나 기차,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폭포수였다고 합니다. 물이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폭포. 그것은 물이 없는 사막지대에서 살던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사건들의 일반적 정의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일입니다. 기적(miracle)이라는 말은 ‘놀라다’ (to wonder)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형 mirari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은 우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어떤 사건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건은 모두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사건들은 그 원어로 볼 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희랍어 두나미스(dunamis)라는 말의 복수형 두나메이스(dunameis)인데 이것은 파워, 곧 힘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여기서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곧 기적은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갑자기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런데 그 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세분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께 말했습니다.
“산 위에 초막 셋을 짓고 하나씩 머물러 사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구름이 산을 뒤덮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런 일이 있고 그 다음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 산 아래에서는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에 사로잡힌 아들을 데리고 와서 남아있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사정했지만 아무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려고 밤새 소동을 피웠을 것입니다.
귀신아 물러가라.
에이 쉿 물러가라.
그런데 눅 9:42 에 의하면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라는 말 한마디로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하지 못한 일을 예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해 내실 만큼 힘, 파워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43절에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은 예수께서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기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단지 인간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 힘만을 말하는가요? 만일 그렇다면 소위 외경 중에 가장 유명한 '도마 가 전하는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요?
“어린 아이 예수가 다섯 살 되던 해, 어느 시내의 여울목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그는 그리로 흘러들어오는 물을 연못 안으로 모아들인 후 그 물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이 일은 오직 그의 말씀만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진흙을 개어 열 두 마리의 참새를 빚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고 또한 다른 어린 아이들이 그와 함께 그 곳에서 놀고 있었다. 예수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본 어떤 유대인이 즉시 그곳을 떠나 그의 아버지 요셉에게 가서 말했다. ‘이것 보시오. 당신의 자식이 지금 여울목에서 놀고 있는데, 진흙을 가지고 열 두 마리의 작은 새들을 빚었소. 안식일을 범했단 말이오.’ 그러자 요셉이 그곳으로 가서 보고는 그에게 외치며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 그건 안식일에 합당치 않아!’ 그러나 예수는 손뼉을 친 다음, 참새들을 향해 외쳤다. ‘가라!’ 그러자 새들이 날아올랐고 소리내어 노래하였다. ···· 그러나 서기관 안나(Annas)의 아들이 요셉과 함께 거기에 있었는데, 그가 버드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가 모아 놓은 물을 흩어 버렸다. 그러자 예수가 그것을 보고 분을 내어 그에게 말했다. ‘오, 악하고 죄 많고 어리석은 자여, 이 연못들과 물이 네게 무슨 해를 주었단 말이냐? 보라, 이제 너는 나무처럼 시들어 버릴 것이며, 잎도 뿌리도 열매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즉시 그 아이는 완전히 말라 버렸다. 하지만 예수는 그곳을 떠나 요셉의 집으로 갔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예수는 다시 그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한 어린아이가 뛰어가다가 그의 어깨를 부딪쳤다. 그러자 예수는 화가 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인생을 마치리라.’ 그러자 즉시 그가 넘어져 죽었다.····
그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의 늙은 어머니가 물을 길어 오라고 항아리를 주며 심부름을 보냈다. 그러나 도중에 어떤 사람과 부딪치는 바람에 항아리가 깨져버렸다. 그러나 예수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펼쳐서 물을 담아다가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그의 어머니가 그가 행한 것을 보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행한 신비로운 일들을 마음깊이 간직했다. ····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어느 날 쟁기와 멍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부자가 침대 하나를 주문했는데, 그는 그것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받침대 역할을 하는 나무 두 개 중 하나가 너무 짧아 요셉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어린 아이 예수가 그의 아버지 요셉에게 말했다. ‘두 나무를 나란히 놓고 당신 쪽의 끝을 맞추세요.’ 요셉이 그 어린아이의 말대로 했다. 그러자 예수는 맞은편에 서서 짧은 나무를 잡아 끌어당겨 다른 쪽과 똑같게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 요셉이 이 일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를 안고 입을 맞추며, ‘하나님께서 이 어린 아이를 내게 주셨으니 내가 복되도다’라고 말했다.“
조금만 더 추적해 보십시다. 브류어(E. Cobham Brewer) 목사가 쓴 ‘기적 사전’( A Dictionary of Miracles)이라는 놀라운 책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기록하느라고 530페이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중세의 성자들의 생애를 장식해 주는 기적들과 고대 교부들의 것으로 되어 있는 기적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전형적인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성 클라라 (St. Clara)는 어느 날 주님의 금식에 대해 명상하던 중 40일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금욕생활로 인해 그녀가 죽음의 고비에 다다랐을 때, 하늘의 음료로 가득 채워진 금잔이 하늘로부터 그녀에게 내려왔다. 그녀는 그것을 마시고 갈증을 말끔히 씻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날 밤에 그녀의 남은 12년 동안의 삶을 충족시켜 줄 달콤한 음료를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그 후 12년 동안 그녀는 줄곧 성찬식 때 마시는 포도주 외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살았다.“
도마가 전하는 예수의 어린시절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나 초대 교부들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이런 이야기들은 꾸며낸 것입니다. 진실성이 없고 마치 요술과 같이 조작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갖는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 사건들은 놀라울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고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들은 영원한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문과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조금씩이나마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두 번째 단어는 세메이아(semeia)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semeion(세메이온)의 복수형인데 그 뜻은 표시, sign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단순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그 무엇, 곧 하나님의 성품이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것을 복음서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타나는 기적들 하나하나를 살려보면 예수께서는 그 중의 어느 것 하나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하고, 앉은뱅이가 걷게 하고 귀신들린 사람이 멀쩡해지고 하는 기적들 어느 것도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라는 유혹을 뿌리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로 떡이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권세를 주겠다. 그 세 가지 중에 하나만 행한다 해도 대단한 일이고 예수께서는 단번에 인기를 끌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떠받들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마지막까지 받았던 유혹 또한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라. 그러면 믿겠다” 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까지도 끝내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치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에만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작았던 키가 갑자기 커지는 일, 성적이 모자라는 사람이 입학시험에 붙은 일, 다 지는 줄 알았던 운동 시합에서 막판에 역전승하는 일, 모두 다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기적은 바로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또 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제멋대로 살아가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목적을 깨닫고 삶의 가치관이 변하는 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게 되는 것, 그것 보다 더 큰 기적은 없는 것입니다.
1995년은 돼지띠의 해입니다. 그래서 돼지 저금통이 유난히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돼지 입이 왜 그렇게 우습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또 돼지비계가 왜 하얀 색인지, 또 왜 돼지는 꿀꿀거리는지 아십니까? 돼지는 원래 입이 길었답니다. 그런데 옛날부터 워낙 먹을 것을 밝히면서 거름더미든 쓰레기통이든 가리지 않고 입을 들이대고 먹을 것을 찾아먹는 바람에 옥황상제가 이를 불결하게 여겨서 긴 입을 잘라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 입이 지금처럼 뭉툭하고 콧구멍이 앞을 향해 뻥 뚫린 것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또 그 옛날 어느 산에 여우가 살았는데 길을 가다가 잘 익은 배나무를 발견하였답니다. 맛있게 생긴 배들이 가지마다 늘어졌는데 도저히 따먹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돼지한테 찾아가서 맛있는 배를 따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돼지는 여우를 따라가서 배나무를 들이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우루루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여우를 제쳐두고 혼자서 배를 다 주워 먹었습니다.
여우는 욕심쟁이 돼지가 괘씸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꿀이 많이 달린 커다란 벌집을 놔두었으니 꿀을 따먹으러 가자고 권했습니다. 돼지는 다시 여우를 따라 벌집이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과연 커다란 벌집이 보였습니다. 돼지는 맛있는 꿀만 생각하고 벌집에 입을 들이 밀었다가 그만 벌떼들이 벌떼같이 달려드는 바람에 꿀을 먹지도 못한 채 달아나다가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돼지를 잡아보니 배를 많이 먹어서 비계가 배처럼 허였고, 또 꿀물 때문에 죽은 돼지는 꿀이 원수라고 그 뒤부터는 ‘꿀꿀’거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재미있는 설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올 한 해 돼지의 해를 맞아 이런 돼지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돼지 꿈꾸고 복 받게 해달라고, 남들에게는 안 일어나는 기적이 내게는 일어나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리고 오늘의 본문의 주인공인 삭개오 역시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바로 돼지 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사람, 무슨 욕을 먹어도, 어떤 손가락질을 당해도 돈 되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사람, 내 배 불리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사람이 아니라 돼지였고, 죄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기가 막히게도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짐승이 바로 돼지가 아니던가요? 그러나 바로 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했는가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거든,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은 것이 있거든 네 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이전에 돈만을 삶의 목적으로 알았습니다. 돈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나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이었고, 또 죽을 때까지 손으로 움켜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난 후 변했습니다. 내 돈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돈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에 쓰여져야 하는 도구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고 내게 있는 돈은 결코 나만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삶의 목적이 바뀌었고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삭개오는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임원으로 선출되고 헌신을 다짐하며 예배를 드리는 임원여러분!
헌신은 결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헌신은 삶의 모습이 변하지 않은 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가 변한 것처럼 삶의 목적을 찾고 바른 가치관을 갖고 나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헌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헌신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기적인 것입니다. 바로 올 한 해, 제4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는 첫해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런 기적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삭개오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축복, 곧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라는 놀라운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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