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건물은 헐어버리고
창세기 11:1-9, 사도행전 2:43-47 / 1985.6.23
저는 지지난 주부터 우리 교회의 청장년부와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직 두 시간 밖에는 하지 않았고 하는 시간도 별로 길지 않지만 앞으로 주로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노력을 해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청장년부와 하는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읽은 책 중에 우리 모두에게 아주 심각한 물음을 던지는 책이 한권 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왜 성서가 교회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가?>입니다. 그 책의 저자 스마트 교수는 그 책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성서의 종교이고, 성서만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며,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구호가 "오직 성서만"이라고 하는데 실제에 있어서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진정 "오직 성서만"을 절대적 권위로,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있는가?
입으로는 "오직 성서만"이라는 나팔을 불면서 행동과 생활로는 스스로 "오직 성서만"이란 구호를 묵살하고 무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서가 얼마나 중요시되고 있고 얼마나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는가?
설교자의 설교 가운데서 성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며, 기독교인의 성서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어느 정도인가? 진지하고 학구적인 성서연구모임을 갖고 있는 교회는 얼마나 되며, 그런 모임에 참여하여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교인은 얼마나 되는가?
한마디로 스마트 교수의 물음은 성서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과연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인가 라는 물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저녁 함께 예배드리시는 성도 여러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십시다.
성서가, 몇천년 전에 쓰여진 성서가 과연 오늘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딪쳐 오는가?
혹시나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에 대한 무지를 느끼지도 못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불감증 환자는 아닌가?
신앙생활에 열심임을 자랑하면서도 성서연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태만에 빠져 있기에 성서가 모든 상황에서, 매순간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들 공부 시킨다고, 자기는 공부 많이 했다고 큰소리치고 다니면서 사실은 일주일에 성경 다섯장을 못 읽어서 성경문답지도 하지 못하고, 그러면서 "너무 쉬워서"라고 핑계대는 사람은 아닌가?
그런데 여러분!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신앙에의 도전은 결코 하루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소위 "근대"가 시작된 이래, 특별히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게 된 18세기 이래 성서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도전은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인간의 이성 만능을 주장하는 근대인들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보는 기독교적 인간관 대신에 인간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였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 대신 과학에 의한 미래를 꿈꾸었고, 하나님의 섭리는 진화론에 의한 필연적인 역사발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을 때 그는 인간에게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양보할 수 없는 권리"가 부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낡은 교리문답에 쓰여진 것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라, 공정하고 행복된 삶의 완성을 찾아가는 것이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럴 듯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은 발전하고, 교육이 보급되고, 산업혁명으로 부가 축적되고 그래서 인류의 미래는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대서양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사는 인류는 그야말로 인간의 황금기를 맞이한 것 같았습니다. 이제 이 땅이 곧 천국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70년전 세계는 전쟁에 휩쓸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곧이어 세계적인 경제공황, 히틀러의 악마적인 발악, 2차대전의 서곡이 된 스페인의 내란, 원자탄, 그리고 지금까지입니다.
세계대전으로 유럽문명은 뿌리째 뒤흔들렸고 이제는 환멸과 냉소와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깨어진 꿈의 무더기에서 방황하고 사람들은 새롭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중립국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 목회하고 있던 젊은 독일인 목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포성이 울리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서로를 무참하게 죽이는 세계 속에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매주일 교인들에게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성서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을 그는 "모든 풍랑 속에 잠겨버린 파선당한 자의 안목으로 성서를 읽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파선을 당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가 되어서 성서를 읽을 때 비로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딪쳐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성서는 침묵하지만 나의 삶의 한복판에서 나를 이끌어 가시는 분 앞에 겸손히 설 때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온다는 말입니다. 그 목사님은 바로 칼 바르트(Karl Barth)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전인 기원전 950년경, 이스라엘은 유명한 임금 다윗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무엘서를 읽어보시면 아시지만 다윗의 시대는 수많은 전쟁으로 가득 차있는 시대였습니다. 다윗은 처음에 유다 족속의 왕이 되고 이어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고 이어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민족들을 하나하나 정복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정리되어 있는 다윗의 전쟁기록을 보면 그는 처음에 블레셋을 정복하고 모압을 정복합니다. 이 때 모압군대의 2/3를 죽이고 이어 아람인들을 공격하여 2만2천명을 죽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에서의 후예인 에돔사람 1만8천명을 죽이고 후에 요압장군을 시켜 에돔에서 남자는 전부 다 말살시키게 만듭니다. 그 외에도 암몬, 아말렉 등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여 다윗 시대는 그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황금기였습니다.
각처에서 조공이 들어와 물자는 풍부해지고, 노예를 부리기에 먹고 살기는 편해졌습니다.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았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대에 다윗의 정복전쟁을 통해서, 다윗이 흘린 피를 통해서 역사의 뒷면을, 아니 다윗의 칼에 죽어간 사람들의 아픔을 예리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었습니다.
과연 다윗임금의 승리가 하나님이 뜻인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과연 주변을 정복하고 희생시키기 위해 선택받은 민족인가?
그리고 그들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들의 답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였고, 이스라엘 민족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참다운 화평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창세기 2장에서 12장 3절까지를 기록한 <야훼사가>들입니다. 그들은 역사가들이었고, 다윗의 정복과 피흘림을 통해 다윗의 교만, 이스라엘의 교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근원을 묻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죄는 바로 교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손에 의해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카인과 아벨의 살인사건, 초인간적 거인들의 등장, 노아의 홍수,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잘 아시지요.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 바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되리라."
카인이 아벨을 죽이게 된 이유, 바로 "하나님은 왜 아벨에게만 호의를 갖고 계신가?"
초인간적 거인들,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을 말살하고 자기의 피조성에 의문을 품는 종족의 등장,
그리고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하는 말 "우리 힘으로 하늘에 닿게 하자"
결국 아담과 하와 - 카인 - 라멕 - 초인간적 거인들 - 바벨탑의 건립, 이 모든 것들은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는 과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을 때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오늘 한마디로 "교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빌론의 유적지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탑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그 탑의 높이는 최고 91.5m까지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여의도에 빌딩 하나 짓고는 동양 최대라고 자랑하는데 옛날에도 대형 건축물은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성서 기자는 이것을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벨탑은 한마디로 인간의 교만이 총집합한 "교만의 탑"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상 여기서 역사는 끝나야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살려주셨고, 아벨을 죽인 카인을 살려주신 하나님, 죄악에 가득 찬 인류를 홍수로 쓸어버렸지만 그래도 노아의 가정을 통해 구원을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는 단 한마디도 구원과 관계되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족보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제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파괴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내는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이며 하나님은 인류를 영원히 분노 속에 버리신 것 같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인간끼리만 살아가는 삭막한 존재로 변해버린 것 같았습니다. 끝없이 하늘을 향해 높아지려고만 했던 인류의 역사는 이제 파멸로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바벨탑은 인간이 쌓은 최대의 탑이고 하늘에 닿을 것 같은 튼튼한 탑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없이 교만에 가득찼기에 그것은 가건물이었고 결국은 쓰러질 운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마음에 쌓은 건물은 무슨 건물입니까? 혹시 가건물을 쌓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바벨탑이 무너지고 역사는 끝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바로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12:1-3)
아브라함. 그는 한마디로 순종의 사람, 낮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구원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족속들"을 위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낮아지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이어가시고 끝내는 하나님 당신이 가장 낮아지는 일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
그리고 바로 이렇게 낮아지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오늘의 두번째 본문 곧 초대교회의 공동체이고 오늘 우리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의 두번째 본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낮아진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벨탑은 엄청나게 크고 튼튼한 건물이었지만 그곳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교만한 사람들이 모였기에 그것은 가건물이었고 헐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는 비록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건물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모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낮아지는 사람들이 모였기에 그것은 점점 점점 커지고 지금까지 계속 발전해 온 진짜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어온 건물은 어떤 건물인가요? 가건물인가요, 진짜 건물인가요? 우리들이 지은 이 예배당은 가건물인가요, 진짜 건물인가요?
만일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성경공부는 왜 하느냐고, 아니 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제 다 아니까 하는 입장에 서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쳐 오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가건물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교역자가 되고,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고, 반주를 하고, 지휘를 한다 하더라도 "나야 이제 됐지"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저 밑으로 내려본다면 우리는 가건물입니다.
오늘 주관예배를 드리시는 장미속 속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새신자가 많습니다. 멀어서 교회 나오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가건물 짓기는 쉽지만 가건물은 반드시 헐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이 밤에 신앙의 가건물은 헐어버립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진짜 건물을 지으십시다.
창세기 11:1-9, 사도행전 2:43-47 / 1985.6.23
저는 지지난 주부터 우리 교회의 청장년부와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직 두 시간 밖에는 하지 않았고 하는 시간도 별로 길지 않지만 앞으로 주로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노력을 해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청장년부와 하는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읽은 책 중에 우리 모두에게 아주 심각한 물음을 던지는 책이 한권 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왜 성서가 교회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가?>입니다. 그 책의 저자 스마트 교수는 그 책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성서의 종교이고, 성서만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며,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구호가 "오직 성서만"이라고 하는데 실제에 있어서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진정 "오직 성서만"을 절대적 권위로,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있는가?
입으로는 "오직 성서만"이라는 나팔을 불면서 행동과 생활로는 스스로 "오직 성서만"이란 구호를 묵살하고 무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서가 얼마나 중요시되고 있고 얼마나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는가?
설교자의 설교 가운데서 성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며, 기독교인의 성서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어느 정도인가? 진지하고 학구적인 성서연구모임을 갖고 있는 교회는 얼마나 되며, 그런 모임에 참여하여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교인은 얼마나 되는가?
한마디로 스마트 교수의 물음은 성서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과연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인가 라는 물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저녁 함께 예배드리시는 성도 여러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고 넘어가십시다.
성서가, 몇천년 전에 쓰여진 성서가 과연 오늘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딪쳐 오는가?
혹시나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에 대한 무지를 느끼지도 못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불감증 환자는 아닌가?
신앙생활에 열심임을 자랑하면서도 성서연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태만에 빠져 있기에 성서가 모든 상황에서, 매순간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들 공부 시킨다고, 자기는 공부 많이 했다고 큰소리치고 다니면서 사실은 일주일에 성경 다섯장을 못 읽어서 성경문답지도 하지 못하고, 그러면서 "너무 쉬워서"라고 핑계대는 사람은 아닌가?
그런데 여러분!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신앙에의 도전은 결코 하루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유럽의 역사에서 소위 "근대"가 시작된 이래, 특별히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게 된 18세기 이래 성서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도전은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인간의 이성 만능을 주장하는 근대인들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보는 기독교적 인간관 대신에 인간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였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 대신 과학에 의한 미래를 꿈꾸었고, 하나님의 섭리는 진화론에 의한 필연적인 역사발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을 때 그는 인간에게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양보할 수 없는 권리"가 부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낡은 교리문답에 쓰여진 것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라, 공정하고 행복된 삶의 완성을 찾아가는 것이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럴 듯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은 발전하고, 교육이 보급되고, 산업혁명으로 부가 축적되고 그래서 인류의 미래는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대서양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사는 인류는 그야말로 인간의 황금기를 맞이한 것 같았습니다. 이제 이 땅이 곧 천국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70년전 세계는 전쟁에 휩쓸렸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곧이어 세계적인 경제공황, 히틀러의 악마적인 발악, 2차대전의 서곡이 된 스페인의 내란, 원자탄, 그리고 지금까지입니다.
세계대전으로 유럽문명은 뿌리째 뒤흔들렸고 이제는 환멸과 냉소와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깨어진 꿈의 무더기에서 방황하고 사람들은 새롭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중립국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 목회하고 있던 젊은 독일인 목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포성이 울리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서로를 무참하게 죽이는 세계 속에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매주일 교인들에게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성서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을 그는 "모든 풍랑 속에 잠겨버린 파선당한 자의 안목으로 성서를 읽으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파선을 당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가 되어서 성서를 읽을 때 비로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딪쳐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성서는 침묵하지만 나의 삶의 한복판에서 나를 이끌어 가시는 분 앞에 겸손히 설 때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온다는 말입니다. 그 목사님은 바로 칼 바르트(Karl Barth)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전인 기원전 950년경, 이스라엘은 유명한 임금 다윗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무엘서를 읽어보시면 아시지만 다윗의 시대는 수많은 전쟁으로 가득 차있는 시대였습니다. 다윗은 처음에 유다 족속의 왕이 되고 이어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고 이어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민족들을 하나하나 정복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정리되어 있는 다윗의 전쟁기록을 보면 그는 처음에 블레셋을 정복하고 모압을 정복합니다. 이 때 모압군대의 2/3를 죽이고 이어 아람인들을 공격하여 2만2천명을 죽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에서의 후예인 에돔사람 1만8천명을 죽이고 후에 요압장군을 시켜 에돔에서 남자는 전부 다 말살시키게 만듭니다. 그 외에도 암몬, 아말렉 등 주변 민족들을 정복하여 다윗 시대는 그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황금기였습니다.
각처에서 조공이 들어와 물자는 풍부해지고, 노예를 부리기에 먹고 살기는 편해졌습니다.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았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대에 다윗의 정복전쟁을 통해서, 다윗이 흘린 피를 통해서 역사의 뒷면을, 아니 다윗의 칼에 죽어간 사람들의 아픔을 예리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었습니다.
과연 다윗임금의 승리가 하나님이 뜻인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과연 주변을 정복하고 희생시키기 위해 선택받은 민족인가?
그리고 그들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들의 답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였고, 이스라엘 민족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참다운 화평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창세기 2장에서 12장 3절까지를 기록한 <야훼사가>들입니다. 그들은 역사가들이었고, 다윗의 정복과 피흘림을 통해 다윗의 교만, 이스라엘의 교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근원을 묻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죄는 바로 교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손에 의해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카인과 아벨의 살인사건, 초인간적 거인들의 등장, 노아의 홍수,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잘 아시지요.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 바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되리라."
카인이 아벨을 죽이게 된 이유, 바로 "하나님은 왜 아벨에게만 호의를 갖고 계신가?"
초인간적 거인들,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을 말살하고 자기의 피조성에 의문을 품는 종족의 등장,
그리고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하는 말 "우리 힘으로 하늘에 닿게 하자"
결국 아담과 하와 - 카인 - 라멕 - 초인간적 거인들 - 바벨탑의 건립, 이 모든 것들은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는 과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을 때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오늘 한마디로 "교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빌론의 유적지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탑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그 탑의 높이는 최고 91.5m까지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여의도에 빌딩 하나 짓고는 동양 최대라고 자랑하는데 옛날에도 대형 건축물은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성서 기자는 이것을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벨탑은 한마디로 인간의 교만이 총집합한 "교만의 탑"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상 여기서 역사는 끝나야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살려주셨고, 아벨을 죽인 카인을 살려주신 하나님, 죄악에 가득 찬 인류를 홍수로 쓸어버렸지만 그래도 노아의 가정을 통해 구원을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는 단 한마디도 구원과 관계되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족보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제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파괴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내는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이며 하나님은 인류를 영원히 분노 속에 버리신 것 같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인간끼리만 살아가는 삭막한 존재로 변해버린 것 같았습니다. 끝없이 하늘을 향해 높아지려고만 했던 인류의 역사는 이제 파멸로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바벨탑은 인간이 쌓은 최대의 탑이고 하늘에 닿을 것 같은 튼튼한 탑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없이 교만에 가득찼기에 그것은 가건물이었고 결국은 쓰러질 운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마음에 쌓은 건물은 무슨 건물입니까? 혹시 가건물을 쌓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바벨탑이 무너지고 역사는 끝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바로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12:1-3)
아브라함. 그는 한마디로 순종의 사람, 낮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단순히 이스라엘만의 구원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족속들"을 위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낮아지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이어가시고 끝내는 하나님 당신이 가장 낮아지는 일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
그리고 바로 이렇게 낮아지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오늘의 두번째 본문 곧 초대교회의 공동체이고 오늘 우리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의 두번째 본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낮아진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벨탑은 엄청나게 크고 튼튼한 건물이었지만 그곳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교만한 사람들이 모였기에 그것은 가건물이었고 헐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는 비록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건물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모시고 서로가 서로에게 낮아지는 사람들이 모였기에 그것은 점점 점점 커지고 지금까지 계속 발전해 온 진짜 건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어온 건물은 어떤 건물인가요? 가건물인가요, 진짜 건물인가요? 우리들이 지은 이 예배당은 가건물인가요, 진짜 건물인가요?
만일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성경공부는 왜 하느냐고, 아니 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제 다 아니까 하는 입장에 서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부딪쳐 오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가건물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교역자가 되고, 교사를 하고, 성가대를 하고, 반주를 하고, 지휘를 한다 하더라도 "나야 이제 됐지"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저 밑으로 내려본다면 우리는 가건물입니다.
오늘 주관예배를 드리시는 장미속 속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새신자가 많습니다. 멀어서 교회 나오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가건물 짓기는 쉽지만 가건물은 반드시 헐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이 밤에 신앙의 가건물은 헐어버립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진짜 건물을 지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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